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69)화 (370/582)

제369화. 여정의 시작 (4)

모임은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그게 한쪽의 일방적인 소통 거부로 인해 만들어진 평온이라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평화로웠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독서 토론 대회는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 주에 열렸다. 대회 준비를 이르게 시작한 이유기도 했다. 시험 기간에는 시험에 집중해야 하니까-한설아의 의견이었다- 말이다. 대략 삼 주간 이어진 모임은 시험을 이 주 앞두고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현의 일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도현은 여전히 발레 학원에 나갔고, 주말이면 양궁장에 반나절 내내 있었다. 또한 평일 중 하루는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게임을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친구들과 연락해서 놀아야 하는 날. 하지만 할리가 가족 행사로 빠지고, 니콜라스가 수영부 훈련으로 인해 불참하게 되면서 모임이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도현은 브라운과 둘이서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브라운은 유감이 매우 많은 모양이었다. ‘너랑 둘이서 하다가 고혈압으로 넘어가!’라는 말을 뱉은 브라운은 모임 취소를 선언했다.

그렇게 못하지는 않는 거 같은데.

정확히는 컨트롤이 끔찍하다기보다는, 잡을 수 있는데 열의가 없어서 놔주거나 느긋하게 구는 거에 가까웠다. 아, 그게 더 나쁜가.

고의는 아니었다. 그냥 아무리 해도 게임에는 별다른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그럴 뿐. 머릿속에 무한대의 세계를 상상하고, 펼치는 걸 좋아하는 도현에게 있어서 정해진 조작 키로 정해진 모션을 취하는 게임이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현재.

도현은 집 앞 공원에 나와 벤치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혹시나 누가 알아볼 일이 생길까 봐 캡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였다.

덥다.

여름이 다가와서 그런가. 슬슬 날씨가 더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느긋하게 걷는 사람도 있었고, 지나가는 길인지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희운과 모임을 한 날 이후로 과거가 떠오르는 빈도가 잦아졌다. 한번 물꼬를 튼 기억은 틈만 나면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건 형의 기억일 때도 있었고, 병원에서의 기억일 때도 있었다. 지금은 후자였다.

그때도 이렇게 공원에 나와서 사람들을 구경했었는데.

책을 읽으며 감정을 상상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책 속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을 때면, 혹은 무엇인지 모르겠을 때면 공원에 나왔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보았던 단어와 대조해 보았다. 

그러면 퍼즐 조각처럼 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었다. 그럼 돌아와서 그 표정을 따라 해봤다.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도현 나름의 놀이법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사람들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이상하게 비틀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순간이었다.

참 신기하지.

이 나라에 살던 형과 미국에서 살던 내가 결국엔 만났다는 게. 벤자민이 형과의 만남을 권유했을 땐 거절했는데, 결국에는 그렇게 만날 운명이었다는 게.

그래서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애와 만나게 된 것도 결국은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하던 도현은 한숨 쉬듯 웃었다. 너무 나갔다. 과한 짐작이었다.

…근데.

- 미안. 생각해 봤는데 안 되겠어.

첫 모임 후, 며칠 뒤에 찾아와서 한 말이었다. 며칠간 고민만 한 건지 안색이 한층 초췌해져 있었다.

- 네가 싫다고 해도 하고 싶어, 그 배역.

똑바로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가 어쩐지 익숙했다. 옆을 돌아보자 한설아가 자기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꼭 하려고. 그… 미안해.

기세 좋게 말하더니 마지막엔 눈치를 본다. 닮은 거 같다가도 하나도 안 닮았다. …하지만, 피가 안 섞였어도 가족이라는 걸까. 왜 자꾸 형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결론은 그거였다. 

형이 떠올라서인지, 아니면 그 바보 같을 정도로 순한 게 제 배역을 욕심내서 그런지. 기분이 조금 풀려버리고 말았다. 

…이 정도면 바보는 걔가 아니라 나 아닌가.

툭.

시선을 내리니 하얀색 배드민턴공이 보였다. 한쪽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사람들이 사라진 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여기까지 날아온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도현은 공을 주운 후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슬슬 돌아가려고 했으니, 이참에 집에 가면 될 거 같았다. 여전히 엉뚱한 곳에서 공을 찾는 사람에게 다가가 주운 것을 내밀었다.

“여기, 공이요.”

“어? 아! 감사합니다!”

“별일 아니에요. 그럼.”

주인에게 돌려준 도현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뒤돌았다. 공에 눈이 팔려 한 박자 늦게 얼굴에 시선을 주었던 남자가 그 뒷모습이 멀어진 후에야 헐, 하는 소리를 내었다.

* * *

기말고사는 중간고사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문제 없이 끝났다. 그때랑 달라진 게 있다면 쉬는 시간마다 답안지를 빼앗긴다는 것 정도일까.

한설아가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이 정도면 교무실에서 답안지 안 가져와도 되는 거 아니야? 여기에 백 점짜리 시험지가 있는데.”

그녀의 말에 도현은 부정했다.

“나도 실수할 수 있어.”

“너 솔직히 말해. 그거 예의상 겸손하게 말한 거지.”

“…아닐걸?”

그녀의 시선이 진해지자 도현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사실 맞아.”

“…와, 재수 없다. 진짜.”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거야.”

“나도 몰라.”

도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시험 기간만 되면 애가 약간 이상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사이 도현의 시험지를 보던 한설아가 중얼거렸다.

“수학 쌤 엄청 이 갈으셨던데….”

안 그래도 시험 일주일 전에 선전포고를 들었다. 이번 시험에서는 절대 백 점이 안 나올 거라나, 뭐라나. 반 애들이 다 있는 곳에서 말하긴 했지만, 시선은 명백하게 이쪽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기대했던 도현은 막상 시험지를 펼쳐보고 실망했다. 이건 AMC 10은 무슨, 8정도 난이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말만 그렇게 하셨던 거 아닐까?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들이던데.”

“와, 재수 없다. 진짜.”

“…….”

시험 기간에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 도현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시험이 끝난 후. 

독서 토론 대회는 생각보다 많은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주제는 이러했다. ‘과거의 행동이 나를 규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뫼르소가 재판장에서 그의 죄가 아닌,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아주 독립적인 사건으로 심판받는 점에서부터 뻗어 나온 쟁점이었다.

그건 꽤 흥미로운 주제였다. 처음 주제를 듣고 법률적인 근거와 재판 사례, 블라인드와 인공지능 재판까지 찾아와 준비했던 도현은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실망하고 말았다.

“재판에서의 판결은 개인의 과거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주장의 근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소설에서 뫼르소는 아랍인 살인 사건으로 재판장에 섰음에도, 그와 전혀 관계없는 일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것이나 장례식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것으로 그를 판단하고, 결과적으로 뫼르소가 기분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오판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더 들려야 할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설 외적인 근거는 없다는 건가요?”

“…어, 또.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과거에 이랬다고 해서, 이번에도 이럴 것이란 생각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에서는 더욱 한 사람을 규정하고 단정 짓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능성과 관련한 근거는요? 주관적인 견해 말고, 객관적인 근거를 듣고 싶은 건데요, 전.”

말이야 언뜻 그럴싸하지. 파고들어 가면 결국 속 빈 강정 같은 말들이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늘어놓았을 뿐인 말들. 그 어디에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이후로도 비슷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다른 참가자들의 준비가 너무 미흡했다. 실망스러웠다. 주관만으로 토론을 펼쳐갈 거면 대회가 아니라 소모임으로 즐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

덕분에 우승을 쉽게 거머쥐긴 했지만, 도현은 학교 독서 토론 대회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예정된 일인 것처럼 우승팀으로 단상에 서도 기쁘다기보단 애매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우승 소감이 있냐 물었을 때도 가만히 고개를 젓기만 했다. 단상에서 내려오자 한설아가 왜 아무 말도 안 했냐고 물었다. ‘다음부터는 주장과 근거의 차이점부터 알아 오면 좋을 거 같다고 하는 것보단 낫잖아.’라고 말하니 그녀가 질린 낯으로 수긍했다. 

어쨌든, 독서 토론 대회는 그 시작이 삐걱거렸던 것과 다르게 순탄히 끝났다. 정말 놀랄 만한 일은 그다음 날에 일어났다.

[배우 이도현, 차기작은 사극?]

[이도현이 선택한 드라마는?]

여기까지는 평범한 기사였다. 드디어 방송국 측에서 캐스팅 소식을 내보냈구나, 하는 간단한 감상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아역배우 전성시대가 온다!]

[SBC 새 드라마, 이도현×정희운 출연!]

[아역배우 황금기? 제2의 이도현, 정희운에 대해 알아보자!]

[이도현·정희운 두 아역배우의 만남! 실은 친한 친구?!]

[학교 친구에서 드라마 동시 출연까지… 동갑내기 두 아역배우의 케미 벌써 기대돼] 

기사를 보던 도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정희운과 자신이 공통분모가 꽤 있다는 건 안다. 같은 나이, 같은 학교, 같은 드라마니까. 

그래서 어느 정도 엮이는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본격적인 느낌이네.’

방송국 측에서 유도한 걸까? 

그들이 굳이 정희운에게 캐스팅 제의를 넣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둘 사이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화제성을 끌어내려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석연찮은 점은 있었다. 방송국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점이었다. 솔직히 화제성이야, 도현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할 테고. 무엇보다 정희운이 그렇게 신경 쓸 만큼 화제성이 있는가가 걸리는 부분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기념일을 챙기곤 하는 정희성의 동생이라는 점을 들자면 화제성이야, 충분하고도 남겠지만… 왜인진 몰라도 정희운은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찾아봐도 관련해서 정보가 뜨질 않는 걸 보니 확실했다.

인지도가 중요한 직업인 만큼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동생이란 위치는 유혹적일 게 분명했다. 단순히 생각을 못 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지. 그걸 써먹지 않는 이유는 의문이지만….

그걸 직접 물어볼 일은 생기지 않겠지. 아마, 앞으로 영영.

…됐다. 도현은 생각을 털어냈다. 정희운만 관련되면 깊게 생각하려고 굴어서 문제였다. 사실 홍보차 나온 기사라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 없는데 말이다.

도현은 다른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신경 쓸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대표적으로, 시험과 대회 모두 끝나고부터 도현은 한국을 잠시 떠나 있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의 스케줄은 여전히 CLA 측의 소관이라서 일정을 조정해야 될뿐더러, 그 전에 프랑스 릴에서의 휴가가 예정되어 있기에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생겼는데, 같이 휴가를 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연락해 두었던 친구 중 한 명, 니콜라스가 긍정적인 답장을 해왔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나르샤가 원래 이번 여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싶어 했다며, 일정에 끼워줄 수 있냐는 답장이었다. 도현은 단박에 긍정했다. 아쉽게도 진은 이미 가족 여행을 위해 티켓을 구매해둔 터라 함께하지 못했다.

‘진은 샌디에이고에서 보면 되니까.’

휴가가 끝나면 한동안 샌디에이고에 머물 예정이었으니 진을 볼 기회는 많았다. 

그렇게 여름 방학 계획으로 부푼 도현은, 알아채지 못했다.

- 얜 뭔데 자꾸 엮임?ㅋㅋㅋ

- 네 다음 듣보

- 하나도 안 닮았는데 무슨 제2의 이도현ㅋㅋㅋㅋ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하는 부정적인 여론을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