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75화 (376/582)

제375화. 여정의 시작 (10)

마지막 한 음까지 짚어내고, 천천히 팔을 내린다. 미세한 현의 울림이 잦아들다가 완전히 멎는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숨을 고를 때였다. 채 갈무리할 새도 없이, 환호성이 밀려들었다.

악기와 나. 둘만이 남았던 세상에 순식간에 많은 것이 들어찼다. 광장의 저녁노을과 관객의 환호성이 어지럽게 머릿속에 엉켜 들었다. 한순간에 물밀듯 쏟아진 것들을 받아내기 어려워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1막에서 구성했던 곡처럼 청중의 반응을 계산하고 고른 곡이 아니다. 그저 하고 싶은 곡을 골랐다. 이전까지가 대화였다면, 지금은 일방적인 넋두리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청중은 환호했다.

그렇게 깨닫는다. 수많은 연주가가 음악을 떠나 살지 못했던 게, 어쩌면 이것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가 공감하고 환호한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저들은 분명 아무것도 모른다. 선곡의 이유부터 무슨 심정으로 연주했는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모르기 때문에 오직 들리는 것만으로 판단했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브라보!”

아까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다. 천천히 그 광경을 눈에 박아 넣던 도현은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긴 호흡이 빠져나간 후 입가에 걸린 건 미소였다.

인사를 할까, 고민했다. 지휘자처럼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고 환호받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러나 도현은 그 대신 팔을 들어 올렸다.

시작할 때는 재 탄 물처럼 흐릿했던 하늘이 이젠 노을이 걸려 요요한 붉은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분수대에서 비산하는 물방울들이 그 색에 물들어 언뜻 타오르는 불씨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 위로도 붉음이 너울거렸다.

원래 계획은 그랬다.

두 곡을 더 연주하고 끝맺는 것.

길거리 공연은 치고 빠지는 게 중요하다는 가스파르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니 준비한 대로 하면 될 텐데 손가락이 현 위를 방황했다.

도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환호를 보내는 이들을 보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환호하고 열광하는 그들은 즉흥적이고, 또 자유로워 보였다. 높은음에서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툭, 떨어졌다.

추락한 손끝이 멈춘 건 바이올린의 가장 낮은 현, G현이었다.

거칠고, 사나운 음색이 깔린다.

모리스 라벨, 치간느. (Maurice Ravel, Tzigane)

1920년,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옐리 다라니로부터 감명받아 만든 이 곡은, 치간느–Tzigane, 집시-라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집시풍의 곡이었다. 헝가리 민속음악인 차르다시(Czardas)의 라수(Lassu)와 프리스(Friss) 형식에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집시풍 음악과 프랑스 특유의 색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릴에서, 비르티오 몬티의 차르다시를 이어 연주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곡이 아닌가.

라벨은 자신의 곡을 가리켜 ‘헝가리 광시곡 스타일로 쓰인 기교를 위한 작품’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그 말처럼, 치간느는 바이올린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기교를 담아냈다고 평가받는다.

그 평가처럼 치간느는 첫 시작부터 남달랐다.

바이올린은 네 개의 현으로, 네 개의 음역대를 갖는다. 각자 음역대에 맞는 음을 연주하는 게 보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라벨은 그 보편적인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집시의 자유로움과 열정, 거친 삶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음을 가장 낮은 G현에서 연주하도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바이올린의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칠고, 불안하며, 위태로운 음색이 탄생했다.

마치 집시가 넋두리하는 것 같다.

특유의 거칠면서 음울한 선율은 감정의 밑바닥을 건든다.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는 선율은 불편함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미지의 신비를 마주한 거 같은 기묘한 끌림이 존재한다.

불나방처럼 그 기묘함에 이끌리고 나면, 변덕스럽고 음산하면서도 격정적이고 강렬한 한 집시의 삶 속에 빠져들게 된다. 폭풍에 휘말린 사람처럼 끌려 들어가, 그의, 그녀의 박자에 맞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게 된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음악 속에서 이젠 집시와 손을 마주 잡고 있다.

다시 반복되는 주제에서 화려한 기교가 등장한다. 왼손의 피치카토에서 두 개 이상의 현으로 연주하는 더블 스탑으로 이어지는 속주는 넋을 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청중들은 그 몰아치는 선율에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심장이 선율의 속도를 따라가고 싶다는 듯 빠르게 쿵쿵 뛰었다.

화려한 기교가 등장하면서부터 곡에는 익살맞음이 더해졌다. 관객들은 더 이상 곡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어둡고도 방정맞은 그 집시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귓가에 집시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피날레의 속주로 접어들었다.

모리스 라벨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혹독했다. 그는 평범함에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살인적인 속주를 요구했다. 옆에서 라벨이 소리치고 있는 거 같다. 부족해, 더,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더 화려하게.

도현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런 걸 요구하는 작곡가가 미친 건지, 요구한다고 받아들이는 연주자가 미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도현은 거대한 희열을 느꼈다.

격정적인 선율이 정점에 치닫고.

정적 속에서 소리가 멎었다.

거친 호흡 탓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도현은 벅찬 마음을 내리누르며 숨을 골랐다. 쉴 새 없이 움직였던 팔이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이번에는 전의 곡처럼 곧바로 환호가 쏟아지지 않았다. 관객들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한 젊은 남성이었다.

그의 박수를 시작으로 환호성과 박수가 일시에 쏟아졌다. 단순한 열광을 넘어서 어느 정도의 경의와 놀라움이 담긴 환호성이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것을 도현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박수갈채 사이엔 휘파람까지 끼어 있었다. 날 것 그대로의 반응 속에서 도현은 기꺼이 웃었다. 조금은 가쁜 숨을 참아낸 채, 리사이틀을 마친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런 소년-혹은 소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던 남성, 헨리가 상기된 낯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이네스는 완전히 얼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네스!”

“…아, 헨리.”

이네스는 막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시야에 붉게 달아오른 헨리의 얼굴이 보였다.

“아.”

이번에는 탄식이었다.

“미안해, 헨리. 한 곡만 듣고 가기로 했는데….”

정신이 돌아온 이네스가 사과했다. 이네스는 분명, 첫 곡을 듣고 나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벗어나기도 전에, 저 어린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했다.

거칠고 음울하게.

그건 정말 불가항력이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떼지 말고 내 연주를 들으란 듯이 음율을 때려 박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당겼다가 푸는 음색이 발목에 달라붙어, 움직일 수 없도록 강제하는 거 같았다.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홀린 듯이 연주자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가서는 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렸다. 이네스는 뒤늦게 미안함을 느끼며 헨리를 보았다.

“미안, 헨리. 지금이라도 가서….”

“무슨 소리야!”

“…응?”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이네스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헨리는 이네스의 손목을 잡은 채 열정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대단한 연주자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대체 저 아이의 정체가 뭐지? 어디서 나타난 거야?”

“어….”

“몇 살이지? 저 정도 실력이라면 적어도 시니어는 되어야… 아니, 시니어라고 해도 이상해. 어떻게 저런 실력일 수가 있는 거지?”

“헨리, 일단 진정해.”

이네스는 흥분하여 날뛰는 헨리의 팔을 토닥여 진정시켰다. 그녀는 헨리가 조금 진정한 게 눈에 보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어?”

“저 애가 내 배고픔을 가져가 버렸어!”

진정시킨 보람도 없이, 헨리가 다시금 펄쩍 뛰었다. LOSC-프랑스 프로 축구 클럽-가 우승할 때나 보여주던 격한 반응이었다. 이네스는 놀란 눈으로 헨리를 보다가, 이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단 헨리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대부분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이네스라고 다르지 않았다.

“브라보! 정말 멋졌어!”

헨리가 크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함성 사이에 섞여 들어가 일부가 되었다. 이네스도 다른 생각을 하던 걸 멈춘 채, 저 멋진 연주자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서늘해지는 초저녁, 뜨끈한 열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 * *

“이 미친 새끼!”

니콜라스가 와락 팔을 걸었다. 그에게 헤드락을 당한 도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도와달라는 뜻으로 가스파르를 쳐다봤지만, 그건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이 미친 새끼!”

정확히 똑같은 말을 한 가스파르가 그들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명치에 와닿는 묵직한 충격에 도현이 커헉, 숨을 내뱉었다.

“저, 애들아….”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이 애타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가련한 목소리에도 이들은 놔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니콜라스가 도현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하나로 묶었던 머리카락들이 삐져나오며 엉망이 되었다.

“넌 진짜 미친놈이야.”

탄식과도 같은 거친 음성에는 경탄이 섞여 있었다. 압박감에 괴로워하던 도현도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길거리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몬티, 차르다시에 이어 라벨의 치간느로 한차례 분위기가 과열되고. 도현은 차이코프스키의 꽃의 왈츠(Tchaikovsky, Nutcracker Waltz of the Flowers)를 꺼냈다. 연속으로 두 번이나 강렬한 연주를 들었던 청중들은 놀란 마음을 어루만지듯한 부드러운 음악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마지막은 드뷔시의 아름다운 저녁(C. Debussy, Beau Soir)이었다. 흐릿했던 하늘과 불그스름했던 노을을 지나 접어든 온전한 저녁에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여전히 열기를 벗지 못한 관객들을 진정시키기에도 좋은 곡이었고.

그렇게 준비했던 두 곡을 짧게 연주한 후, 수상한 삼인조는 깔끔하게 떠났다. 앵콜을 부르짖는 관객들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팔이 더 못 버텼어.’

이미 여덟 곡이나 연달아 연주했다. 하루 내내 바이올린만 켠다면 모를까. 도현의 연습량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서 더 하면 다음 날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못 할지도 몰랐다.

지금도 조금 저린 걸 보니 근육통은 확정이었다. 내일 고생할 미래가 그려졌지만, 아무렴 어떤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듯 광장을 떠나 한적한 거리로 온 가스파르가 벤치에 털썩 앉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지친 모양이었다. 도현은 가스파르의 옆에 앉는 니콜라스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두 인형이 보였다.

부모님은 버스킹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 도현의 부탁으로 인해 알은체를 하지 않았을 뿐. 이상한 부탁이었을 텐데 그들은 별다른 의문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무언갈, 아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이런 이상한 요구도, 내내 숨어서 연주하다가 기어이 얼굴을 가리고 공연하는 것도 태연히 받아들이는 거라고.

스읍, 깊게 숨을 들이마신 도현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밤하늘은 푸르스름한 빛을 띄웠다. 그 위에 쫑쫑 박힌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주변이 고요해지니, 여전히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아, 진짜 재밌었다.”

두서없이 툭 내뱉은 말에 도현이 가스파르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던 도현은, 한숨처럼 웃었다.

“그러게.”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거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