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화. 여정의 시작 (15)
9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컨벤션 센터.
프레스 콘퍼런스 룸.
30대 초반의 동양인 남성이 낯선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국에서 온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바삐 떠들거나, 무언가를 기록하면서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노트북 소리, 다양한 언어권의 문장이 섞여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가 어리숙하게 굴자 옆에 있던 여성이 타박했다.
“할 거 없으면 질문이라도 다시 봐. 기사 한 번 더 점검하고. 너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 줄 알아?”
“죄, 죄송합니다.”
“하나도 놓치면 안 돼. 하나도. 그리고 절대, 절대 지체되면 안 돼. 알겠어? 기사 나오는 대로 곧장 올려야 한다고.”
한국에서 L.A.로 넘어오는 순간까지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은 말이었다. 전날까지는 지겹게만 느껴졌던 그 잔소리가 새롭게 들렸다.
“우리가 한국에 처음으로 보도하는 거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 모르는 거 아니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야 빠릿빠릿하게 나오는 대답에 남자를 타박하던 여성, 전하리는 동그란 안경 속에서 날카롭게 빛냈던 눈빛을 누그러트렸다.
영화 전문지 무비데일리의 저널리스트이자, 이제는 취재 팀 팀장이 된 그녀는 무심코 힘이 들어간 손에 화들짝 놀라며 손아귀 힘을 풀었다. 다행히 수첩은 구겨지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 정면의 풍경을 응시했다.
기자들이 착석한 자리의 맞은편.
계단 두 개 정도 높이의 단상은 온통 다양한 색감의 푸른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뒤의 벽지도,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도, 양옆에 늘어진 커튼도, 단상 위에 길게 늘어진 테이블까지도.
벽 한가운데에는 그보다 연한 하늘색과 흰색으로 ‘Pathfinder and The Frozen Forest’라고 쓰여 있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건 조명이었다. 아래에서부터 쏘아 올린 조명은 푸른 벽지와 어울려 마치 얼어붙은 호수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참석한 기자들로 하여금 기대심을 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전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월드 프리미어가 진행되기 전, 프레스 콘퍼런스. 그 자리에 한국 기자가 초청된 건 뜻깊은 일이었다. 할리우드 기대작인 만큼 한자리 얻기도 치열한데, 그걸 전하리가 속한 무비데일리가 얻은 것이다.
한국에서 매출이 잘 나와서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이도현 덕분이었다. 그가 중요한 비중으로 출연하기 때문에, 영화사는 그에 대한 예우로 한국 기자를 초청했다.
에 대한 한국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 또한 이도현 때문이니, 결국엔 이도현이었다.
방금 부하 직원이자 후배에게 잔소리했던 게 무색하게 전하리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이 몇 년 전을 짚었다.
그때는 팀장도 아니었다. 운이 좋아 베니스로 취재를 나간 평범한 저널리스트였다.
을 취재하러 간 것도 아니었다. 레드카펫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호기심을 쉬이 넘기지 않은 덕분에 경쟁 부문 초청작에 당당히 쓰인 ‘Do-hyun Lee’라는 이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천운이었다.
그로 인해 무비데일리는 베니스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도현을 독점 취재했다. 그뿐일까. 최초로 개인 인터뷰를 했고, 그때의 인연이 이어져 이곳에 자리했다. 각국의 유명 매체들이 모인 이곳에 말이다.
무비데일리를 넘어서 전하리가 얻은 것도 많았다. 원래 영화 평론은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도현이 나온 인터뷰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평론에도 눈을 돌렸다.
가 상업 영화가 아닌 예술 영화라는 점도 평론이 널리 퍼진 이유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소년이 출연한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분석하길 원했으니까.
그로 인해 그녀의 평론은 유명해졌고, 인기에 힘입어 영화를 다루는 TV프로에 출연까지 했다.
그렇게 전하리는 무비데일리에서, 무비데일리는 대중들 사이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이 모든 출발점이 작고 어렸던 소년이라고 한다면, 그 누가 놀라지 않을까.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그렇지만….
다만, 한 명의 영화인으로서는 조금 달랐다. 영화에 인생을 바친 사람으로서 그녀의 가장 큰 행운은 출세도, 인정도, 유명세도 아니었다.
그 시작점을, 샛별이 떠오르는 찬란하고도 황홀한 순간을 그녀가 직접 지켜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컸을까.’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금 가슴이 빠듯해졌다. 그건 기대감이었다.
그 애는 또다시 경험하게 해줄까.
모든 걸 잊고, 오직 보고 듣고 느낀 걸 쏟아내고 싶은 생각에 노트북 앞에 앉았던 그 순간을. 너무 벅차올라 갑갑함을 어떻게든 풀어내야 했던 그 감각을….
“팀장님!”
“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잠깐 생각이 다른 길로 샜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자 고개를 휘휘 돌렸다.
옆에서 윤 대리가 긴장한 낯으로 말했다.
“나오려나 봐요!”
그 말처럼 단상 아래에 선 진행자가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대략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만한 주의사항과 이 자리의 주역이 등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카메라 들어.”
“네!”
전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왔다!”
누군가의 감탄사와 함께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번쩍번쩍 터지는 플래시에 일순 실내가 하얗게 보였지만, 전하리는 개의치 않고 침착히 사진을 찍었다.
제일 먼저 등장한 건 제작진들이었다. 토드 감독을 시작으로 그들은 양 끝부터 자리를 채웠다. 그다음에는 정령 역할을 맡은 배우였다. 그는 웃는 낯으로 들어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칫하면 우중충해질 수 있는 색이었지만, 그가 입음으로써 그저 퇴폐적인 매력을 더해주는 것으로 변했다.
카메라 소리가 무섭도록 울렸다.
그의 손짓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쉬지 않고 울리는 셔터음과 플래시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음에도, 레비 올란도는 태연자약했다.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트리던 전하리는 순간적으로 탄식을 흘렸다. 곳곳에서 그녀와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지금까지 나왔던 인원들과는 눈높이가 달라도 한참 다른 아이가, 병아리처럼 레비 올란도의 뒤에 쫑쫑 따라붙은 것이다!
소녀가 움직일 때마다 높이 묶은 머리카락이 강아지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렸다. 사랑스러워도 너무 과하게 사랑스러웠다. 걸친 옷도 새순 같은 연두색이었다.
바로 이전이 온통 검은 착장의 할리우드 대표 퇴폐 미남이었던지라, 그 대비감은 극대화되었다. 한참 전하리가 소녀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쭈뼛거리며 나오는 소년이 있었다. 컬이 들어간 금발은 소년을 사랑의 신이나, 그 사도인 천사쯤으로 보이게 했다. 계곡물처럼 맑은 청회색 눈동자는 온통 푸르른 무대와 맞춘 것처럼 어울렸다.
레비 올란도의 뒤에 이어서 나온 소녀는 신시아 엘더. 그다음으로 등장한 소년은 의 주인공, 헤레이즈 아이데.
그럼 다음은….
아, 그녀는 탄성을 뱉었다.
그 소년이었다.
여전히 빛나고, 여전히 특별하고, 여전히 황홀하며, 여전히 마음을 자극하는 가련함을 지닌. 그러나 아름다운.
셔터음이 커진 건 그녀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소년이 등장한 순간 모든 이가 그에게 집중했다.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이 무색하게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그만큼 수없이 많은 스타를 직접 봤다. 이들의 일은 그 스타들을 더 밝게 빛나게 하거나 때론 어둠에 파묻히게 하는 것이었다.
빛과 어둠 양쪽에 모두 익숙한 이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빛을 갈망했다. 결국엔 불나방처럼 더 화려하게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걸 원하는 족속이었다.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든 간에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이도현이라는 존재는 마치 꿀을 바른 꽃 같았다. 그가 처한 상황, 나이, 재능, 능력, 외모, 존재감…. 그 모든 것이 유혹적이었다.
시야가 하얗게 변할 만큼 터지는 플래시에도 소년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잠깐 빛을 잘못 봤는지 눈매를 약간 좁혔을 뿐이었다. 소년을 마지막으로 모든 등장이 끝났다.
하나로 이어진 긴 테이블에 앉은 배치는 이랬다. 양쪽 끝에 제작진들이, 그 양쪽 옆에 정령 역할을 맡은 배우와 레비 올란도가, 그 사이에 신시아와 헤레이즈, 도현이 위치했다. 헤레이즈가 가장 가운데인 구조였다.
전하리는 물병을 따 주는 레비와 그걸 건네받는 도현을 보면서 감탄했다. 신시아와 있을 때는 그렇게 이질적이었는데. 옆에 도현이 있으니 그림체가 편안하다.
잠깐, 편안하다고?
베니스 소년은 별을 박아 넣은 총명한 눈과 성숙하리만치 단정한 낯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림체가 편안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의문에 차 있을 때였다.
가장 왼쪽에 앉은 토드 감독이 마이크를 잡았다. 첫 시작은 정석적인 인사말과 함께 와주어 고맙다는 감사 인사였다. 그가 마이크를 내려놓고, 앉은 순대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토드처럼 정석적인 인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데이먼처럼 유쾌한 개그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아역 배우들의 인사에서도 성격이 묻어났다. 신시아는 순진하게 깜빡이는 눈과 몽환적인 목소리로 사람들을 홀렸고, 헤레이즈는 풋풋한 긴장감을 내보였으며, 도현은 차분하고 단정했다.
한 바퀴 돌고 난 후.
토드 감독이 마이크를 들었다. 그가 질문이 있냐고 말하자 좌석을 채운 모든 기자가 손을 들었다. 아까 부산스러웠던 광경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단합이 잘된 모습이었다.
처음은 간단한 질문이었다.
의 특징을 묻는 말에 토드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이번 영화는 판타지지만, 단순히 판타지로만 남지는 않을 겁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잘못 들기도 하고. 그러다 저마다의 길을 찾아내는 과정은 우리의 삶과 닮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영화는 판타지면서 판타지가 아닌 겁니다.”
판타지면서 판타지가 아니다.
역설적인 말이었다. 그만큼 인상적이기도 했다.
“촬영 중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좋은 질문이네요. 쉬운 게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 뒤집어서 대답하자면, 쉬웠던 건 배우들과의 호흡이었습니다. 판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실성입니다. 현실성이 밑바탕에 있지 않으면 그저 말도 안 되는 공상이 되어버릴 뿐이거든요. 판타지를 또 하나의 현실 세계로 만드는 게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배우들은 제 요구를 훌륭히 수행해 주었죠.”
“그렇다면 가장 어려웠던 것은요?”
“하….”
무의식중에 한숨을 내뱉은 토드 감독에 산발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기자를 비웃은 게 아니라, 진심 어린 피곤에서 묻어난 한숨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촬영 환경이 제일 문제였죠. 뉴질랜드는 환상적인 곳이지만, 환상적으로 변덕스럽거든요. 촬영을 위해 짐을 잔뜩 들고 나갔다가도 비가 내려서 되돌아온 날이 많았죠. 그렇다고 날이 좋은 날 몰아서 찍을 수도 없어요. 아역 배우는 근로 시간이 정해져 있거든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전하리는 토드 감독이 저런 반응을 보인 걸 이해했다. 날씨도 변덕스러운데 배우 근로 시간까지 맞춰야 한다니. 그녀였더라도 환장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데이먼에게는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는지 질문이 돌아갔다. 그는 ‘처음엔 잘할 거 같았다. 그리고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장면을 완벽하게 연출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그만큼 원작의 묘사가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욕심이 났고, 욕심을 냈고,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 해피 엔딩이다.’라고 말했다. 데이먼의 엉뚱함이 드러나는 대답이었다.
“연출 중에 특별히 재밌는 부분이 있을까요?”
“오, 물론이죠. 영화의 배경이 되는 노바우드는 다양한 종족이 모여 사는 섬인데, 그래서 저는 그 ‘다양성’에 집중했습니다. 각 종족마다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어떤 종족은 고대 로마가, 어떤 종족은 바이킹이 생각날지도 모릅니다.”
제작진들의 인터뷰가 먼저 진행된 후, 자연스럽게 배턴은 배우에게로 넘어갔다. 첫 질문은 주인공인 헤레이즈에게 향했다.
“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만, 헤레이즈는 미처 마음의 준비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는데.
“어… 좋죠?”
뇌를 거치지 않은 듯한 대답을 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깨달은 그는, 화르륵 달아오른 낯을 하고선 마이크를 고쳐 쥐었다.
“그, 러니까, 무척이나 좋은 영화라고요. 주인공은 아서지만, 모든 캐릭터가 삶의 주인공이 되어 길을 찾기 위해 분투해요. 저는 그게 꼭 같이 커가는 느낌이라 좋았어요.”
나이대에 맞으면서도 너무 가볍지는 않은 대답이었다. 훌륭하게 수습한 헤레이즈는 그를 놀리려는 기자들의 집중 질문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레비 올란도 배우님께 질문하겠습니다. 판타지 영화에 출연하신 건 처음인데, 작업 소감은 어떤가요?”
“저도 뭐… 좋죠?”
“!”
헤레이즈가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레비를 보았다. 커다래진 청회색 눈동자에는 배신감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따가운 시선을 받은 레비는 특유의 나른한 얼굴로 뻔뻔하게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 모습에 전하리는 속절없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인터뷰가 무슨 꽁트 같아.’
아역 배우들이 참석하는 기자 회견이니만큼 조심스러울 줄 알았는데. 분위기가 생각보다 더 유쾌하고 가벼웠다.
“그러니까 뭐가 좋냐면, 분장이 특이하더라고요. 그런 재미도 있었고… 또, 마음에 드는 배우를 만나서요.”
“어떤 배우입니까?”
“당연히 제 아들 아니겠어요.”
영화 설정을 빌려와서 하는 말에 전하리는 감탄했다. 그가 마음에 든 배우를 말함과 동시에, 어떤 논란이나 분란의 여지는 없었다. 아침에는 모델과 기사에 났다가 저녁에는 가수와 기사에 날 거같이 생겼으면서, 아무런 스캔들도 없는 게 이해가 갔다.
다만, 그가 의도한 건지 뭔지.
관심의 화살이 검은 눈의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