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72)화 (373/582)

제372화. 여정의 시작 (7)

동요하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탁. 도현은 케이스의 덮개를 덮고선 몸을 돌렸다. 니콜라스가 기대에 찬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기대가 충족될 리는 없을 테니까.

“응.”

“된다고?”

“아니. 안 된다고.”

“아, 왜에!”

니콜라스가 침대를 팡팡 내리치며 떼를 써 댔다. 하지만 도현은 단호했다.

“저녁 뭐 먹을지나 생각하자.”

“너 말 돌릴래?”

“오랜만에 피자 어때? 화덕피자 맛있는 곳 있다던데.”

“피자? 맛있겠… 아니! 야!”

솔깃하던 니콜라스가 짜증을 냈다. 도현은 덤덤한 낯으로 엄마 아빠한테 말하고 오겠다며 몸을 쏙 내뺐다.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니콜라스는 황망한 눈으로 닫힌 문을 보았다.

“무시하는 거냐고….”

어린 얼굴에 불만이 올라왔다. 소년은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후 뒤로 푹 넘어졌다. 흰 이불보 위에 약간 뻣뻣한 갈색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도현이 바이올린 연주 실력을 숨기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이유까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병원에 있었던 시절의 일과 관련 있겠거니 싶었다. 도현이 말을 삼가는 건 주로 그때의 일이니까.

그래도 역시 아쉬운데.

소년이 나간 문을 바라보는 에메랄드 눈동자에 미련이 그득했다. 니콜라스는 아슬하게 물고기를 놓친 어부처럼 입맛을 다셨다.

* * *

“니키는 왜 저러니?”

화덕피자 집에 와서, 굳이 굳이 도현을 등지고 피자를 먹는 니콜라스에 서혜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도현은 올리브를 하나 쿡 찍으며 말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대요.”

니콜라스는 식당에 가는 길 내내 도현을 설득하려 굴다가, 말이 통하지 않자 방법을 바꾼 건지 삐진 척을 했다. 도현은 그런 니콜라스를 방치하는 중이었다. 저러다가 알아서 풀릴 걸 알아서였다.

“그래? 그럴 나이긴 하지….”

“그러고 보니 슬슬 사춘기가 올 나이네.”

서혜나의 수긍에 이장혁이 말을 얹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도현에게 쏠렸다. 꿋꿋하게 등지고 피자를 흡입하던 니콜라스까지 고개를 틀었다.

“…왜요?”

입에 있는 올리브를 다 먹고 나서야 입을 여는 태도가 참 단정하다. 이미 이것저것 흘려 더러운 니콜라스의 테이블과 달리 도현의 주변은 깨끗하기만 했다.

‘식기 소리도 잘 안 내지.’

대체 어디서 그런 테이블 매너를 배워왔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도현의 이상한 점은 원래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지금 그들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얘도 사춘기가 올까?

니콜라스의 두 눈에 흥미가 차올랐다. 등지고 앉았던 니콜라스는 의자를 돌려 도현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관찰하듯이 도현의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생긴 것만 보면 까칠할 거 같은데, 실제 성격은 무던한 것에 가까웠다. 매가리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이거 하자 해도 좋다, 저거 하자 해도 좋다…. 화를 내는 법도 없었다.

‘아니, 스위스에서 냈었지.’

다시 생각해도 조금 오싹했다. 그때 이도현은 약간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았다. 아무튼, 그 정도 되는 일이 아니면 이도현을 화나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야. 짜증 내봐.”

“갑자기?”

갑작스러운 요구에 도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을 돌리니 서혜나와 이장혁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할 수야 있었지만,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굳이 짜증 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도현이 거부의 기색을 내비치자 니콜라스가 아쉬워했다.

“니키. 밤에 영화나 볼까? 너 전에 공포영화 보고 싶다며.”

“오늘? 뭐, 좋긴 한데….”

아까부터 자꾸 헛소리하는 걸 보니 심심한 게 분명했다. 내일은 니콜라스가 흥미 있어 할 만한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릴에 수영장 박물관이 있댔는데… 거기 가면 좋아하려나. 도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올리브를 한 개 더 입에 물었다.

* * *

니콜라스는 고집이 세다.

그것도 꽤, 많이.

도현은 왜 나르샤가 매번 니콜라스 때문에 골치 아파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물러설 줄을 몰랐다.

- 뭐? 수영장 박물관? 가보고는 싶은데.

갈등하던 니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 오늘 가스파르 만나기로 했잖아. 약속은 지켜야지.

언제부터 그렇게 성실했다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지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니까.

‘그게 이 속셈인 줄은 몰랐지.’

도현의 착잡한 눈이 니콜라스를 향했다. 니콜라스는 가스파르한테 이것저것 묻는 중이었다.

“여기서 버스킹은 어떻게 해? 허락 같은 거 필요한가?”

겉보기엔 평범한 질문이었다. 가스파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대답했다.

“딱히 허락 같은 건 안 받아도 될걸? 우리도 그냥 해.”

“오, 그러냐.”

의도가 너무 투명했다. 너무 과할 정도로 투명해서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가스파르가 대답을 할 때마다 니콜라스는 ‘들었지?’ 하는 얼굴로 도현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왜? 너 관심 있어?”

“아니, 나 말고….”

니콜라스가 도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도현의 몸이 자연스럽게 끌려갔다. 가스파르의 시선이 니콜라스에게서 도현에게로 옮겨졌다.

“얘가.”

“오, 악기 연주할 줄 알아? 아니면 노래?”

가스파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잠깐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던 도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니콜라스의 팔을 내렸다.

“얘가 장난친 거야. 나 연주할 줄 몰라.”

“아… 그래?”

어이없어 보이는 얼굴이 너무 진심이라서 가스파르는 금방 수긍했다. 대신 그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같이 연주하면 재밌을 거 같았는데. 아쉽네.”

“너 왜 거짓말을….”

“니콜라스.”

애칭이 아닌 풀네임이 나오자 니콜라스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화 났나? 니콜라스는 조금 움츠러든 채 도현을 살폈다. 그러나 덤덤한 표정은 전과 다를 게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가스파르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 내내 니콜라스는 도현의 눈치를 봤다. 그걸 도현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결국 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할 말 있으면 해.”

“…너 화났어?”

슬쩍슬쩍 쳐다보는 게 사고치고 눈치 보는 강아지 같았다. 도현은 그런 니콜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화났네.”

“아니야.”

이럴 때 도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친구에게 갖는 감정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러한 일들은 도현을 화나게 할 수 없었다. 그 상대가 니콜라스인 이상은.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왜. 낼 수도 있지.”

“적어도 난 못 그래.”

안 그러는 게 아니라 못 그러는 거였다. 화가 나질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억지로 기분 나빠할 수도 없고. 그리 생각한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적당한 벤치가 보이길래 니콜라스를 끌고 갔다.

“앉아. 얘기 좀 하자.”

“…왜 네가 이러니까 혼나는 기분이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은 니콜라스는 순순히 벤치에 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도현이었다.

“그래서.”

도현은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왜 그러는 건데?”

순수한 의문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안에 짜증이나 분노가 아니라 순수한 의문만이 가득하다는 걸 깨달은 니콜라스가 긴장을 풀었다.

“그냥….”

“그냥?”

“아, 그냥 이해가 안 가서 그런다! 왜!”

니콜라스가 급발진했다.

“뭐가 이해 안 돼?”

“그게 뭐라고, 도둑처럼 꼭꼭 숨어서만 연주하는 게!”

정말 그게 좋은 거면 눅눅해지지라도 말던가. 항상 뭔가 부족하다는 얼굴로 바이올린을 보면서 괜찮다고만 하니. 신경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상해 보이긴 하지.’ 

죄짓는 것도 아니고, 고작 바이올린 연주하는 걸 꽁꽁 숨긴다? 남들이 보기엔 참 이상해 보일만 한 행동이었다. 말은 안 하지만, 부모님도 이에 관해서 상당히 이상히 여길 게 뻔했다.

“그거 때문에 그래? 그 영화?”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럼 뭔데?”

도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니콜라스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카락을 털었다. 머리카락이 붕붕 떠올라 까치집이 되었다.

“봐.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근데 너는 안 된다고만 하고. 그러니까 내가 답답해서 속이 터지지.”

“니키.”

“연주할 때 그렇게 즐거워하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듣는 걸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아.”

단순히 순간의 감정이 아닌, 오랜 시간 쌓아온 의문이었다. 도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흰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자 니콜라스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붙잡았다.

“야, 야. 그렇다고 눅눅해지지는 말고…! 아씨, 말 안 해도 되니까 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무룩해졌다가 웃는 모습에 니콜라스는 어이없어졌다. 얘 혹시 사춘기인 거 아니야? 그런 합리적인 의심까지 따라붙었다.

니콜라스가 그런 의심을 하는 줄 꿈에도 모르는 도현은 생각에 잠겼다. 검은 눈동자가 새파란 하늘을 담아냈다. 남의 일이라는 양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이 보였다.

사실은 답답했다.

처음에는 참을만했다. 인내는 도현의 강점이니까. 그런데 그게 일 년, 이 년, 삼 년… 숫자로 오 년을 넘어가자 점점 숨이 막혀왔다.

모든 걸 내보이는 감각을 알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모든 걸 내보이고 쏟아붓는 희열을 알고 있다. 알아서 더 갈증이 났다. 방에서 아무리 혼자 연주해도 그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게 도현의 갈증인지 형의 갈증인지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둘 다 도현이었으니까. 형으로 인해 바이올린이 좋아진 건 맞지만, 지금까지 연습을 소홀히 하지 않는 건 도현의 의지였다. 형을 향한 속죄이자 애정이면서, 동시에 그건 도현의 일부였다.

니콜라스가 저렇게 고집스레 구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이상하게 예리할 때가 있으니 도현이 느끼는 답답함을 눈치챈 거겠지. 의식 중이든, 무의식중이든 말이다.

하늘을 보던 시선을 내려 손바닥을 응시했다. 흰 손은 얼핏 보면 고와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굳은살이 이곳저곳 박혀 있었다. 지난 오 년간의 기록이나 다름없었다.

“오 년이면 많이 노력한 걸까?”

“뭐?”

“니키.”

도현이 니콜라스를 직시했다. 니콜라스는 델마 시절, 도현과 눈을 마주치는 걸 꺼리던 아이 몇몇을 알고 있었다. 그 애들은 너무 까매서 부담스럽다고 했다. 확실히 햇빛을 받으면서도 검기만 한 눈동자는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단 한 번도 거기서 꺼림칙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할 때면 낯간지러울 만큼 다정한 빛을 머금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진은 그걸 우주에 별이 뜬 것 같다고 표현했다.

“정말 나를 모를까?”

“…어. 너 알아보는 사람 없었잖아. 정 걱정되면 도리토스 봉지라도 뒤집어쓰던가.”

“하하! 그럴까.”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도현이 한결 시원해진 낯으로 말했다.

“그래, 그러자.”

니콜라스의 말이 맞았다. 도현이 숨어서 연주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 것이 아닌 걸 제 것처럼 굴거나, 그로 인해 형과의 관계를 드러내길 원치 않아서였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이곳에서라면.

“어디 가?”

“너도 일어나, 니키.”

도현이 니콜라스를 재촉하자, 니콜라스가 어정쩡하게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현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왔던 길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너무 들뜬 상태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현에게 이건 마치 하나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자유로운 도시. 나를 모르는 사람들. 내 편인 니콜라스. 화창한 하늘마저 도현의 등을 떠미는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이 아니라면 용기 내지 못할 거라고.

“가스파르, 아직 거기 있겠지?”

“늦게 간댔으니까… 야! 같이 가!”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상한 눈빛으로 보던 니콜라스도 웃음에 전염됐는지, 결국 크게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은 광장으로 되돌아가며 뛰다가 웃다가 다시 뛰기를 반복해서, 가스파르를 만났을 때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가스, 후, 파르.”

“너… 어우, 숨 차.”

무릎을 잡고 숨을 고르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팍 치켜들었다.

“…너!”

“어, 어?”

“바빠?”

“어, 아니….”

“그럼, 우리랑 뭣 좀 할래?”

무서운 기세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도현이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얘네.

가스파르의 표정이 굉장히 떨떠름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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