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77화 (378/582)

제377화. 여정의 시작 (12)

원래라면 캐스팅을 마친 후 언론 콘퍼런스를 가져야 했다. 초청한 기자와 관계자들 앞에서 배우를 인사시킨 후에, 촬영에 들어가는 게 본래 예정된 순서였다.

하지만 는 그 과정을 넘겼다. 물론 아예 안 한 건 아니었다. 배우들만 나오지 않았을 뿐, 감독과 작가는 콘퍼런스를 마쳤다. 배우들이 빠지게 된 건 전적으로 도현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때 도현에게 따라붙던 전 세계적 관심과 비난 때문이었다. 제작사 측은 그런 상황에서 어린 배우를 내보내는 모험을 하느니, 숨겨두는 쪽을 택했다.

그 때문에, 의 배우로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오스카가 도현의 안색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도 그리 과한 일은 아니었다.

차는 뉴욕 맨해튼 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오늘 있을 인터뷰가 뉴욕에 있는 포니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전날부터 도현의 가족은 뉴욕에 도착해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피곤하긴 하지만 익숙해져야 했다. 앞으로 한동안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곳곳을 다닐 운명이니까.

방송국에 도착한 도현은 스튜디오 내부로 들어갔다. 이전에 출연했던 는 붉은색 위주의 세트장이었는데, 오늘 방문한 는 짙은 남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사용된 색은 다름에도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비슷했다.

스태프가 안내하는 분장실로 들어가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관계자인 줄 알고 문을 열었던 오스카는 저를 올려다보는 두 쌍의 눈을 발견했다. 그가 어떠한 반응을 내놓기 전에, 도현이 목소리를 내었다.

“헤레이즈, 신시아.”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도현은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평범해.”

“안녕, 르옌!”

반응이 극과 극이었다.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헤레이즈와 달리 신시아는 도현에게 친애의 포옹을 해주었다. 그녀는 한 번 꼭 안아준 후, 도현의 옷을 보며 스튜디오와 아주 잘 어울린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도현이 선택한 옷은 짙은 남색이었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그다지 어색함이 없었다. 헤레이즈와 도현은 애초에 친분을 따지기 애매한 사이였고, 신시아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페이스로 대할 수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소파에 앉은 신시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손을 뻗어서 도현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전과 달리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낯선 모양이었다.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도현은 곧바로 머리카락을 다듬으려고 했다. 그런 도현을 말린 건 진과 서혜나였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그들의 말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도현은 수긍했다.

다만, 수상한 삼인조의 피X니 공주를 떠올릴 만한 요소는 없어야 해서 뒷머리만 조금 다듬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앞머리는 여전히 길었다. 가만히 늘어트리면 코끝까지 내려오는 길이였다. 평소에는 그냥 아무렇게나 가르마를 타서 넘기고 다녔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침부터 스튜디오에 들려서 만진 머리카락은 아주 느슨한 볼륨이 들어가, 뒤로 넘겨져 있었다. 구불거리는 웨이브가 아니라 자연스러울 정도의 볼륨이었다. 몇 가닥은 앞으로 흘러내려 짙은 눈썹을 넘어 눈꼬리 부분을 스치듯 지나고 있었다.

“잘 어울려.”

“고마워. 너도 오늘 멋져.”

신시아는 머리카락을 위로 높게 올려 묶은 상태였는데, 워낙 머리숱이 많아서 모양이 예쁘게 잡혔다. 작은 얼굴 뒤로 슬쩍 보이는 머리카락들이 요정 같은 분위기를 더했다.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두 사람을 어이없는 눈으로 보던 헤레이즈가 고개를 저었다.

저 꼴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뉴질랜드에서 헤레이즈가 온갖 고생을 하며 촬영할 때 저 두 사람은 항상 하하호호 화기애애하게도 있었다. 어찌나 화목하던지. 상대가 식물 성애자와 무성애자만 아니었더라면 사귀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한참 신시아와 온풍 가득한 대화를 나누던 도현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건 헤레이즈였다.

“제이스는 잘 지내?”

“여전히 귀찮아.”

“잘 지내나 보네.”

헤레이즈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샌디에이고를 떠난 후 제이스와 연락이 자연히 뜸해졌다. 지금 와서는 니콜라스의 연락에서 근황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세 사람은 스태프가 그들을 부르러 오기까지 잡담을 나누었다. 그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시간이었다.

이내, 스튜디오에 발을 디딘 그들은 의 감독과 진행자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진행자는 아이린 조로,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동질감을 가지고 이야기하기에는 그녀는 완벽한 미국인이었다. 조부모가 한국인이었을 뿐.

도현도 한국인이라기엔 미국인에 가까웠다. 살아온 시간 자체가 그쪽이 압도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이린 조도, 도현도 서로의 정체성에 크게 관심 가지지 않았다.

몇 가지 안내 사항을 들은 후, 세 사람은 스튜디오 뒤편에서 대기했다. 카운트가 울리고, 카메라와 조명에 불빛이 들어왔다. 방청객의 박수 속에서 아이린 조는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도현은 안내받은 순서를 되새겼다. 저 멘트가 끝나고 나면 예고편이 상영된다. 그 예고편이 끝나고 스튜디오가 다시 밝아질 때가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꽤 극적인 등장이었다.

도현의 시선이 이번에는 방청객 쪽에 가 닿았다. 도현은 예고편을 본 적 있지만, 방청객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고편은 이 토크쇼가 방영될 때 함께 공개될 예정이니까.

따지고 보면 를 처음으로 내보이는 순간이었다. 설렘인지 긴장인지 모를 것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옆을 슬쩍 돌아보자, 헤레이즈의 청회색 눈동자가 약간 굳어 있었다.

‘많이 떨리려나.’

시즌 1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헤레이즈 아이데였다. 전 세계가 기대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첫 시작을 끊는 주인공이라니. 굳이 상상해보지 않아도 책임감과 부담감이 막대할 게 분명했다.

그제야 도현은 헤레이즈가 왜 자신의 대기실에 있지 않고 도현의 대기실까지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그렇게라도 긴장감을 달래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데도 티 하나 안 내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독하다고 해야 할지. 뭐, 그 정도 하는 애니까 주인공이 되었겠지만. 헤레이즈에게서 시선을 뗀 도현이 다시금 방청객 쪽을 응시했다. 때마침 스튜디오가 어두워지며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예고편의 시작이었다.

* * *

거센 바람 소리가 들린다.

높은 지대의 거친 바람에 가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흩날렸다. 머리카락이 휘날릴 때마다 투명한 청회색의 눈동자가 카메라에 잡혔다.

그때 뒤편에서 한 남성이 걸어 나왔다. 절벽까지 올라오느라 지친 듯 무릎을 짚고 몇 번 심호흡을 한 그가 허리를 펴고선 타박했다.

“아서, 이 망아지 같은 놈아! 절벽은 위험하다니까.”

“롤랑.”

소년이 말했다.

“숲이 전보다 더 얼었어.”

화악- 강한 바람이 붊과 동시에 화면이 절벽 아래를 비추었다. 익스트림 와이드 샷으로 촬영된 화면 안에 광활한 숲이 들어왔다. 곧바로, 절벽 바로 밑을 조감한 화면이 천천히 호수까지 이동하기 시작했다.

초록빛 생기를 머금은 숲의 초목은 섬의 끝에 자리한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하얗게 성에가 끼어 있었고, 호수 근처에 다다라서는 표백된 것처럼 새하얬다. 그 서늘하고 몽환적인 풍경에 방청객들이 감탄했다.

숲이 멀어지며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다시 밝아졌을 땐, 페어리 픽처스의 상징인 요정 모양 동상이 떠올라 있었다. 반딧불이가 3D로 만들어진 동상을 한 바퀴 돌았다가 하늘로 날아갔다. 반딧불이를 따라가던 화면이 점멸했다.

별을 품은 이들이여.

환한 빛이 터졌다. 카메라 앵글에 담긴 절벽은 이전에 비췄던 곳과 같았지만, 상황은 전혀 달랐다. 빛이 사그라들고, 거대한 곰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온몸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단 아서가 빛이 사라진 제 손을 보다가, 옆을 응시했다.

누군가의 피에 젖은 손이 보였다.

그대들은 스스로 별이 되어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서의 시선이 손에 들린 검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갔다.

화면이 바뀐다.

환했던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고, 얼어붙었던 호수가 신비로운 빛을 내며 길을 만들었다. 그 광대한 기적 앞에서 모두가 넋을 놓았다.

여명을 불러올 길잡이다.

그 순간.

온통 검게 무장한 소년이 그 속으로 발을 디뎠다. 소년의 은발이 빛 속으로 사라지며 화면이 페이드아웃 되고.

그러니 자격을 증명하라.

쿵!

효과음과 함께 어두워진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Pathfinder라는 단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번엔 어둑한 밤이었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근처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은 아서의 잠든 얼굴 위로 붉은빛이 일렁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닥불을 응시하던 소녀가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때, 잠든 줄만 알았던 아서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쏴아아! 거칠게 출렁이는 강물이 하얀 거품을 일으켰다. 정신을 잃은 아서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아서의 멱살을 붙잡은 소녀가 필사적으로 버텨 보았지만, 거센 물살을 이길 수는 없었다.

간신히 소년을 붙든 채 속절없이 떠내려가던 소녀가, 뒤늦게 눈앞의 풍경을 발견하고 희게 질렸다. 거센 물살의 끝은 아득한 높이의 폭포였다.

“돌겠네!”

다급한 소녀의 외침과 함께 화면에 푸른 물이 가득 들어찼다.

추락이었다.

Pathfinder and the Frozen Forest

피이-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불씨가 타올랐다가 녹기를 반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하게 젖은 소년과 소녀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붉게 일렁이는 새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Premieres on September 16.

틱, 틱, 틱. 다가오는 시간을 알리는 듯한 시계 초침 소리가 울리다가.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 * *

방청객들은 잠시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들 중 대다수가 를 기대하며 온 원작의 팬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관심은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그랬다.

자본을 쏟아부었으니 중간은 가겠지.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아니겠는가. 그런 기대감을 품고 예고편을 보았고.

“…세상에.”

예고편은 그런 기대를 뛰어넘었다.

그 환상적인 풍경하며, CG라니!

거기다 짧게 편집되어서인지는 몰라도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 깊었다. 어린 배우가 캐릭터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했던 걱정이 단숨에 녹아내릴 정도로.

방청객들이 예고편의 여운에 허우적거릴 때였다. 스튜디오 불이 켜짐과 동시에 아이린 조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비한 힘을 가진 길잡이가 박스오피스를 장악하러 왔죠? 세 명의 길잡이 분들을 소개합니다. 헤레이즈 아이데, 신시아 엘더, 도현 리!”

그 소개에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제일 먼저 스튜디오에 발을 디딘 사람은 약간 긴장한 기색의 헤레이즈였다. 예고편에서 내내 보았던 얼굴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다음에는 신시아였다.

신시아는 여유롭게도 그 환호성을 즐겼다. 저 배짱만큼은 확실히 인정해 주어야 할 거 같았다. 도현은 계단을 오르기에 앞서, 실망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여기서 제일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을 고르라고 하면 단연 자신이었다. 전처럼 날 선 비난이 쏟아지지 않았다 뿐, 여전히 원작 팬들은 도현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도현은 예고편의 비중마저 적었다. 제법 임팩트 있게 나왔으나, 그래봤자 아주 짧은 찰나. 1초 정도 되는 시간 등장했을 뿐이다.

도현은 다짐했다.

저 환호성이 내 차례에 와서 잦아들더라도 기죽지는 말자고. 증명은 차차 하면 될 일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스튜디오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여우야!”

도현은 순간 발을 삐끗할 뻔했다.

상상치 못한 단어의 등장에 얼이 나간 얼굴로 방청객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엇 정도의 이들이 더 소리쳤다.

“여우야! 여우야!”

거기에 분위기를 탔는지, 르옌 누바라를 불러대는 사람도 생겨났다.

대체 뭐지, 이 상황.

르옌은 그렇다 치고, 뉴욕 토크쇼에서 듣는 ‘여우야’라니. 잠시 인지부조화가 올 만큼 당혹스러웠다. 방청객의 면면을 살펴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없었다.

애초에 저 묘하게 어눌한 ‘여우야’는 누가 봐도 외국인의 발음이었다. 도현이 조금 얼어 있을 때 끼어든 건 아이린 조였다.

“오, 인기가 엄청난데요.”

그녀의 능청스러운 반응에 정신을 차린 도현이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긴 소파의 제일 끝이었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도현은 머릿속을 조금 정리할 수 있었다.

아.

도현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얼마 전, 그러니까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에 경찬호가 흥분에 차 해주었던 말을.

- 넷플러스에서 우리 드라마 인기가 엄청나!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1위를 찍었고, 영미권에서도 순위권에 들었다고요!

<구미호뎐>은 국내에서 워낙 성황리에 끝난 덕분에 종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스트리밍 사이트에 서비스되었다. 경찬호에게 그 이야길 듣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미 종영한 작품은 관심 밖이라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도현의 바람은 유명세도, 돈도 아니라 그저 연기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설마하니 토크쇼 방청객 중에 <구미호뎐> 시청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수가 많은지 적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도현의 팬으로 보이는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게, 그를 놀랍고도 복잡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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