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4화. 여정의 시작 (9)
시작은 가스파르의 적극적인 주장에 따라, 사랑의 인사였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하늘같이 투명하기만 한 음색이 분수대의 물방울처럼 사람들의 옷소매에 파고들었다. 그 사랑스러운 인사에 이리저리 오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나둘씩 멈췄다.
처음엔 열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아이들의 행색에 호기심을 느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연주가 이어지면서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관중을 향한 첫 번째 인사는 금방 끝이 났지만, 그 여파마저 빠르게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어느새 두 배는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박수를 보냈다.
도현은 바이올린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의 얼굴 위로 즐거움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저런 감정을 떠오르게 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정신을 차린 건 니콜라스가 실로폰을 땡땡똥 내리쳤을 때였다. 정신을 차리란 의미 같아서 도현은 바이올린을 고쳐 쥐었다. 뒤를 돌아보자 가스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했으니 이제 대화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 만난 상대와 대화하는 법은 쉬웠다. 바로 누구나 알 법한 공통적인 화제를 꺼내면 된다. 처음 만난 사이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도현은 지휘봉처럼 활을 흔들었다. 활이 향한 방향은 바닥에 철푸덕 앉은 당나귀였다. 당나귀는 활이 흔들리는 걸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뚜뚜뚜, 땅땅.
실로폰의 맑은 소리가 울렸다.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자 사람들은 그게 귀에 익은 멜로디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네 번의 반복 후에.
딴다다 딴다다 딴.
기타 소리가 끼어들었다.
“어, 이거….”
여기저기서 반응이 나왔다.
Maroon 5- Memories.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노래의 등장이었다. 통통 튀는 실로폰 소리에 부드러운 기타의 반주가 섞여 들어가자, 사람들이 점차 풀린 낯으로 음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가볍게 시작한 연주는 2절에 들어서서 추가된 바이올린에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기본적인 리듬을 깔아주는 실로폰 소리에 풍부한 음색을 끼얹는 바이올린,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기타의 음색.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의 악기가 모여 화사한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사람들은 예정되어 있던 계획을 조금씩 미룬 채,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통했다.
도현은 빵 봉지 속에서 희열에 찬 웃음을 지었다. 곧 자리를 뜰 것 같았던 사람들이 이젠 맨바닥도 개의치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직 음악만으로 그들의 발을 붙잡아 두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연기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어서 상대를 설득하는 게 연기였다면, 지금은 그 모든 게 바이올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작은 악기는 수많은 사람의 발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아직은 더.
우리가 누구고, 뭘 보여주고 싶은지 조금 더 이해시켜야 한다. 도현은 그 뒤로도 유명한 곡 몇 개를 꺼내 들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익숙한 멜로디에 끌려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마치 달콤한 꿀에 모여드는 벌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든 걸 눈에 담은 가스파르는 질린 듯한 숨을 내쉬었다.
가스파르는 며칠 전 일을 상기했다. 어떤 곡을 연주하겠냐고 묻자, 도현은 그가 무슨 곡을 할 줄 아는지 물었다. 그의 리스트를 본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걸로 하자.
너무 빠른 결정이라 가스파르는 그가 그 곡들을 연주할 줄 안다고 여겼다. 레퍼토리가 겹치다니. 꽤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 내일 맞춰봐도 될까? 이 곡들을 연주해본 적이 없어서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 내일 맞춰보고 괜찮은 곡들 추리면 될 거 같은데, 괜찮아?
그게 아니었다.
처음에 가스파르는 그게 허세라고 여겼다. 하루 만에 그 많은 곡을 어떻게 익혀 온다는 말인가. 설령 연주할 수는 있더라도 외우는 것까진 무리였다.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이쪽이 상식적인 반응이잖아.’
누구한테 말하더라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가스파르는 확신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정말 어이없게도, 도현은 가스파르의 확신을 부숴버렸다. 그는 정말로 그 많은 곡을 익혀왔다. 가끔 몇 소절 정도 실수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정말로 가스파르가 보여준 곡들을 하루 만에 손에 익혔다.
천재.
이도현은 천재였다.
단순히 외우기만 잘했다면 경악스럽긴 하더라도 경탄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스파르는 빵 봉지 구멍 사이로 사람들의 면면을 보았다.
그는 몇 번 버스킹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청중은 관대하면서도 냉정했다. 그들은 쉽사리 음악에 끌려와 주지 않는다. 멈춰 서서 음악을 듣다가도 언제든지 자리를 뜰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홀린 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엉덩이를 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른 생각은 떠올릴 수도 없다는 듯이 심취한 얼굴로 집중한다.
빵 봉지가 신기해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몇 분이고 잡아챌 수는 없다. 실로폰의 의외성도, 기타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사람들을 매혹하고 있는 건 저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저 애는 알고 있을까.
그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꽁지머리가 살짝 흔들릴 정도로 신이 나 연주하는 모습을 보니, 알더라도 신경 안 쓸 것 같기도 하고. 가스파르는 기타 줄을 퉁기다가 문득, 즐겁다고 생각했다.
* * *
네 번째 곡이 끝나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제 인파는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몰려 있었다. 곳곳에서 카메라를 켜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네스!”
“아.”
어깨를 치는 손길에 깜짝 놀란 이네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남자 친구, 헨리가 보였다.
“한참 찾았잖아.”
그녀는 그제야 헨리를 만나려고 광장에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헨리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선 말했다.
“가자, 나 배고파.”
“어, 잠시만. 나 공연 보고 있었는데.”
“공연?”
헨리는 잠깐 둥글게 모인 인파 가운데에 선 아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빵 봉지를 보고 웃음이 터진 것도 잠깐.
“나중에 보면 되잖아. 일단 식당부터 가자. 먹고 나서 돌아오면 되지, 어때?”
“…음.”
평소라면 수긍했을 말이었다. 광장에서 공연은 심심치 않게 열리니까. 헨리의 말대로 저녁을 먹고 온 후에도 누군가는 공연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네스가 보고 싶은 건 단순히 길거리 공연이 아니라, 저 빵 봉지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하는 공연이었다.
“헨리.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될까? 마저 보고 싶어.”
“뭐?”
“그러지 말고 너도 한 번만 들어봐. 분명 계속 듣고 싶어질걸. 저 애들 정말 잘해. 특히… 가운데 있는 공주 말이야.”
이네스의 말에도 헨리는 영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는 배고픔을 호소하는 위장에 당장에라도 무언갈 집어넣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꼭 구경해야겠어?”
마지막 바람을 담아 물어봤지만, 이네스의 고집 어린 눈은 결정을 번복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헨리는 결국 항복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한 곡만 듣고 가는 거야.”
“으음.”
끝까지 보고 싶은데. 그런데 헨리의 표정을 보아 하니 여기서 싫다고 하면 삐질 거 같았다. 결국 이네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해.”
그렇게 두 연인은 극적인 타협을 보았다. 때마침 재정비의 시간이 끝났는지 실로폰이 뚱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이번엔 뭘 하려나.’
아까는 정말 재밌었다.
설마하니 시작을 사랑의 인사로 할 줄이야. 의외의 선곡이었다. 그녀는 그 곡을 직접 들어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상컨대, 앞으로 종종 생각날 거 같았다.
그 후로 이어진 선곡도 탁월했다.
막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각. 광장에 여유롭게 퍼지는 음악 소리는 하루 동안 고되었던 심신을 달래주는 힘이 있었다. 이네스는 어느새 긴장을 모두 푼 채 그저 음악을 들었다.
문득, 이네스는 욕심이 일었다.
‘바이올린 연주 듣고 싶어.’
조금 더 본격적인 연주를, 조금 더 진득하고 날카로우며, 서늘하리만치 투명해서 영혼까지 파고들 만한 연주를.
처음 연주했던 사랑의 인사처럼.
그 뒤로 이어진 곡들도 분명 좋았다. 그때는 신나게 즐겼다. 그러나 잠깐 쉬는 시간을 주어지자, 뒤늦게 아쉬움이 들었다. 바이올린 소리에 조금 더 집중해보고 싶다는 아쉬움이었다. 이 한 곡을 들으면 자리를 떠야 하니 더욱 아쉬운 건지도 몰랐다.
띵띵, 이제는 익숙한 실로폰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게로 시선이 쏠리자 당나귀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조용히 하라는 사인이었다.
몇몇 이들이 집중을 위해 입을 다물긴 해도, 이곳은 야외고, 광장이었다. 어느 정도의 소음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아이가 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적막이 차올랐다.
정확히는, 바이올린 소리를 제외한 소음이 일시에 멈췄다. 소년이 바이올린을 잡고 허리를 곧게 편 순간, 아무도 그와 바이올린 사이에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선율이 울린다.
지금까지의 맑고 가벼운 음색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심장을 짓누르는, 소름 끼치도록 깊고 고풍스러운 음색이 모든 이들의 행동을 강제했다.
느리고, 무겁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연주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이네스는 드디어 저 정체불명 연주자의 진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선율은 단단한 뿌리가 뻗어 있었다. 우수 어린 심상을 전달하면서도 조금도 과하지 않다.
절제된 선율은 이네스에게 전율을 가져다주었다. 저 어린 연주자는 마치 이네스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거 같았다. 그녀의 뇌를 파고들어, 원하는 걸 알아내 악마처럼 유혹하는 느낌이다.
이네스가 연주에 정처 없이 빨려 들어갈 때였다.
갑자기 음색이 변했다.
느리고 구슬프던 선율이 빠르고 경쾌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완전히 변화한 새로운 음율이 뇌 속으로 박혀 들어왔다.
마치 오랫동안 떠돌던 방랑자가 젊은 혈기를 되찾은 것처럼 야성적이기까지 한 음색이 공격적으로 들어찼다. 절로 숨을 멈추고 집중하게 될 정도로 빠른 속주였다.
그런 그녀를 농락하듯이 몰아쳤던 연주가 다시금 느려진다. 그녀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바이올린은 이제 가느다랗고 높은 선율을 그리고 있었다. 아까의 비장하고 무거운 음색도, 빠르고 경쾌했던 음색도 모두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가늘게 노래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아래서 음색은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완전히 대비되는 선율은 어우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저 마법 같은 연주자의 손 아래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그 자신감 넘치는 음색에는 모순적이게도 노련함과 풋풋함이 섞여 있었다. 함께할 수 없는 것들이 어울려 그녀의 영혼을 한없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 * *
비토리오 몬티, 차르다시. (Vittorio Monti, Czardas.)
이탈리아 작곡가 비토리오 몬티가 헝가리의 민속 무곡인 차르다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이 작품은 본래 만돌린을 위한 곡으로 쓰였지만, 후에 여러 악기를 위하여 편곡되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도현은 무슨 곡을 꺼내는 게 가장 좋을지 고민했다. 청중을 홀리려면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도 괜찮다. 어쩌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구약성경과도 같은 바흐의 곡을 꺼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쇼팽의 녹턴이나 차이코프스키의 왈츠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았다. 무엇을 고르든 잘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그 모든 선택지를 제치고 첫 곡으로 차르다시를 골랐다.
집시의 삶은 모른다. 재주를 통해 돈을 벌며, 생계를 이어가고. 정해진 거처 없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삶을 모른다.
모르지만,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바이올린 하나에 의지해서 한평생 살아간 어떤 연주자를.
느리고 무거운 라수(Lassu)와 이어지는 빠르고 격정적인 프리스(Friss). 결국에는 유쾌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간 누군가에게 딱 어울리는 곡이 아닌가.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자기만족일 뿐이니까. 그냥 이 순간만큼은, 내게 소중한 것을 넘겨준 존재를 위해 연주하고 싶었다.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려줘서 고맙다고. 누군가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기쁨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무의미한 일이어도 좋았다.
그냥 이 순간이 좋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