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73화 (374/582)

제373화. 여정의 시작 (8)

“내가 뭘 하는 건지.”

엉거주춤 기타 가방을 끌어안은 가스파르가 고개를 돌렸다. 한적한 공원의 정경이 눈에 비쳤다. 보벙 가든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라, 조용한 호수 주변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스파르는 며칠 전-이라고 해도 이틀 전이었다-의 일을 떠올렸다. 갑자기 달려오더니 양쪽에서 압박해서 돈이라도 뜯으려는 건가 싶었다. 착한 애들인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생각하던 차에 나온 얘기는 의외였다.

- 공연하고 싶다고?

- 응, 그냥 가볍게. 근데 내가 공연도, 릴도 처음이라서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

- 잠, 잠깐. 연주 못 한다며?

- 아, 그거.

동양인 소년이 가볍게 웃었다.

- 거짓말이었어.

거짓말했단 걸 보통 그렇게 산뜻하게 밝히던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버렸다.

가스파르가 최근 만난 친구들은 상당히 독특했다. 각자 미국과 한국에서 왔다고 밝힌 소년들은 조합부터가 특이했다. 한쪽은 백날 공만 찰 거 같고 한쪽은 땀 흘리는 걸 끔찍이 싫어할 거같이 생겼으니까. 둘이 친한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 특히 동양인 쪽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질적인 생김새 탓인가, 자꾸만 눈이 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엔 여자앤 줄 알았지.’

남자애 같긴 한데, 머리카락도 애매하게 긴데다가 피부도 하얗고 속눈썹도 길어서 묘하게 헷갈렸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남자애라고 결론지었다.

아무튼 특이하단 건 변함없었다. 가스파르는 타지에서 온 두 소년이 신기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어울리고 있겠지만 말이다.

“가스파르!”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두 소년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스파르는 그들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쪽은….

“실로폰?”

오색빛깔 찬란하기도 한 그것은 실로폰이 분명했다. 지금 실로폰으로 공연하겠다는 소린가. 가스파르는 어이없는 심정으로 그 옆을 보았다. 설마 탬버린은 아니겠지. 아니면 캐스터네츠라던가. 기대감인지 불안인지 모를 심정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

손에 들린 건 탬버린도 캐스터네츠도 아니었다. 자연광 아래서 매끄러운 빛을 발하는 악기는 분명 바이올린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에 문외한인 가스파르가 보기에도 그건 한두 해 쓴 악기가 아닌 거 같았다.

“왔어?”

바이올린을 든 소년이 가스파르를 보고 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스파르는 그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빈손으로 봐왔던 지난날들보다 바이올린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 소년에게 더욱 잘 어울렸다.

“이렇게 셋이 연주하려고?”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은 가스파르가 묻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내 밴드 소개해 줄게. 같이 하는 편이 낫잖아. 걔들도 싫어하진 않을걸. 너희는 좀 흥미로운 편이니까.”

가스파르가 보기에 현재 멤버는 너무 오합지졸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다가 실로폰, 그리고 실력을 알 수 없는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 아카데미 수행 평가도 이런 구성으로 하진 않겠다 싶었다.

“너로 충분해.”

이 말을 한 상대가 여자애였다면 한 번쯤 혹했겠지만, 상대는 남자애였다. 가스파르가 단호히 말했다.

“아무리 버스킹이라 해도 공연은 공연이야. 나도 취미라지만, 나름대로 기타에 진심이고. 장난처럼 할 생각이라면 너희끼리 해.”

“누가 장난이래?”

미간을 좁힌 가스파르가 무언가 다시 말하려 할 때였다. 그는 다시금 불만을 표하는 대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흰 뺨에 생기가 돌았다. 차분한 미소가 떠오르던 얼굴엔 진심 어린 기쁨이 둥둥 떠다녔다. 검은 눈동자는 미처 눌러내지 못한 설렘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장난일 리가 없잖아. 지금처럼 신난 거 굉장히 오랜만인데.”

가스파르가 입을 다문 건 그 인상적인 광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현이 바이올린을 고쳐 쥐더니 턱 아래에 바이올린을 걸쳤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활대를 잡았다.

뭘 연주하려는 건지에 대한 의문은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마자 부식되었다.

에드워드 엘가, 사랑의 인사. (Edward Elgar, Salut D'Amour)

모를 수가 없는 곡이었으니까.

잘 아는 곡이라서 더욱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곡이 이렇게 좋았던가? 모르겠다. 클래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그간 가스파르의 음악적 관심은 현대 음악에 한정되어 있었다.

바이올린 기교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이 곡이 그리 어렵지 않으리란 건 알 것 같다. 멜로디 자체가 단순했다. 그럼에도 놀랄 수밖에 없는 건 한 음 한 음이 무척이나 고운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요하고 맑았다.

너무 깨끗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계곡물에 몸을 담근 느낌이었다. 이토록 익숙한 곡이 이만큼이나 특별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게 신비롭게 다가왔다.

작은 호수를 등지고 서서 연주하는 소년 위로 나무의 그늘이 너울거렸다. 파스스 흩어지는 바람 소리마저 선율의 일부가 되었다. 그 모든 중심에는 소년이 있었다. 가스파르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보았다.

연주를 끝낸 소년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즐겁고 재밌어서 견디지 못하겠단 얼굴이었다. 그런 소년을 보던 니콜라스가 바람 빠지듯이 중얼거렸다.

“진짜 신났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가스파르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준 도현이 성큼, 한 발짝 다가왔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 가스파르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직도 장난 같아?”

“…아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해봐서 아는데, 셋은 가장 완벽한 숫자야.”

그 말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그는 아직 연주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그의 귀로 두 아이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그럼 팀명도 정해? 일단은 팀이잖아.”

“그럴까? 좋은 생각 있어?”

“DG-N조는 어때?”

“우리끼리만 이러는 거 알면 진 속상해할 텐데. 팀명까지 그러면 진짜 화낼걸.”

“아, 그런가.”

도현의 말에 별다른 이의 없이 수긍한 니콜라스가 다시금 제안했다.

“그럼 이건 어때. 수상한 삼인조.”

무슨 팀명이 그따위….

“괜찮은데?”

“……?”

가스파르가 도현을 쳐다보자, 도현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가스파르가 떨떠름히 말했다.

“저게 괜찮다고?”

“응. 아… 내가 아직 말을 안 해줬구나. 우리 컨셉이 그거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의 연주자.”

“……?”

“우리가 부끄러움이 많거든.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고.”

그리 말하는 얼굴은 조금의 수줍은 기색 없이 당당했다. 도현은 심지어 거기서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말 나온 김에 다 얘기하는 편이 낫겠다. 아무래도 부탁하려던 참이라.”

“…뭔데?”

“별거 아니야. 너도 우리 정체를 숨겨줘야 해. 그래 줄 수 있지?”

“왜?”

“컨셉이라서?”

“컨셉이, 꼭 그래야 해?”

“응, 사실….”

도현이 별안간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짙은 그늘을 만들어 내었다. 지나가는 개미만 봐도 슬픈 일 있냐고 물어볼 얼굴인데, 대놓고 ‘나 사연 있어요’ 하니까 가련함이 배가 되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바이올린 켜는 걸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뭐? 누가?”

“그냥…. 그래서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욕심 내본 거야.”

두루뭉술하기 그지없는 답변일뿐더러 이야기 자체도 뜬금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개연성을 얼굴이 채워주고 있었다. 가스파르의 머릿속에서 드라마 한 편이 뚝딱 펼쳐졌다.

“너한테 연주 못 한다고 말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아….”

“지금까지 잘 참고 살았는데 이번엔 욕심이 나서….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들키면 앞으로 영영 못 할지도 몰라.”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건가. 그러고 보면 생긴 것도 부잣집 도련님처럼 생겼다. 음악 같은 건 수준 낮다고 여기는 걸까. 기가 죽은 얼굴 위로 조금 전, 연주할 때 즐거워했던 얼굴이 겹쳤다. 이미 가스파르의 상상 속에서 도현은 집안의 반대에 꿈이 좌절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있었다.

가스파르의 눈에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물론이야. 비밀로 할게.”

“정말?”

“한번 한 말은 지켜. 걱정하지 마.”

“맙소사. 넌 정말 좋은 친구야, 가스파르.”

감격한 낯으로 가스파르의 어깨를 끌어안은 도현은 꼴값을 떤다는 눈으로 보는 니콜라스를 외면했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말 중에 거짓말은 없었다. 다만, ‘사람들 앞에서 바이올린 켜는 걸 안 좋아하는 존재’가 가스파르의 짐작과 조금, 다를 뿐이지.

어쨌든 거짓은 아니지 않는가. 도현은 당당했다.

* * *

오후 5시.

조금 흐리지만, 아직은 저녁이라 말하기 모호한 시각. 하지만 그랑플라스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저녁 약속을 위해 광장에 모인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네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남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광장으로 발걸음 했다. 따로 약속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되면 이쪽으로 오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하게 분수대 근처에 자리 잡은 이네스는 한쪽이 조금 소란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인 이네스가 고개를 조금 빼 들었다.

그리고.

“…세상에.”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이 셋이 있었다. 단순히 아이 셋이라면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아이 셋은 놀랍게도, 귀여운 빵 봉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직접 만든 건가?’

개발새발 그려진 거 같은 그림은 이네스도 아는 것이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피X니 공주와 당나귀 X키, 그리고 슈X. 각각의 캐릭터들이 빵 봉투 위에 낙서처럼 그려져 있었다.

이네스는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아이들을 구경했다. 그들은 주변에 보디랭귀지로 양해를 구하는가 싶더니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주섬주섬 꺼낸 것에 그녀는 결국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나귀 동X가 꺼낸 게 다름 아닌 실로폰이었기 때문이었다. 뻔뻔하게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 잡는 게 퍽 귀여웠다.

“연주하려는 거니?”

한 여성이 묻자 당나귀가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말을 안 하는 콘셉트인가. 그들의 기이한 행동에 점점 사람들의 관심이 몰렸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를 펼친 X렉이 자리에 앉아 기타를 꺼내 들었다. 다리를 꼬고 기타를 받치는 게 제법 자세가 나왔다. 마지막 한 명이 꺼내든 건 바이올린이었다.

‘여자애인가?’

가면도 피오X 공주인 데다가 머리카락이 꽁지처럼 묶여 있는 걸 보니 여자애인 거 같긴 한데… 체격이나 분위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웠다. 말을 안 하니까 성별을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얘야, 뭘 보여주려고?”

“귀여워라. 몇 살이니?”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질문에 당나귀가 땡땡땡! 실로폰을 쳤다. 조용히 하라는 소리인 거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제각각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조금 조용해지자 공주가 앞으로 나섰다. 그 별거 아닌 걸음걸이가 꽤 시선을 잡아끄는 면이 있어서 가면 한번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선 공주가 관객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네스는 얼핏 시야 확보를 위해 뚫린 구멍 사이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친 것도 같았다. 관객을 살펴본 공주는 공연장에서 지휘자가 관객에게 인사를 하듯이 우아하게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그리고선 물 흐르듯이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일련의 과정이 유려하기 그지없어서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이네스는.

띵!

시작을 알리는 맑은 실로폰 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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