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79화 (380/582)

제379화. 여정의 시작 (14)

예고편이 공개되고 나서 티저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월드 프리미어로 개봉하는 날까지 일정 주기마다 한 편씩 공개되는 영상은 전 세계 영화인들의 이목을 쓸어 담았다.

고조되는 기대 속에서 팀은 홍보 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마리아 그라시아였다. 그녀는 매체 인터뷰뿐만 아니라 자선 행사에도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보내는 마리아나, 제작사 측과 다르게 의외로 도현을 비롯한 배우들은 생각보다 바쁘지 않았다.

예상에서 벗어난 여유로움에 의아해하자, 오스카는 정말로 바빠지는 건 개봉 후가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전 세계 개봉인 만큼, 몇몇 주요 국가 시사회에는 직접 참석해야 할 거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현이 아예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중요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페어리 픽처스 본사에 와 있었으니까.

샌디에이고에 머무를 때는 자주 들렀던 곳인데, 오랜만에 방문하니 조금 어색했다. 새삼스러운 심정으로 건물 안에 발을 디뎠다.

그 옆에 자리한 오스카는 도현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오디션을 위해 방문했을 때가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새 개봉을 눈앞에 두고 있다니. 그가 다 싱숭생숭해지는 느낌이었다.

약속된 장소로 가자 문에 붙은 흰 종이가 눈에 띄었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으로 프린트된 단어가 유독 선명히 눈에 박혔다.

내부 시사회

내부 시사회는 말 그대로 제작진과 배우, 스태프 등, 영화 관계자들이 모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시사회를 뜻했다. 이 시사회를 통해 재촬영 여부나, 마케팅 방향을 논의하기도 했다.

개봉을 고작 3주 앞둔 시점에서 내부 시사회를 진행하는 이유는 이게 추가 시사회이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내부 시사회는 이미 페어리 픽처스의 간부들끼리 모여서 마쳤다. 중요한 사항은 그때 결정되었다.

배우와 스태프들까지 부른 두 번째 내부 시사회는 확인 절차에 가까웠다. 그리고 한 번 더 심사숙고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번 영화에서, 외부에 공개하기 전에 진행하는 시사회로는 내부 시사회가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경우, 내부 시사회를 거친 후 본격적인 개봉 전에 비공식 시사회를 연다. 이는 평가단을 초청해서 여는 것으로, 각 매체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불러와 진행하는 시사회였다.

또한, 이건 일종의 마케팅이기도 했다. 일간지에 실린 평론가들의 평가를 보며 대중들이 영화에 기대감을 품도록 유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는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될 예정이었다. 일반적으로 시사회를 프리미어라고 칭하는데, 월드 프리미어는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진행되는 시사회였다. 이전에 베니스에서 상영되었던 와 같은 경우라고 보면 됐다.

첫 외부 시사회 이후 다음 날 미국 전역에서 개봉한다는 이 일정은 페어리 픽처스의 자신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나 다름없었다. 탄탄한 원작과 2년간 공들인 영화의 작품성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했지만.

‘사실 흥행은 보증된 상태지.’

생각보다 저조할 수는 있으나, 흥행에 실패할 수는 없다. 원작이 전 세계에 팬을 보유한 베스트셀러라는 점도 한몫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제작사이자 배급사인 페어리 픽처스의 모회사에 있었다.

페어리 픽처스의 모회사인 ANW은 에 대해 전방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 홍보를 위해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ANW뿐만 아니라, 시사주간지 클락,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 연예 전문지 엔터테인먼트 데일리 등 계열사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거기다가 는 ‘물량 공세’ 전략까지 들어갔다. 미국 전역 개봉관 수가 무려 3,201곳이었다. 그간 페어리 픽처스의 제작 영화 중 개봉관 수가 가장 많았던 작품이 3,400곳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두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이 정도로 지원하면 맥없이 망하기도 힘든 것이다.

이처럼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지만, 그게 수요 없는 공급은 아니었다. 그게 유의미한 투자라는 건, 얼마 전에 다운된 미국 영화 예매 사이트가 증명했다.

며칠 전에 진행된 사전 예매에서 아톰 티켓 같은 미국 영화 예매 사이트는 물론, 미국 최대 극장 체인 AMC 역시 접속량 과부하로 다운되었다. 심지어 모바일 앱까지 접속 불능 상태가 되자, 해당 극장에서는 사과문까지 게시했다.

이처럼 개봉 전부터 엄청난 기세를 보여주는 에 관심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사람들은 각자 영화가 기록할 성적이나, 매출을 계산해보며 나름대로 그 미래를 점쳤다.

한마디로 판은 이미 깔려 있다는 소리였다. 여기서 성적이 저조하게 나오면 변명할 말이 없었다. 도현은 그리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도현이 안으로 들어서자 상당히 많은 이들이 알은체를 해왔다.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영화 관계자라서 안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에 도현은 인사와 근황을 주고받으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목적지는 저쪽에서 손을 흔드는 토드 감독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데이먼을 비롯한 몇몇 감독들과 기획팀장까지. 덩치가 거대한 이들이 모두 이쪽에 모여 있던 게 분명했다.

“멀리서 빛이 나길래 누군가 했더니!”

도착하자마자 낯부끄러운 말을 던지는 데이먼에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한동안 만나지 않은 탓에 그의 편애를 잊고 있었다. 본인이 발굴하고 밀어붙인 끝에 간신히 캐스팅돼서 그런가, 도현에 대한 데이먼의 사랑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잘 지냈어요?”

“그럼, 물론이지.”

예민한 인상은 여전했지만, 거짓말은 아닌지 아파 보이거나 초췌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도현이 발레 공연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단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얼마 전에 화면에서 널 봤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반갑구나.”

“화면에서요?”

“넷플러스 드라마 말이야. 내가 그걸 조금 봤거든. 아, 이 사람도 봤다던데.”

데이먼이 말한 ‘이 사람’은 기획팀장이었다. 그는 데이먼의 말에 심드렁한 척 말했다.

“첫 화만 봤을 뿐이에요.”

도현은 뉴질랜드에서 촬영할 때 그가 자신을 무척이나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을 기억했다. 나중에는 식사에 참견하며 잔소리했던 것도.

도현은 새삼 달라진 태도를 실감했다.

그 후로 토드 감독과도 가볍게 안부 인사를 나눈 후, 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거 같아 자리를 비켜주었다. 때마침 헤레이즈가 시사회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도현은 그와 합류했다.

주연급의 두 배우가 모여 있자 말을 거는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그들에게 성실하게 답해주던 도현은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마리아 그라시아였다.

도현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헤레이즈와 함께 마리아에게 향했다. 두 사람을 발견한 마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녀는 바쁜 탓인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안색이었는데, 그녀의 두 눈에 어린 열기가 그런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지금껏 만난 그 어느 때보다 마리아는 활기차 보였다.

그녀는 기꺼이 두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고, 도현은 마리아가 굉장히 들떴으며, 동시에 불안한 상태란 걸 깨달았다. 그녀의 모든 게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도현은 그녀의 긴장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주제를 환기했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여름휴가였다.

“릴은 아름다운 도시였어요, 마리아.”

도현의 휴가지가 그녀의 고향이었다는 소리를 들은 마리아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눈에 띄게 밝아진 안색에 도현은 남몰래 안도했다.

“다음번에 갈 땐 내게 말해. 거기에 사둔 집이 있거든. 관리하는 분도 계시고 말이야.”

“너무 신세 지는 게 아닐까요?”

“오, 설마. 네가 그 집에서 즐겁게 지낸다면 나도 기쁠 거란다. 릴 말고, 모나코에도 별장이 있으니 생각 있으면 말하렴.”

마리아는 도현을 향한 호의로 넘쳐 보였다. 도현은 그녀의 호의가 부디 개봉 이후에도 이어지길 바랐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더라도 성적이 부진한 배우가 예뻐 보이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만약, 영화의 성적이 부진하다면 도현은 꽤 꼬투리 잡을 게 많을 배우였다. 영화가 망하기만을 기다리며, 동양인 배우에게 칼날을 갈고 있는 이는 숫자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니.

그 여론에 마리아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 너무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도현의 시니컬한 머릿속을 모르는 마리아는 즐거운 기색으로 다음번에 여행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헤레이즈에게도 집에 초대하겠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재작년에 종종 있곤 했던 티타임의 연장선 같았다.

마리아가 떠나고.

내부를 둘러보던 도현은 막 들어오는 소녀를 보고 손을 들다가, 그 뒤에 등장한 이를 발견하고 어정쩡하게 멈췄다. 굵게 말린 갈색 머리카락에 순간적으로 누군지 헷갈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강렬한 붉은색 머리카락인 탓이었다.

하지만 저 푸른 눈동자는 헷갈릴 수가 없었다.

상대도 이쪽을 보았는지 해사하게 웃다가 눈가를 팍 찡그렸다. 얼굴을 너무 다이내믹하게 쓰는 거 아닌가. 떨떠름해진 도현이 내리던 손을 다시금 들었다. 신시아가 도현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르옌!”

도도도, 소리가 날 것처럼 달려오는 신시아에, 루카 하퍼가 마지못해 간다는 듯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너 부른 거 아닌데.

그리 생각하다가 치사한 거 같아서 관뒀다.

“안녕, 신시아. 그리고….”

검은 눈동자가 옆으로 향했다.

“너도 안녕.”

“그래.”

그렇게 대답한 루카 하퍼가 도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리고선 은근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넌 여전하네.”

도현은 여전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게 5학년 때 촬영이었으니,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때의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니까.

루카 하퍼의 시선이 도현의 정수리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본인과 키가 비슷한 걸 가지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흥분하지 않았다. 딱히 키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루카가 큰 거였다.

깔끔하게 결론 낸 도현이 가볍게 대답했다.

“너도 한결같네.”

인성이.

뒤에 생략된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다가,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둘 다 오늘은 시비 걸기에 좋은 날이 아니란 걸 알아서였다.

그때였다.

“!”

도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거의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린 도현은 근접한 거리에 있는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음.”

미적대던 레비 올란도가 도현의 엄한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 정수리가 너무 동그랗길래.”

대체 정수리가 동그란 것과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것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도현이 신 감을 먹은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려니, 그를 내려준 레비가 정수리를 두어 번 토닥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됐어요.”

그의 말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지금도 ‘앞으로 안 하겠다’라는 말은 없지 않나. 한숨을 푹 내쉰 도현이 레비에게서 세 걸음 물러섰다. 훤히 보이는 거리감에 그가 서운한 척 어깨를 늘어트렸지만, 속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네요.”

“뉴질랜드에서 보고 처음이니까.”

상당히 오래되긴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다짜고짜 들어 올렸다는 소리였다. 생각할수록 어이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 올려요?”

“반가움의 세리머니.”

“…….”

그래,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그때였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회장으로 사용된 로비와 이어진 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현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잠시 후.

모든 이들이 착석하자 실내등이 꺼지며 비공식적인 두 번째 상영이 시작되었다.

* * *

그날. 시사회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촬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집중력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특히 헤레이즈는 완전히 넋을 놓은 채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인터넷 기사 사이트에는 ‘ 내부 시사회, 호평 가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수많은 관련 기사의 위로 새로이 더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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