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68)화 (369/582)

제368화. 여정의 시작 (3)

침묵이 길어지자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같은 작품에 출연할 수 있다는 소식에 기뻐하던 희운은, 조심스럽게 도현을 보았다.

“…저, 나 하면 안 돼?”

희운의 말에 도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어? 왜라니?”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하려고?”

“…아.”

답은 빠르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도현의 마음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정희운은 이상하리만치 도현의 눈치를 봤다. 도현처럼 형의 기억이나 감정을 가진 게 아닐 텐데도. 가끔은 그도 영혼의 존재를 알고, 저에게서 형의 영혼을 느낀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쳐내고 무시해도 끝끝내 닿아오는 시선은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은근히 틀어져 있는 도현이 인지할 정도로.

정희운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건 단순히 그에 대한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게 맞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기에 다른 게 추가되었다.

정희운이 그를 대하는 방식은 꼭 그가 친구들을 대하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상대가 돌려주지 않아도 아랑곳없이 쏟아붓는 감정. 그건 정상에서는 조금 어긋난 맹목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의문이 일었지만 물어볼 수 없어 관찰했다. 그럴수록 도현의 눈에는 보였다. 소년의 몸 곳곳에서 묻어나는 결핍이. 쌉싸래한 외로움의 냄새가. 모두 한때 그의 것이었고, 지금도 잔류해 함께하는 것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네가 왜 그러고 있어.

그걸 발견했을 때 무슨 기분을 느꼈던가. 놀라움. 몰이해. 기만과 어긋난 만족감… 그리고 그것들을 온통 뒤덮어버린 갑갑함.

네가 왜 그러고 있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희운은 언제나 행복해야 했다. 언제나 배가 터질 거 같은 애정을 받아먹고 슬픔이나 외로움 따위는 모르고 살아야 했다. 나는 그렇게 환한 양지에서 사는 너를 보며 열등감을 곱씹는 정도가 딱 좋았다. 드라마 속 배역으로 치자면 너는 주인공. 나는 밝은 주인공을 질투하는 한심한 악역. 그게 내겐 가장 완벽한 캐스팅이었다.

더 알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난 건지, 속이 상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만큼 격렬한 감정이 속을 헤집었다.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정희운이라는 존재는 도현에게 변수였으니까.

한국에 오기로 정했을 때. 거기에 정희운과의 만남은 상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변수였다. 더는 변수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이 격렬해질 때면 정희운을 밀어내고 무시하고 상처 줬다. 그러다가도 네 안의 나를 발견할 때면 기이한 끌림을 느꼈다. 동질감과 맞닿은 감정이었다.

솔직히, 도현은 인정했다. 정희운이 저를 정신 이상자로 봐도 할 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도 굉장히 변덕스러웠다. 맥이 봤으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미친놈이라고 했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그랬다.

지금도 비슷했다. 

정희운이 배역을 포기하기를 바라면서도 정말 포기하면 실망할 거 같았다. 뭐 어쩌라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도현은 깊은 생각을 포기했다. 

‘깊게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파.’

애초에 답을 찾기는 포기했다. 뭘 해도 찝찝함과 후회가 남을 거라면 현재의 기분에 충실하기라도 한 게 나았다.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하게?”

그리고 지금 가장 크게 느끼는 건 실망감이었다.

그에 대한 사감과 별개로… 그날. 선생님의 지시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연기를 맞춰보았던 날.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고 맞대응했던 모습이 인상적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으니까.

조금 어이없는 일이란 건 안다. 하지만 도현은 그 순간에 미약한 흥분과 설렘을 느꼈다. 상대를 밀어붙이고 그 속의 것을 꺼내고, 상대가 저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보며 즐거움을 느꼈다. 그 순간조차 도현은 연기자였다.

“…나는, 난.”

정희운은 심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건 손톱 끝을 긁어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쓴 약을 삼킨 사람처럼 입을 오므리다가, 간신히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하고 싶지만, 네가 싫다면….”

“됐어.”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자기 것조차, 주어진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시간 들여 생각하는 것도 낭비였다. 한때 기회조차 사치였던 도현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든 닿을 수 있는데도 나약함에, 게으름에, 아둔함에 손을 뻗지 않는 사람들을. 

도현이 제 친구들을 그렇게까지 사랑하게 된 데에는, 그들이 모두 그들의 삶에 열정적이고 맹목적이며 헌신적이라는 면도 분명 존재할 터였다.

“둘 다 책 읽어왔지?”

갑작스레 묻는 도현에 두 사람이 얼떨결에 긍정했다. 도현은 책을 펼침으로써 더는 그 화제를 이끌어나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묘한 눈빛의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건지, 도현은 태연하리만치 무감하게 말했다.

“오늘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거 같아. 다음번 모임에서는 각자 주제로 나올 것 같은 쟁점 몇 개씩 뽑아와서 토론해 보도록 하고.”

“응. 그러자….”

한설아가 조금 어색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정적이 길었으나, 서로 한마디씩 던지면서 분위기는 점점 풀려갔다. 다들 책을 읽고 와서 그런지 이야깃거리는 계속해서 나왔다.

도현은 본래의 페이스를 되찾고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생각에 빠졌다. 시선 끝에 위치한 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사실, 이 소설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상황 자체가 도현에게는 거북스러웠다. 같이 하는 사람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설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가령.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문장들.

1900년대에 살다 간 사람이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도현의 삶을 들여다보고 글을 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한 사람을 온전히 알면 그의 행동이나 사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여기지만, 도현이 보기엔 달랐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또, 너무 잘 알아서 모르는 경우도 존재했다.

당연했다. 가까울수록, 잘 알수록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장 완벽한 이해자여야 하지 않겠는가. 대부분 자신에 대한 일정한 몰이해를 가진 것만 보더라도 그게 아니란 건 확실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형을 이해해 보려고 매달렸으면서 고작 소설 속 문장을 보고, 마지막 순간에 바이올린을 켰던 형의 심정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이런 괴이한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 그뿐이라면 양팔 벌려 반길 일이었다. 그를 이해하는 건 도현에게 남겨진 평생의 숙제니까. 하지만… 형의 동생이 눈을 말똥이고 있는 상황은 상당히 거북스러웠다.

모든 걸 다 알게 돼도 저런 눈을 할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기억 속의 정희운은 언제나 형을 거부했으니까. 형의 죽음 같은 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면 도현의 삶 자체가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에 꺼림칙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행인 점은, 도현이 종종 이렇게 생각이 튀어 상념에 잠길 때마다 한설아가 적절히 주의를 끌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태도는 아마도 오해에서 기인한 거 같았는데- 아마도 도현이 모임 시작 전 희운과 대화에서 앙금을 미처 다 풀어내지 못했다고 여기는 거 같았다.- 그건 결과적으로 도현에게 적절한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벌어준 시간 동안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모임은 큰 문제 없이 굴러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완전히 긴장이 풀린 한설아가 툭, 말을 내뱉었다.

“근데 뫼르소는 왜 말을 안 했을까?”

그녀는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이 걸렸던 모양이었다.

“태양이 뜨겁다는 둥 알 수 없는 말만 하잖아. 답답해.”

도현은 별다른 이견 없이 수긍했다. 철학적이고 어떻고를 다 떠나서 답답할 만한 행동이었으니. 사실 사회 규범에 완벽히 적응하고 있는 한설아가 뫼르소를 이해하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난 왠지 알 거 같아.”

도현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응시했다. 정희운은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고 평소와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냥, 무언가 말하는 순간 나는 뫼르소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고민하지 않았을 거 같아서.”

두 사람이 조용하자 정희운은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조금 이상한가? 음, 재판장에서 판사나 검사, 변호사, 배심원, 기자… 모두 뫼르소를 안다고 생각하고 죄인으로 생각했잖아. 나도 뫼르소가 무언가 말했다면, 또 그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고 뭔가 멋대로 생각했을 거 같거든.”

정희운이 말이 꼬이는 것 같다며 웃었다. 도현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런 소년을 보다가 시선을 떼었다. 그날 모임은 삼십 분 정도 더 이어지다가 끝이 났다.

정희운의 반은 모임을 했던 곳에서 가까웠다. 그를 먼저 보내고 한설아와 도현은 반으로 돌아갔다. 한설아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너, 정희운 싫어해?”

한참 고민한 끝에 나온 질문이 저거였다.

“아니.”

“음… 네가, 같은 작품에 캐스팅된 걸 탐탁지 않아 하는 거 같아서….”

말을 하던 한설아가 헙, 입을 막았다.

“혹시 그런 거야? 급이 안 맞는 애랑 같이 하기는 싫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이없는 목소리로 답한 도현이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하긴. 네가 그럴 성격은 아닌 거 같았어.”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이쪽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짝사랑 상대한테 매정하게 구니까 신경 쓰였나.

아무 말 안 하려던 도현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한설아에게는 고마운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막상 말을 꺼내려니 적절한 문장이 생각나질 않았다. 반 문 앞에 멈춰 서서 눈매를 좁히던 도현은, 이내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걔가 배우라고 생각했어.”

온전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나자 더 선명해졌다. 주어진 기회를 냅다 차버리는 멍청이라 짜증 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전부는 아니었나 보다.

“배우라면, 적어도 자기 배역 정도는 지켜야 하잖아.”

평소보다 조금 느릿한 말투였는데, 한설아에게 말하고 있다기보단 스스로의 생각을 되짚어 정리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검은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 옆 사람을 쳐다보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한설아는 독사를 만난 쥐처럼 어깨를 바짝 굳혔다.

“내 한마디에 그만둘 배역이면, 애초에 의미가 없지 않아?”

아, 세상에.

도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별로 웃기진 않았지만, 웃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가. 어디가 잘못됐길래, 형과 얽힌 채 켜켜이 쌓인 감정을 두고도, 이런 일에서 이렇게 선명한 실망감을 느낄 수 있는 거지.

그는 저가 정희운에게 배우로서 기대했고, 또 실망했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시 한 번 바람 빠지듯 웃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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