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66)화 (367/582)

제366화. 여정의 시작 (1)

다시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일련의 사건은 도현의 학교생활에 변화를 만들어냈는데, 첫 번째는 역시 반을 무단 점거하던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 소문을 들었는지, 이전처럼 도현에게 말을 거는 낯선 사람의 수도 현저히 줄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덕분에 최근 들어서 가장 쾌적한 학교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두 번째는, 도현조차 생각지 못했던 변화였다.

“도현쓰~ 하이!”

“안녕.”

“이도현 왔어? 오, 안녕.”

“어디, 어디? 오오, 행님! 오늘도 얼굴에서 빛이 나십니다!”

“…너희도 안녕.”

바로 반 아이들과의 관계였다.

그날의 일은 2반 아이들에게 큰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원래도 도현에게 호감을 표현했던 이들이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전보다 편하게 대하는 것 같달까.

‘아니, 변한 건 나일 수도.’

도현도 느끼고 있었다. 반 친구들에게 걸어두었던 빗장이 풀렸다는 걸.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자신의 이름만 듣고 친해지려 군다고 생각했는데…. 

도현은 그날을 회고했다.

소란이 있었던 다음 날. 

도현은 담임 선생님의 허락하에 반 아이들에게 치킨을 돌렸다. 서지민이 주었던 쿠폰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쿠폰의 출처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건 도현에게 있어서 변화였다.

이전이라면 서지민에게 쿠폰을 돌려주었을지언정, 학교 애들에게 그 출처를 밝히며 치킨을 사줄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쿠폰의 비하인드를 알았음에도 도현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 사인 정도는 탐냈던가. 그래도 번호를 묻거나, 곤란한 일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먼저 상대를 재단한 건 나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도현은 손짓하는 친구들에게로 향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서툴구나 싶었다.

“뭐 보고 있었어?”

“오늘 점심 메뉴. 이거 봐. 스파게티래. 그래서 급식실로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루트 짜는 중.”

“야. 왼쪽 복도가 더 빠르다니까? 중앙 계단은 선배랑 마주칠 수 있음. 인사하다가 해 지겠네.”

“아. 빨리 가면 안 마주친다고.”

마음의 빗장을 푼 것과는 별개로, 이들은 도현에게 종종 불가해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도현이 표정을 흐리자 입씨름을 벌이던 서일준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너 오늘 방과 후에 뭐 해?”

“회사에 갈걸.” 

월요일은 소속사에 출근 도장을 찍는 날이었다. 도현의 대답에 서일준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아… 같이 피시방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야, 형님이 그런데 가시겠냐?”

“오늘 말고. 다음에 같이 가도 돼?”

“…엥?”

“헐.”

이상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기묘한 침묵을 깬 건 당혹이 서린 서일준의 목소리였다.

“진짜로? 간다고?”

“응.”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학기 초반에 도현에게 자주 물어봤지만, 늘 다정한 거절만이 돌아왔다. 누그러진 얼굴로 웃으면서도 한 번도 제안을 승낙한 적이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말랑하게 구는 거 같긴 했는데… 진짜로 수락할 줄이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서일준이 다급히 말했다.

“그, 그럼 내일…!”

“아, 미안. 내일은 어려워. 발레 학원에 가야 해서.”

그 대답에 서일준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역시 그냥 해본 말이었나…. 그럼 그렇지. 

그가 아쉬움을 애써 달랠 때였다.

“수요일은 어때? 그날은 시간 되는데.”

“!”

그가 아무런 대답 없이 쳐다만 보자, 도현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아, 물론 그날 시간이 안 된다면 어쩔 수 없….”

“아니, 아니! 좋아! 그날 시간 완전 괜춘함!”

이렇게 친해지는 걸까. 도현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맞아. 저 새끼 존나 한가해.”

“지는 아닌 척하네. 넌 안 올 거임?”

훈훈한….

“미쳤나? 당연히 가지. 너네 나 빼고 가면 변비 걸림.”

“뭐? 변비?”

조용히 있던 아이 하나가 눈을 희번득하게 빛냈다.

“아, 아니야. 듣지 마. 듣지 마.”

“쉬! 병철이 착하지. 형아 따라 하세요. 습습, 하- 습습 하-”

“비켜봐. 누구야. 어떤 새끼가 변비 소리를 내었어.”

“야야, 빨리 사과해. 김병철 요즘 모닝똥 못 싸서 존나 예민함.”

“헐. 야, 미안. 몰랐다.”

변비의 저주를 걸던 애가 미안한 낯으로 김병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훈훈은 무슨. 새침하게 한 번만 봐주겠다 말하는 김병철에, 도현은 지긋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 사실, 종종이 아니라 거의 매순간 이해할 수 없는 친구들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준 친구들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적응하는 게 맞겠지. 물론, 조금 험난할 거 같지만….

“쟤 뭐 하냐.”

“자, 자! 집중!”

갑자기 책상 위로 올라간 서일준이 손뼉을 마주쳤다. 단숨에 2반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김병철이 스윽,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너넨 보면 모르냐. 평범한 관종이잖아.”

“아하.”

“병철이 똑똑하네.”

친구들이 저를 씹어대는 와중에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은 서일준이 손바닥을 쫙 펼쳤다.

“수요일에 피시방 뛸 파티원 구함. 현재 인원 네 명.”

설마. 

도현은 급격히 불안해졌다. 

그러나.

“특별 파티원 이도현 있음. 선착순 세 명 받는다!”

슬프게도, 이러한 짐작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나!”

“내가 먼저 손 들었다!”

“내가 먼저였거든?”

“나도, 나도!”

“…….”

도현은 따가운 시선 속에서 얼굴을 싸맸다. 이거, 적응하는 게 정말 맞는 일일까. 혹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야?”

막 반에 들어오던 한설아가 열광적으로 손을 치켜드는 아이들을 보곤 흠칫했다. 그녀의 시선은 곧 도현에게로 향했고, 이내 납득의 기색을 내비쳤다.

…왜?

도현은 아주 억울해졌다.

* * *

점심시간에 느긋하게 이동하려던 도현은 일준과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뛰어야 했고, 결국 가장 먼저 급식을 받는 데 성공했다. 저도 모르게 텅 빈 급식실을 마주한 순간 성취감을 느꼈던 도현은 이후에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왜….

그리고 현재.

“다 왔네.”

도현은 교무실에 도착한 상태였다. 선생님이 부른다고 알려줬던 한설아는 의문 어린 도현의 눈빛에 자기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설아와 그를 제외하고도 몇 명의 아이들이 더 있었다. 공통점을 알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을 해소해주듯, 국어 선생님이 말했다.

“왜 불렀는지 궁금하지? 일단 너희들이 일 학년 중에서 제일 책을 많이 읽은 애들이야.”

오.

조금 흥미로워진 눈이 다시 아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중에서 시선이 마주친 한 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도현의 눈매가 좁아졌다.

근데 왜 여기에 쟤가 껴 있는 거지.

도현이 보기에 여기서 가장 이질적인 사람은 정희운이었다. 분명 책을 안 좋아하는 거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이 중에서 교내 독서 토론 대회 나가고 싶은 사람 있어?”

“독서 토론 대회요?”

“응. 2, 3학년도 나오는 거야.”

“팀은 어떻게 짜는데요?”

“세 명이 한 팀이야. 같은 학년끼리 해도 되고, 다른 학년이랑 섞어도 되고. 그건 너희 맘대로 해. 그래서, 하고 싶은 사람? 참가 의사 있는 사람은 여기, 신청서 하나씩 가져가.”

도현은 고민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신청서를 가져왔다. 한설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너 하려고?”

“응.”

그가 이런 대회에 나간 건 처음이 아니었다. 수학 경시대회처럼 큰 대회는 아니었지만, 델마 아카데미 내에서 했던 크고 작은 대회에 자주 참가했었다.

“그럼… 나 너랑 팀 해도 돼?”

“오히려 부탁하고 싶은걸.”

한설아는 입학 때부터 도현과 가장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였다. 일단 옆자리라서 물리적 거리가 가까웠을뿐더러, 도현은 내심 다른 아이들처럼 관심을 표하지 않는 한설아를 편하게 여겼다. 지금 와서는 나름대로 친한 사이라고 표현할 정도는 되었다.

“좋아. 그럼 나도 나갈래.”

한설아는 도현의 대답에 결심한 듯 신청서를 가지러 갔다. 그러고 보니 책은 뭘까. 도현이 선생님에게 질문하려던 때였다.

“저….”

도현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가 펴졌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예상했던 상대가 서 있었다.

“왜?”

“어…, 대회 나갈 건가 싶어서.”

“그럴 생각이야.”

“저기, 그럼….”

도현은 희운이 망설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문제였다. 말하질 않길 바랐지만, 도현도 알았다. 세상은 언제나 도현의 바람과 반대로 돌아간다는 걸.

“그, 나랑 같이 할래?”

“…….”

봐, 맞잖아.

“호, 혹시 팀원 다 정해졌어?”

“…아니.”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 건 도현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 사실에 어떠한 희망을 얻었는지, 희운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면 나랑….”

“미안한데. 그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더 말이 길어지기 전에 단호히 잘랐다. 앳된 얼굴에 당혹이 번졌다.

“어, 왜? 혹시 다른 팀원 있어?”

“응. 한 명. 그 친구 의견도 들어봐야 하는 일이라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네.”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도현이 이어 말했다.

“내가 친구한테 물어보고 알려줄게. 그래도 될까?”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대로 보낸 후에, 다음 날 적당히 ‘미안. 친구가 모르는 애는 불편하다네.’ 하며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실제로 도현이 알기로 한설아와 정희운은 접점이 없었다. 이동 수업에서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줍어하는 한설아가 정희운을 피하고 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도현의 새카만 속내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희운이 환하게 웃었다.

“응, 물론이지! 그 친구가 나를 받아주면 좋겠다!”

어쩐지 뒤에서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거 같았다. 도현은 눈을 몇 번 깜빡여 환상을 털어낸 후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내일 정도에….”

“받아줄게!”

“…….”

“…아?”

두 소년의 시선을 받은 한설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녀도 모르게 뱉은 말인 듯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은 채였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어… 혹시 다른 팀원이 너야?”

먼저 입을 연 건 희운이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앓는 소리를 내던 한설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야….”

몇 번 어깨를 들썩이며 심호흡하더니 고개를 든다. 여전히 얼굴은 조금 붉어진 채였다. 흘끔, 희운을 쳐다본 한설아가 용기를 내었다.

그녀는 몇 번 심호흡을 한 후 고개를 들었다. 조금 진정했는지 달아오른 얼굴이 제 색을 되찾은 채였다. 한설아가 조금 버벅대며 말했다.

“그, 내 의견이 필요한 거라면, 나는 괜찮다는 의미에서….”

“진짜?! 정말 괜찮아?”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한설아가 눈을 찡그렸다. 태양 아래 선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친구의 모습에 도현은 할 말을 잃었다.

“으응, 난 괜찮아.”

“고마워! 앗, 그러고 보니 너 나랑 같은 반이지? 한서라…? 그런 이름이었나?”

“어어, 맞아.”

맞긴 뭐가 맞아.

“이름 예쁘다, 서라야!”

“아, 아냐. 네 이름이 더 예뻐.”

도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고뇌하는 도현의 눈에 수줍어하는 한설아가 비췄다.

…그래. 다 내 탓이지. 사춘기 소녀가 좋아하는 소년을 향해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걸 간과한 게 실수였다. 도현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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