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67)화 (368/582)

제367화. 여정의 시작 (2)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방송국.

“이도현 배우님!”

제법 이른 아침임에도 도현을 맞이하러 나오는 이는 올해 말에 들어가게 될 사극의 총책임자이자, 감독이었다. 그는 주차장에서 나온 도현을 바로 맞이할 수 있도록 로비까지 마중 나온 채였다.

“전화로만 얘기 나눴는데, 이렇게 뵈니까 반갑네요. 드라마 감독 성진수입니다. 오시는 길은 괜찮았어요?”

“안녕하세요. 오는 건 힘들지 않았어요. 별로 멀지 않아서요.”

“다행입니다. 아, 옆에 있는 친구는 제 조수인데, 오늘 저와 같이 두 분 안내를 도와드릴 겁니다.”

서른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조영우라고 소개하자, 경찬호도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인사했다. 도현은 그들이 명함을 주고받는 걸 잠깐 기다렸다.

“자, 자.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 봐요.”

성진수 감독의 태도는 지극한 면이 있었다. 그를 보던 경찬호는 내심 SBC 방송국이 애가 많이 닳았구나, 생각했다.

오늘의 만남도 성진수 감독의 추진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물론 주요 배역 캐스팅이 이루어진 후 감독과의 미팅은 흔한 일이었지만, 오늘이 조금 유난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방송국 투어를 제안한 것.

본래 방송국은 일정 부분 개방해놓고 신청한 일반인에 한해서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배우에게, 그것도 감독이 직접 제안하고 안내역까지 맡은 건 확실히 유별난 일이었다. 경찬호의 시선이 성진수와 대화를 나누는 도현의 얼굴에 닿았다.

‘그만큼 중요하게 보고 있단 뜻이겠지.’

경찬호가 보기에 이도현이라는 존재는 과거의 이력과 현재 위치만으로도 독보적이지만, 그의 저력은 과거와 현재가 아니었다.

바로 미래였다.

소년이 가장 매력적인 이유는, 찬란한 미래가 손에 닿을 듯 선명히 그려지기 때문이었다.

연예계에서 잠깐 반짝 뜨는 스타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도현처럼 할리우드 스케일은 아니었지만, 스크린 데뷔와 동시에 신드롬을 불러왔던 배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 빛이 얼마나 환했냐와 그게 얼마나 오랫동안 빛나는가는 다른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저 어린 소년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올해에 개봉하고, 앞으로 몇 년간 이어갈 는 소년에게 지치지 않을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워져서 떨어졌다지만, 나이를 잊게 만드는 깊은 흑안을 보고 있자면 기대를 품게 된다.

적어도 그가 스스로의 몸이 무거워 추락하거나, 태양이 너무 뜨거워 타버리진 않을 것 같다고. 그리고 경찬호는 그게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증명한 적이 있으니.

모두가 전 세계의 비난을 견뎌내기엔 너무 작은 소년을 걱정하고 있을 때. 잠잠하던 소년은 MTV 영화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이들의 비난과 혐오, 경멸과 멸시, 걱정과 동정, 그리고 기대를 얹기에는 너무도 작은 몸이었다. 대부분의 이들이 소년의 동요를 점쳤지만,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레드카펫을 걸었다.

조금도 무겁지 않고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듯이.

그날 상의 종류와 상관없이 MTV 영화제의 주인공은 단연, 소년이었다.

그때 얼마나 시끄러웠던가.

모두가 소년의 용감함을, 침착함을, 대담함을 칭찬할 때 경찬호는 환상을 보았다. 지금보다 두 배는 크고, 어깨도 단단하게 여물고, 조금 더 성숙해진 청년이 레드카펫 위에 서 있는 환상을. 그 어떤 시련과 고난도 무너트리지 못한 소년이 기어이 청년이 되어 그곳에 자리한 환상을.

그리고 짐작건대, 그 환상을 본 건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도현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우호적으로 변한 것도 그 일환일 터였다.

사람들은 미래가 기대되는 어린 존재에게 관대해지는 본능이 있으니까.

그런데 NMC는 공식적인, 첫 스크린 데뷔를 가져갔을뿐더러 무언가 사이가 돈독해 보이고, KBN은 이번에 날름 채가서 ‘한국 귀환 후 첫 드라마’라는 타이틀을 얻고 예능에도 인연을 만들어 두었다. SBC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도 영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번 방송국 투어도 어떻게든 이도현과 인연을 만들어 보려는 거겠지.

물론 이 정도로 조급하게 구는 건 도현의 탓이 컸다.

도현은 방송에 큰 욕심이 없다 보니 딱 필요한 수준만 나간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SBC에서 제안한 것을 족족 차버린 것이다. 옆에서 본 경찬호는 도현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단 걸 알지만, SBC 측에서는 이대로 가면 큰일 나겠구나 싶었을 것이다.

“매니저분도 훤칠하시네요. 하하, 그 배우에 그 매니저님이신가.”

“배우님과 비교되기엔 부족하지만, 말씀은 감사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경찬호는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매니저의 대우는 그 매니저가 어떤 스타를 담당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곤 하니까. 이도현의 매니저라는 그의 직함은 어디서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어 주었다.

“자, 자. 방송국을 제대로 구경해보는 건 처음이라고 하셨죠? 가볍게 둘러보고 식사하러 가시죠. 이 근처에 아주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거든요.”

* * *

스스로를 조연출이라고 소개한 조영우는 말솜씨가 좋았다. 어째서 성진수 감독이 그를 대동했는지 곧장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들은 내내 친절했다. 덕분에 도현은 방송국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샅샅이 알 수 있었다. 이전엔 방송국에 들른 적이 있어도, 명확한 목적이 있었던 터라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관찰한 건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다.

놀라웠던 건 도현이 방송국에 있다는 얘기가 퍼지자 그를 보러 꽤 많은 이들이 왔는데, 그중 한 명이 국장이었단 것이었다. 그는 때마침 방송국에 있었는지 직접 몸소 내려와 도현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

이후에 네 사람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가볍게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더 끼지는 않았다.

식당에 와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배역에 관한 이야길 나눴고, 음식이 나온 후로는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친분을 쌓길 원하는 것이다 보니 성진수 감독이 그쪽을 더 유도하는 거 같기도 했다.

보통의 열네 살이라면 낯선 어른이 있는 자리에서 본인의 이야길 꺼내는 것을 어려워할 테지만, 늘 그렇듯 도현은 보통에서 조금 벗어난 편이었다. 도현은 그들이 나이가 많다고 과하게 눈치를 보거나 움츠러들지도 않았고, 또 그렇다고 제 나이대처럼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웠다.

단순히 긴장을 안 해서 대단하다, 라는 일차원적인 감상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입을 열 때는 차분한 눈으로 경청하고, 말이 모두 끝나면 조급하지 않게 입을 열며, 조곤조곤하게 얘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성인에게서도 보기 힘든 그 모습이 열넷의 소년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 도현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본 성진수 감독이 도현을 더더욱 붙잡아야겠다고 다짐한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식사가 끝나갈 때 즈음엔 도현의 학교생활 근황이 주제가 되었다. 도현이 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자 조영우가 호기심을 내비쳤다.

일을 위해 만난 자리긴 하지만, 가까이하면 할수록,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도현이라는 소년 자체에 대한 신비로움과 흥미가 깊어졌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일이라면… 음, 그렇네요. 독서 토론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게 최근 들어서 가장 특별한 일이죠.”

여러 의미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책을 좋아한다고 했죠. 무슨 책인데요? 나도 아는 거려나?”

“알 거예요. 주인공이 유명한 편이거든요.”

도현의 말에도 두 사람은 긴가민가한 기색이었다. 그에 가볍게 한마디 더 얹었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살인한 남자요.”

“아!”

“진짜 아는 거네! 이방인 맞죠?”

“네, 맞아요. 주제는 저도 몰라요. 아직 발표되지 않아서요. 그냥 책만 읽으면서 준비하는 중이죠.”

찬반 토론으로 진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책인 거 같아서 알아보니 자유토론 방식인 거 같았다. 들어보니 매년 두 번의 대회가 열리는데, 한 번은 지금 같은 소설로 자유토론, 한 번은 과학 서적을 주제로 한 찬반 토론이 이뤄진다는 거 같았다.

‘과학 토론 대회도 재밌겠는데.’

아쉽게도 그건 2학기에 있을 예정이었다. 도현의 스케줄상 참여하기도 힘들 거 같고…. 도현은 아쉬움을 접었다.

“혼자 하는 거예요? 아니면 팀?”

“팀이요. 교내 대회인데 모든 학년이 출전하는 대회라서요. 셋이서 한 팀을 꾸려서 나가요.”

“그럼 친한 친구들이랑 나가는 건가요?”

순간적으로 도현은 혀를 깨물 뻔했다. 간신히 그런 티를 내지 않은 도현이 반 박자 정도 늦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친구들이 방송국 궁금해하면 데려와요. 미리 연락하면 구경할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아, 예중 다니니까 친구들도 배우 지망생이려나? 대회 같이 나간다는 친구들 다 배우 지망생이에요?”

“한 명만요.”

이 화제를 벗어나고 싶은 터라 대답이 조금 짧아졌다. 그러나 감독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가 흥미 어린 낯으로 물었다.

“그럼 다른 한 명은요?”

“다른 한 명은… 지망생이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모호한 편이라서요.”

그들의 시선을 받은 도현은 이 화제를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는, 도현에게 이 얘기를 처음 듣는 경찬호도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체념을 삼킨 도현이 순순히 털어놓았다.

“이미 몇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지망생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거 같네요. 들어보신 적 있으실지 모르겠는데, 정희운이라고….”

“…정희운?”

“아! 걔 있잖아요, 감독님. 그 귀신 연기 한 친구. 그, 제목이… 악령?”

“악령?”

“잠깐만요. …이거. 이 친구요.”

조영우가 핸드폰으로 검색해서 화면까지 띄워 보여주자, 성진수는 그제야 조금 알아본 눈치였다. 도현은 새삼 정희운이 아역배우 중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편이란 걸 깨달았다.

“아아.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친구네. 이제 기억난다. 기억나. 이 친구랑 같은 학교였구나.”

그는 잠시 핸드폰을 건네받아 프로필을 유심히 보았다. 그의 눈에 잠깐 이채가 돈 것도 같았다. 인상이 완전 정반대네.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남자가 물었다.

“이 친구랑 친해요? 같은 반?”

“아뇨, 다른 반인데….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

그렇다고 여기서 진실을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도현은 적당히 대답하고 넘기는 편을 택했다. 도현의 대답을 들은 성진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래요.”

이후론 주제가 바뀌었다. 그들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후식까지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큼, 말한 것들도 혹시 생각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식사 자리가 끝날 즈음이 되어서 두 사람은 도현에게 말을 놓았다. 도현이 극구 사양하고, 사양한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도현은 성진수 감독의 말에 어설프게 웃었다.

그들이 막 식당 앞에서 헤어지려던 때였다. 성진수 감독이 의뭉스러운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 도현 배우님.”

“네?”

“재밌는 소식이 하나 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자, 오늘 만나서 아주 반가웠어. 조심히 들어가요.”

“…네.”

더 묻지 말란 얼굴이라 도현은 찝찝하게 수긍했다. 뭐. 소식이 간다고 표현했으니 알게 되겠지.

* * *

도현은 결심했다.

앞으로 찝찝한 기분이 들면 꼭 질척하게 잡고 늘어지겠다고.

대회 준비를 위해 가져왔던 책이 처량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침착하게 책을 주워 책상 위에 올린 도현이 숨을 몇 번 내쉬곤 물었다.

“뭐가 왔다고?”

“캐스팅 연락!”

“어떤 역할로?”

“용춘 아역!”

이번에 들어갈 사극 <여왕의 길>에서 투톱이나 다름없는 남자 주인공이 바로 비담과 용춘이다.

선덕여왕의 애인과 남편 말이다.

“…그래서, 그걸 하겠다고?”

“응!”

‘꼭 하고 싶어!’라는 감정이 가득 담긴 두 눈이 도현을 향해 반짝였다. 딱, 사탄이 꼬시려 왔다가 도리어 정화당해 도망칠 거 같은 정도의 환함이었다.

그러니까, 쟤랑 학교에, 팀에, 작품까지 겹친다고? 이 정도면 덩어리님의 농간 아닌가. 도현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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