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70)화 (371/582)

제370화. 여정의 시작 (5)

프랑스 릴(Lille).

프랑스 북부, 오드프랑스 레지옹 노르 주에 위치해 있으며, 벨기에와 가까운 이 도시는 프랑스에서 10번째로 큰 도시이자 문화 도시였다.

한때는 프랑스 플랑드르-역사의 변천에 따라 영역이 자주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네덜란드에서 프랑스 북동부 지역을 통틀어 칭했던 단어-의 주요 무역 도시이기도 했던 이 도시는 문화 중심지라는 말에 걸맞게 특색이 살아 있으면서도 깨끗했다.

니콜라스와 나르샤는 며칠 뒤에 합류할 예정이라서, 먼저 도착한 세 사람은 느긋하게 도시를 구경했다. 작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크지도 않아서 며칠의 시간 동안 충분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볼 수 있었다.

도현이 직접 겪은 릴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전통 양식이 남아 있어서 그런가, 이탈리아가 떠오르면서 톡톡 튀는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엄마 말로는 벨기에와 비슷하지만, 릴이 전체적으로 조금 더 밝은 느낌이라고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거리의 모습이었다. 유럽식 돌이 깔린 거리에 느긋하게 오가는 행인들. 그리고 길옆에 죽 늘어진 테라스들.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감자튀김이나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어떤 날에는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야외 테라스에 앉은 이들은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즐겼다. 그 모든 게 어우러져 느긋하면서도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시아인이 적다 보니 기본적으로 와닿는 시선이 있긴 하지만, 그건 한국에서처럼 도현을 알아봐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인종에 대한 가벼운 호기심, 그뿐.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 보낸 며칠 사이 동안 도현은 도시의 여유로움에 동화되어 버렸다.

이번 여름휴가는 여행보다는 휴식이 주요 취지였다. 한국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생했으니 마음 편하게 쉬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을 때면 그랑플라스로 나갔다. 샤를르 드 골 광장은 만남의 광장 같은 곳이었다. 릴의 모든 사람이 여기서 만난다고 해도 그리 과장은 아닐 터였다.

거기에 앉아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보며 오늘은 뭐 할지 이야기를 나눴다. 미술관, 오페라 극장, 예쁜 카페, 플리 마켓 등등… 그날의 기분에 따라 끌리는 곳에 갔다.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점은, 같은 사람 사는 곳인데도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였다. 제일 오래 지냈던 샌디에이고, 베니스 영화제를 위해 갔던 이탈리아, 영화 촬영을 위해 들렸던 뉴질랜드, 여행 갔던 스위스 인터라켄, 그리고 한국과 여기, 프랑스 릴까지. 어느 한 곳도 똑같은 곳이 없었다.

특히 그 나라의 도시는 그 나라 사람들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거 같아서 재미있었다.

“아까 괜찮은 빵집을 봤거든. 거기서 빵 몇 개 사다가 오늘은 운하 앞에서 피크닉이나 할까?”

“좋아요.”

그렇게 하루 계획이 정해졌다.

너무 백수 같이 사는 거 아닌가 싶긴 했지만….

‘할 게 없는걸.’

이렇게 할 게 없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할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한국에 있을 때처럼 발레나 양궁 학원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촬영 준비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스케줄이 있는 것도, 놀자고 조르는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되게 시끄러웠는데.’

도현은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방학부터 개학 후까지, 한동안 한국을 떠나 있을 거란 소리를 들은 서일준 외 아이들은 솜사탕 씻은 너구리가 되었다. 어찌나 억울하고 황망해 보이던지. 도현이 당황해서 쳐다보자 어깨가 축 처진 서일준이 무언갈 주섬주섬 꺼냈다. 공책이었다.

- 이게 뭐야?

- 네 방학 계획이었던 것.

- ……?

도현은 떨떠름하게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방학 계획을 받아 들었다. ‘롯데월드 가기’, ‘랭크 두 단계 올리기’, ‘햄버거 가게 털기’, ‘떡볶이집 털기’… 뭘 다 털어?

이후로 손짓 발짓을 하며 말하는데, 요지는 그거인 거 같았다. 방학 동안 같이 놀 줄 알았다고. 

도현은 미안한 얼굴로 한국에 돌아오면 놀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그랬고… 생각보다 소속사 측도 시끄러웠다. 아니, 시끄러웠다기보다는 걱정이 많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휴가 이후 일정이 새솔 측의 손을 완전히 떠난 일이다 보니, 걱정스럽긴 한데 어쩔 도리가 없어서 속만 타는 모양이었다.

경찬호는 도현에게 몇 번이고 걱정 어린 당부의 말을 남겼다. 도현은 그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으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미국에서 도현을 케어할 사람은 이전 매니저인 오스카였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맡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오스카가 자원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뭐랄까… 두 집 살림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괜히 묘한 기분에 코끝만 찡긋했다. 

그래도 도현의 속을 가장 시끄럽게 한 건 단연 정희운이었다. 앳된 소년의 낯 위에 신 딸기를 씹은 사람처럼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방학을 며칠 앞둔 시점부터 정희운은 잠잠해졌다.

더 달라붙지 않고, 그렇다고 복도에서 마주칠 때 갑자기 뒤돌아 도망치거나 하지도 않고, 그냥 얌전하게.

가장 바라던 이상적인 태도였다. 

분명 그런데….

‘거슬려.’

이상하게 거슬렸다. 왜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앞에서 알짱거리는 건 싫었다. 하지만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도망치는 건 더 별로였다.

뭐 어쩌자는 건지.

자아가 만약 독립적인 존재였다면 멱살을 잡고 나랑 싸우자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여기 앉자! 딱 좋네.”

“도현아, 이리 와.”

그래도 여유로운 도시에 와서 그런가. 한국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도현은 부모님이 부르는 대로 가서 앉았다. 바로 앞에 운하가 보였다.

적당히 더운 날씨와 맑은 하늘. 눈앞의 운하와 그 주변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이 운하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 * *

아침부터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두 뺨이 미약하게 상기된 모습에 이장혁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좋아?”

도현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두어 번 주억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서 가늘고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다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탓에 약간 긴 머리카락이 눈가 주변에서 흐트러졌다. 서혜나가 부드럽게 앞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앞머리 많이 길었네. 눈 안 찔려?”

서혜나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약간 가렸다.

“가끔 눈을 찌르긴 해요.”

“오늘이나 내일 미용실 갈까?”

“여기서요?”

“상관없지 않아?”

서혜나가 보기에 도현은 삭발해도 예쁠 거 같았다. 그런데 어디서 머리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너무 불편하면 그때 가요.”

“그래, 그러자.”

도현은 머리카락에 관한 주제를 금방 잊어버린 채 초조하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분을 나타내는 숫자가 바뀌는 걸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봤을까.

지이잉-

[니콜라스 가비]

핸드폰이 울렸다. 도현은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자꾸 잔소리 좀… 어, 도리토스?

“니키.”

- 나 지금 약속 장소 다 와서 전화했는데, 넌 어디… 아.

탄성 소리가 나기 전부터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많은 거리에 있어도 익숙한 기운 정도는 잡아낼 수 있었다. 도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차올랐다.

- 너 찾았다.

“니콜라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나온 건 동시였다. 좀처럼 뛰는 법이 없는 도현이 달음박질했다. 한 손에 캐리어를 쥔 니콜라스가 다른 손으로 얼굴에 쓴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 아래로 장난스러운 에메랄드 눈동자가 드러났다.

“여어.”

“니키, 보고 싶었어.”

도현은 한가롭게 인사하는 니콜라스를 냅다 끌어안았다. 갑자기 끌어안긴 니콜라스는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씩 웃었다.

“내가 그렇게 그리웠어?”

“당연하지.”

“…크, 큼. 그러냐.”

장난에 진심이 돌아오자 그건 좀 민망했는지 귓불이 붉어졌다. 옆에서 나르샤가 두 아이를 보며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그녀는 도현을 보고 양팔을 벌렸다.

“나도 한번 안아줄래?”

“물론이죠. 오랜만이에요, 나르샤.”

“나도 네가 무척 그리웠어.”

그녀는 도현과 산뜻하게 한번 포옹하고는 떨어졌다. 그녀의 옆에는 미리 전달받았던 그녀의 남자 친구, 찰스가 있었다. 스위스 여행 이후로 처음 보는 찰스도 도현을 한번 꽉 안아주었다.

그들은 다 같이 숙소로 이동했다.

나르샤와 찰스는 니콜라스와 함께 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도현의 가족과 같이 여행하지는 않고 개별적으로 움직일 예정이었다. 그동안 니콜라스를 돌보는 건 이쪽의 소관이었다.

사실 니콜라스의 가족이나 도현의 가족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일이었다. 워낙 가깝게 지내기도 했고, 서로의 집에서 잘 때도 많아서 그런가. 하지만 한국에 있던 친구들은 조금 신기해했다.

- 다른 가족 여행에 낑겨서 간다고? 으, 난 싫다. 

이런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제야 ‘이게 불편한가?’라는 가능성을 떠올린 도현이 니콜라스에게 물어봤다. 우리 가족이랑 다니는 게 불편하냐고 말이다.

그리고.

- 왜? 너 불편해?

역질문을 받았다. 정말 전혀, 조금도, 1그램도 개의치 않는 모습에 도현은 안심했다. 그리고 기뻤다. 니콜라스가 자신을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뜻인 거 같아서. 들뜬 마음으로 방을 안내한 도현이 입을 열었다.

“여기가 내 방. 짐은 저쪽에다 두면 돼. 정리하는 거 도와줄까?”

“정리는 귀찮으니까 나중에!”

“니-키.”

“…윽.”

니콜라스가 머물 방을 구경하러 들어왔던 나르샤가 그를 부르자, 니콜라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지그시 쳐다보자 니콜라스는 구시렁거리면서 캐리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도와주고 싶었지만, 버릇 잘못 든다며 말리는 나르샤에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샤샤, 뭐 해?”

“찰스?”

“우리 방 봤어? 너랑 내가 뛰어다녀도 되겠던데.”

“그래? 잠깐만, 나 구경하고 올게.”

그녀가 멀어지자 니콜라스가 웩, 하는 소리를 내었다.

“저놈의 샤샤 소리 좀 안 했으면 좋겠어. 마귀할멈한테 샤샤는 무슨 샤샤야.”

그리 투덜거리면서도 니콜라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스위스에서 찰스를 지독하게 싫어했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나름 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도현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여기서 도현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가 없는 곳에서 니콜라스도 나아가고 있었다는 걸. 그건 복잡한 감상을 가져다주었다.

기쁘고 뿌듯한데 아쉽고 섭섭한….

“정리 끝! 나가자!”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너 여기 며칠 동안 있었댔지? 뭐 신기한 거 있어?”

도현은 프랑스 릴 생활 중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을 말했다.

“음, 경찰관이 말을 타고 다녀.”

“뭐? 너 거짓말이지?”

“아니, 정말이야. 오페라 극장 앞에서 흰색 말 타고 다녀.”

“안 속거든. 내가 바본 줄 아냐?”

니콜라스가 헹, 코웃음을 쳤다. …진짜인데. 도현은 더 말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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