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8화. 여정의 시작 (13)
“오늘 기분은 어때요?”
“제 기분이요? 집에서 나오기 전에 두 시간 동안 샤워했어요. 지금도 갈 수 있다면 화장실에 가고 싶네요.”
헤레이즈 식의 긴장했다는 표현에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헤레이즈를 보던 도현이 생각했다. 역시 쟤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이린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녀는 쿨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갔다 와도 돼요.”
“배려 고마워요. 하지만 첫 토크쇼부터 그러고 싶진 않네요. 전 화장실이 아니라 아서로 기억되고 싶거든요.”
아이린도 못 참겠는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대화는 그렇게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된 건, 아이린이 연기를 어떻게 시작했냐는 질문하면서부터였다.
“어렸을 때 우연히 스크린 데뷔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를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연기에 관심이 생겼던 거 같아요. 그러다 공고를 봤어요. 저 같은 어린애들을 주연으로 쓰겠다는 영화였고, 놓칠 수 없었어요. 그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셨는지 캐스팅 디렉터에게 연락이 왔죠. 오디션을 볼 생각이 있냐고요.”
“경쟁률이 엄청났다던데요.”
“정말 그랬어요. 솔직히, 저는 제가 될 거라고 믿지 않았어요. 처음 전화가 걸려 왔을 땐 거짓말인 줄 알고 다섯 번이나 되물었거든요. 거짓말 아니니까 제발 그만 물어보라고 하실 때까지요.”
이미 사전에 전달받았던 질문이라, 헤레이즈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답했다. 순탄한 인터뷰가 지나고.
헤레이즈 다음은 신시아였다.
질문 자체는 비슷했지만, 두 아이의 대답은 정반대였다.
“신시아도 합격 연락을 받고 놀랐어요?”
“정말 기쁘긴 했지만, 놀라진 않았어요. 전 제가 될 걸 알고 있었거든요.”
“어떻게요?”
“그냥 원작을 보는 순간 알았어요. 제가 이그린이라는 걸요. 그건 운명 같은 일이라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이 자리에 있으니 제 말은 증명된 셈이죠.”
신시아는 아주 뻔뻔했다. 그러나 순진하게 깜빡이는 눈동자 탓인지 그게 얄밉기보다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매력이 있었다. 방청객들은 이 개성 넘치는 아이들에게 어느새 빠져들고 있었다.
아이린 조의 질문은 소파에 앉은 순서대로였다. 헤레이즈, 신시아, 그리고 도현. 두 사람의 차례가 끝난 후 그녀의 시선이 닿은 건 도현이었다.
“여기에 도현의 팬이 있는 거 같던데요.”
무슨 질문이 먼저 나올까 싶었던 도현은 아이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슬그머니 웃음 지었다.
“네, <구미호뎐>을 보신 것 같았어요.”
“<구미호뎐>이라면 넷플러스에서 최근 상위권에 있던 한국 드라마죠. 거기서 도현은 ‘여우야’로 불렸나 보군요.”
“네, 맞아요. 이곳에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정말 뜻밖의 이벤트였어요.”
그 미소엔 진심에서 우러나온 수줍음이 담겨 있어서, 보고 있던 아이린 조는 무의식중에 감탄을 터트렸다.
“이렇게 제 진행을 방해하려는 거군요.”
“네?”
아이린의 엉뚱한 말과 도현의 당황한 반응에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린은 정신을 차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도현의 데뷔가 심상치 않았단 건 대부분 알고 있죠. 베니스 최연소 신인상 수상자였으니까요. 이번에는 다른 얘기를 해보려는데, 오디션 비하인드 같은 게 있을까요?”
“제가 발레를 배우는데.”
“발레요?”
“…왜 이렇게 격한 반응이죠?”
“오, 아니에요. 계속해요.”
“네, 제가 발레를 배우는데, 친구의 추천으로 발레 공연을 보러 갔거든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이었어요. 환상적이었죠. 아이린, 당신은 그 공연을 본 적 있나요? 없다면 한 번쯤 보기를 추천할게요.”
뜬금없이 감상을 꺼내는 도현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헤레이즈는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에 어이없단 눈빛을 했고, 신시아는 아무래도 좋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공연은 물론 황홀했지만, 정말 놀라운 일은 인터미션 때 생겼어요. 그러니까, 카페에서 음료와 쿠키를 사서 로비 소파로 갈 때였어요.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더라고요. 초면인 남성분이었죠. 그와 눈이 마주치고, 강렬한 직감이 절 휘감았어요. 먼저 눈을 떼서도, 움직여서도 안 된다는 직감이요.”
“꼭 사랑에 빠진 거 같군요.”
“확실하게 말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떨떠름히 대답이 나갔다. 도현은 재밌어하는 헤레이즈를 한번 흘긴 후 말했다.
“사실 그가 어떤 의도로 저를 보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어요. 오디션을 봐본 적 있다면 알 텐데,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체하고 분석하려는 시선이 있거든요. 그때 그가 절 그렇게 봤죠.”
“그리고 그가 명함을 주었군요? 그렇죠?”
“네, 맞아요.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말과 함께요. 그가 바로 데이먼 컬렌버그 감독이었어요.”
“상당히 운명적이네요!”
아이린은 조금 감탄한 기색이었다. 그녀도 데이먼처럼 운명을 믿는 쪽인지도 몰랐다. 몇 가지 감상을 더 늘어놓던 아이린이 조금 묘한 투로 물었다.
“그럼 오디션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돌려 말했지만, 그의 인종을 뜻한 게 틀림없었다. 도현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장벽이 있는 편이긴 했죠.”
“예를 들면 어떤?”
“글쎄요. 제가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지원자가 있었는데 거기에 동양인은 저뿐이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오….”
“아이린. 당신도 알다시피, 타고난 조건은 때때로 유의미한 작용을 하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든지요.”
“그렇죠.”
한국계 미국인인 아이린 조는 도현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거 같았다. 그녀도 동양인의 외모를 타고나 마냥 좋진 않았겠지. 어디든 소수는 힘든 법이니까.
“하지만 제가 특별히 힘들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거기 있는 모든 지원자가 38,000 대 1이라는 경쟁률을 극복해야 했거든요.”
“38,000대 1이요?”
아이린은 물론, 방청객도 놀란 기색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청나죠. 거기에 조건 몇 가지 더 얹어진다고 해서 티가 나지는 않을 만큼이나요.”
여기서 약한 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도현이 원하는 건 동정표가 아니었다. 배우로서의 인정이었다.
“그건 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힘든 시합이었어요. 그러니 정말 중요한 건, 제가 제 능력으로 그 확률을 뚫었고 그래서 여기 있다는 거예요.”
도현의 말뜻을 이해한 아이린은 조금 놀란 낯을 했다. 소년에게서 나오기에는 너무 속이 깊은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초탈한 듯한 느낌까지 묻어났다.
아이린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신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현은 완벽한 르옌이에요. 제가 이그린이듯이요.”
“완벽할 정도인가요?”
그 물음에 답한 건 헤레이즈였다.
“적어도 저는 도현이 르옌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촬영했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걸요.”
단순히 동료 배우를 격려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도현의 이력이 뒷받침되며 진실성을 얻었다. 아이린이 수긍 어린 투로 말했다.
“도현의 천재성은 베니스에서 증명된 바가 있죠. 그 후로 상업 영화도 흥행시켰고요.”
여기서 이 화제가 지나가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측은 조금 더 화제성을 끌어모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럼, 힘든 순간은 없었다는 말인가요?”
무난하게 대답하고 넘어갈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그보다는 조금 더 솔직해지는 쪽을 택했다.
“확신이 없었다면 힘들었겠죠. 하지만 저는 제가 이룬 걸 믿었고, 또 제 주위 사람들이 절 믿었어요. 저를 직접 보고 판단한 사람이 저를 믿는데, 아직 저를 보지 못한 사람들의 의견을 신봉하는 건 너무 비합리적이잖아요?”
어느 정도 도발적인 말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으니까 꺼낼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날의 레드카펫에서 꺼내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털어놓게 된 도현이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 이건 진심인데, 당신은 언젠가 세상을 놀라게 할 거예요.”
아이린은 조금 경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꽤 예언 같은 구석이 있어서 도현은 기분 좋게 웃었다.
* * *
그날 저녁.
인터넷은 한차례 난리가 났다.
[Utube]
[Pathfinder : The Frozen Forest | Official Teaser Trailer]
(2,567,899 views 22 Aug)
유튜브에 올라간 패스파인더 공식 영상은 곧장 인기 급상승 영상이 되었고, 단기간 만에 폭발적인 화력을 보여주었다.
- 경이로움을 멈출 수가 없어. 음악, 분위기, 영상, 캐릭터까지 너무 완벽해!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 시리즈야! 당장 극장에서 보고 싶어 ).
- OMFG CANT WAIT!!!
- 판타지 계보를 이어갈 명작의 탄생일 거라 확신해!
긍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 예고편은 멋지지만, 책 시리즈의 팬으로서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르옌 누바라를 동양인 소년이 연기하도록 결정한 건 아직도 충격적이야. 그는 분명 훌륭한 배우지만, 배역을 고려한다면 캐스팅이 더 잘될 수도 있었을 거야.
- 그들은 르옌 누바라를 숨겼어!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가 정말 르옌에 합당한지 알고 싶었지만, 그의 등장은 고작 1.3초였어!
여전히 도현의 캐스팅에 대한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결국엔 영화에 관한 관심과 흥미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나라 중 한 곳은 단연, 한국이었다.
[패스파인더 예고편 공개!]
[“제작비만 1억 3천만 달러”, 드디어 베일 벗은 !]
[‘Pathfinder’ 티저 예고편 공개… 환상적인 비주얼의 향연]
[영화 ‘패스파인더’ 올 최대 기대작!]
[, 패스파인더 삼인방 출연! 예고편 공개까지?]
- 와…
- 예고편 미쳤다
- 이게 자본의 맛이구나….
- 예고편 1n번째 돌려보는 중 ㅠㅠㅠ
- 패스파인더가 나오긴 하는구나. 왠지 믿기지 않는다….
⌞ 나도. 뭔가 얼떨떨함….
⌞ 시즌 4까지 나온대!
- 분위기 대박 완전 신비롭네
⌞ 웅장함에 압도되는 기분ㅠㅠ
⌞ 페어리 이 갈고 나온 듯!!
- 하 ㅠㅠ 저 “스스로 별이 되어 여명을 불러올 길잡이다. 그러니 자격을 증명하라”라는 말 왠지 가슴이 웅장해짐. 너무 좋아 ㅠㅠ
⌞ 나도… 판타지 덕후의 심장을 저격해버림ㅠ 스스로 별이 된다니 미쳤냐 속이 뻐렁친다
⌞ 님 과몰입 자제 좀
⌞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ㅅㅂ
- 헤레이즈? 연기 되게 잘한다
⌞ 존잘생♡♡
- 이도현 왜 이렇게 분량 적음
⌞ ㅇㅈ 얼굴 왜 안 보여줘 ㅠㅠ
⌞ 그 흰 머리? 가 이도현 맞지?
⌞ ㅇㅇ 르옌 누바라
⌞ 흰 머리 아니고 은발임^^;
- 이도현 등장 짧긴 한데 나만 인상 깊냐 그냥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가
⌞ ㄴㄴ 뭔가 포스 있음 ㅋㅋ
⌞ 이도현이 원래 그런 거 잘함! 순식간에 분위기 휘어잡는 거
⌞ 그건 모르겠고 영화 언제 나오냐
⌞ 예고편에 있잖아 게이야…
⌞ 아 ㄱㅅ
- 텔레비전에서 보던 배우를 할리우드 영화 예고편에서 보니까 기분 되게 이상하다
⌞ 헐 나두
⌞ 이도현 원래 할리우드 배우였어 ㅋㅋㅋㅋ
⌞ 그건 알지만 왠지 낯선 이 기분
[토크쇼 , 발레 공연장에서 만난 운명!]
[패스파인더 삼인방, 귀여운 케미 화제!]
[이도현, “특별히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숙한 대답 인상적…]
- 와 발레 공연장에서 만나냐
⌞ 전형적인 될놈될
⌞ 인생이 그냥 드라마임
- 저 토크쇼 보고 이도현이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 성공했는지 납득했다… 성공할 수밖에 없는 마인드임
⌞ 성인도 저렇게 굴기 쉽지 않은데 되게 생각이 깊은 거 같음
⌞ 어떻게 해야 저 나이에 몇 가지 조건 더 얹어졌다고 특별한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거냐? 인생 최소 3회차 아님?
⌞ 또 오바하네 ㅋ
⌞ 불리한 조건 한 개만 있어도 거품 물고 발작할 거면서 쿨한 척 오지죠?
⌞ 백날 천날 신세 한탄만 하는 너랑 달리 이도현 갓생 산대 ^^
- 힘들었다고 한마디 할 법한데 끝까지 초연하네.
- 나는 왠지 마음 아프더라. 저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서. 한 명의 비난도 힘든 게 사람인데, 집단에게, 그것도 전 세계에 포진한 집단에게 비난받았잖아. 그걸 이겨내고 저기 나와서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정말로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 아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ㅠㅠㅠㅠㅜㅠㅠ
⌞ 이도현 진짜 대단한데, 개인적으로 기존쎄인 게 한몫했다고 봄. 캐스팅 발표 직후 논란됐을 때도 ㅈㄴ 아무렇지 않게 레드카펫 섰잖아. 멘탈이 일반인이랑 다른 건 분명 ㅇㅇ
⌞ 그건 모르는 거 아님? 뒤에서 많이 힘들어했을 수도 있잖아
- 딱 봐도 가식이구만ㅋㅋ
⌞ 넌 가식이라도 떨어봐라.
- 인터넷 여론이 아니라 주변인을 믿기까지 얼마나 마음 고생했을까… ㅠㅠ
⌞ 이도현 꽃길만 걸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