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화. 여정의 시작 (6)
며칠 동안 미친 듯이 도시 내를 쏘다녔다. 이미 부모님과 한차례 들렀던 곳이 대부분인데도, 옆에 있는 사람이 바뀐 것만으로도 감상이 새로웠다.
도현은 내심 발레를 꾸준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저히 니콜라스의 활동량을 따라가지 못했을 거 같았다. 니콜라스는 지친다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거 같았던 니콜라스의 폭주는 정확히 4일째가 되어서야 멈췄다. 그는 이제 이 도시를 속속들이 파악했다는 듯 조금은 느긋해졌다. 내내 돌아다녔던 건 사실 구경이 아니라 영역 조사, 뭐 그런 거였던 걸까.
“야, 와플 먹자!”
“또?”
“싫으면 넌 다른 거 먹으면 되잖아. 아무튼 가자.”
“…그래, 가자.”
환한 대낮부터 침대에 뒹굴거리면서 놀던 도현이 몸을 일으켰다. 전보다 더 길어진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덮으며 흘러내렸다.
방문을 나서자 거실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던 부모님이 그들을 보았다. 나르샤와 찰스는 하루 전에 니스로 떠나서 이곳에 없었다.
“어디 가려고?”
“니키가 와플 먹재서요.”
“같이 가줄까?”
“둘이서도 괜찮아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일일이 뒤를 쫓아다녔지만, 이젠 니콜라스도 도현도 그렇게 어리지 않았다. 대낮에, 숙소 근처 대로변에 있는 와플 가게 정도는 알아서 갔다 올 수 있는 나이였다.
부모님도 처음에는 둘만 내보내길 꺼렸다. 하지만 그때 지원해준 건 찰스였다. 찰스는 자기가 이 나이 때는 마음껏 돌아다녔다며, 너무 겁먹게 하는 것도 안 좋을 거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그 말에 고민하다가 허락했고, 문제없이 잘 다녀오자 점점 마음을 놓는 게 눈에 보였다.
게다가.
‘스위스에서처럼 수상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의 기억은 도현에게 아직도 깊게 남아 있었다. 그 탓에 니콜라스가 릴에 도착한 후 며칠간, 털 세운 고양이처럼 주변을 경계하고 다녔다. 하지만 경계 끝에 깨달은 것은 이곳이 안전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놀다 올게요.”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
“도리토스는 제가 잘 챙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누굴 챙긴다는 건지.
도현은 헛웃음을 짓다가 니콜라스를 붙잡고 숙소를 나섰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라 그런지 머리 바로 위에서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니콜라스와 도착한 와플 가게는 Meert이라는 가게였다.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이 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 가게는 와플이 조금 독특했다. 타원형의 긴 와플을 겹겹이 쌓아 누른, 납작한 모양이었고 안에 들어가는 크림을 취향대로 고를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정확히 이 와플과 사랑에 빠진 상태였다.
그리고 틈만 나면 졸라대는 니콜라스에, 도현은 이곳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레스토랑도 겸하는 곳이라 어떤 날에는 두 번 올 때도 있었다. 점심에는 디저트를 먹으러, 저녁에는 식사하러 말이다. 그 때문인지 사람이 많은 가게인데도 종업원이 알은체를 해왔다.
도현은 와플이 질렸기 때문에 홍차와 라즈베리 타르트를 시켰다. 니콜라스는 와플에다가 스무디를 시킨 참이었다.
“나왔다!”
음식이 나오자 니콜라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게 좋은가. 도현은 소리를 내며 작게 웃고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전화 받았습니다아!
“진, 영상 통화야.”
- 어? 진짜네?
진이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트리자 까만 화면이 밝아졌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주근깨가 총총 박힌 활기찬 소녀. 진 레이시였다.
- 어디야? 인테리어 예쁘다!
“카페야.”
도현은 화면을 돌려 카페 내부를 보여주었다. 가게는 아이보리 색의 벽과 카키색의 의자로 꾸며져 있었는데, 궁전 같은 느낌이었다.
“앞에 니키도 있어. 니키.”
“움?”
대충 고개를 들어 아는 척하던 니콜라스가 불현듯 눈매를 와락 찌푸렸다.
“머리가 왜 그 모양이야?”
- 왜. 너무 예뻐?
“아니. 토할 거 같아.”
- 응, 나도 나 예쁜 거 알아.
“토할 거 같다니까?”
- 그래, 그래. 예쁘다고 그만 말해도 돼.
둘 다 서로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도현은 니콜라스를 비추던 화면을 돌려 제 얼굴을 비추도록 했다. 화면 속의 진은 휴양지 옷을 입고 양갈래를 하고 있었다.
“예뻐, 진.”
- …있잖아. 그거 알아?
“뭘?”
- 네가 더 예뻐. 난 주변이 중세풍이길래 드디어 네가 미술관에 예술품으로 등록된 줄 알았잖아.
“…….”
- 네 집에는 그림을 걸 필요가 없어. 네가 그림이니까.
“…….”
- 혹시 집에 놀러 온 사람이 놀라진 않니? 집에 조각상이 돌아다닌다고 말이야.
“알았어. 그만해.”
- 더 있는데….
“아니야. 없어.”
진은 못내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다가 수긍했다. 도현의 얼굴이 붉어진 게 화면 너머로도 전해진 탓일 터였다.
이후로 진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주로 여행 중에 본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후로도 잡담을 조금 더 나누다가 통화를 종료했다.
“아, 잘 먹었다.”
그사이 와플을 해치운 니콜라스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은근슬쩍 도현의 접시를 쳐다보았다. 도현은 말없이 접시를 조금 밀어주었다. 니콜라스는 거절하는 법 없이 포크를 들고 달려들었다.
먹을 땐 신나게 먹더니. 접시가 바닥을 보이자 슬쩍 눈치를 본다.
“내가 다 먹었는데… 괜찮아?”
“괜찮아. 별로 배도 안 고팠고.”
“그래? 그럼 말고!”
역시 단순했다. 금방 기분을 털어내는 건 니콜라스의 장점이기도 했다. 도현은 배가 부르다며 골골대는 니콜라스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먹었으니까 조금 움직여 줘야 했다.
“역시 거기?”
“응, 거기.”
여기서 ‘거기’는 대광장을 말하는 거였다. 며칠이나 됐다고 릴 사람 다 되어 버린 도현과 니콜라스였다.
그랑플라스에는 오늘도 사람이 많았다. 니콜라스와 도현은 할 것도 없이 그곳을 뱅뱅 돌았다. 배나 꺼트릴 겸이었다. 그러다가 한쪽에서 기타 가방을 주섬주섬 내려놓는 소년을 발견했다.
뭐 하는 건지 궁금해서 조금 더 주시하자 벤치에 앉아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버스킹처럼 거창하게는 아니고 그냥 혼자 나와서 노는 모양이었다.
“구경할래?”
도현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본 니콜라스가 말했다.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 안녕.”
구경하자던 니콜라스는 불쑥 인사를 건넸다. 벤치에 앉아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가, 앞에 서 있는 두 소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응, 너. 연주 구경해도 돼?”
“그렇게 잘하진 않는데… 그래도 좋다면.”
“상관없어! 어차피 할 일이 없었거든.”
“그럼 좋아.”
소년은 선선히 승낙했다. 도현과 니콜라스는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자, 그냥 소년이 있는 벤치 앞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여기는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소년은 잠깐 기타를 조율하더니, 익숙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영화의 OST라서 니콜라스는 금방 알은체했다. 그 후로도 누구나 알 법한 유명한 멜로디들이 흘러나왔다.
곡이 끝날 때마다 니콜라스와 도현은 성실하게 손뼉 쳐 주었다. 소년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세 곡 정도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세 사람은 통성명했다.
“가스파르 파벨이야.”
“니콜라스 가비.”
“이도현. 이곳 식으로 하면 도현 리.”
“동양인이야? 혼혈?”
“전자. 미국인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왠지 영어가 유창하더라.”
가스파르와는 금방 친해져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님이랑 다닐 때는 이렇게 친구를 사귈 생각을 못 했는데, 역시 니콜라스랑 다니니까 새로운 일들이 생겼다.
“매번 광장에 나와서 기타를 치는 거야?”
“아니. 가끔만. 그리고 보통은 친구들이랑 나와서 같이 연주해. 오늘은 집에 있기 심심해서 나온 거고.”
“친구들?”
“응, 밴드를 하거든. 실력은 별로 좋진 않아. 취미로 모인 거라서.”
“내 친구도 밴드 하는데!”
“정말? 뭐 하는데?”
니콜라스의 말에 가스파르가 호기심을 보였다.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대화는 시원시원하게 이어졌다. 진의 얘기가 나오다 보니 도 언급됐다.
“나도 그 영화 좋아해. 곡 연주할 줄도 알아.”
아는 곡이 나와서 신이 난 가스파르는 곧장 연주하기 시작했다. 경쾌한 멜로디가 귀를 파고들었다.
바로 앞에 그 영화에 나온 배우가 있는데, 전혀 모르는 채로 신나게 연주하는 가스파르에 도현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니콜라스도 마찬가지인지 킥킥대며 웃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웃은 가스파르는 흥이 차올랐는지 멜로디를 변주해가며 연주했다.
짝짝짝!
두 사람의 박수에 씩 웃던 가스파르는 도현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기울였다.
“너 그런데 누구랑 닮았다.”
“누구?”
“영화에 나온 앤데… 좀 닮았어.”
“그래? 신기하네.”
도현이 시침을 떼자 니콜라스가 웃긴지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렸다.
그 후로도 조금 노닥거리던 세 사람은 슬슬 들어가 봐야 한다는 도현의 말에 인사를 나눴다. 가스파르가 내일도 이 시간에 광장에 나올 예정이라고 말하자,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내일도 만나기로 했다.
니콜라스와 숙소로 들어간 도현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꺼냈다.
“연주하려고?”
“응. 괜찮아?”
“나야 좋지.”
즐겁다는 듯이 연주하는 가스파르를 보고 있으니 손이 간질거렸다. 활을 잡고, 네 개의 현으로 소리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지금 기분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도현이 연주를 시작하자 침대에 방만히 누워 있던 니콜라스가 무의식중에 상체를 일으킨 채 넋을 놓고 보았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입매나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음을 짚어내자, 숨을 토해낸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넌 버스킹 생각 없어?”
“…뭐? 버스킹?”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도현이 니콜라스를 돌아보았다.
“나만 듣기 아깝잖아.”
“말은 고맙지만….”
도현이 눈매를 찡그리며 바이올린을 내려다보았다. 하도 만져서 이제는 손 모양에 따라 길들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바이올린이 형광등 아래서 매끄럽게 빛났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 돼.”
밝은 광장에서 즐겁다는 듯이 연주하는 가스파르가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예술은 표현이다. 그리고 표현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누군가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개념이었다.
방에서, 숙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누군가 들어주면 좋겠다고, 내 음악을, 내 소리를 알아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면 그건 거짓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도현은 조금 씁쓸하게 바이올린을 정리했다. 그런 도현의 뒤에서 니콜라스가 종알거렸다.
“난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러나 니콜라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기색이었다.
“여긴 너 알아보는 사람도 없잖아. 아까 걔는 널 눈앞에 두고도 모르던데. 정말 안 돼?”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도현은 스스로도, 자신이 조금 혹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