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1화. 여정의 시작 (16)
“아….”
느릿하게 마이크를 든 소년이 입을 열었다.
“영광이네요.”
문장과 달리 표정은 담백하기 그지없어서 웃겼다. 소년은 스스로를 의식했는지, 성의를 담아 몇 문장을 추가했다.
“레비는 굉장한 연기자예요. 배울 점이 무척이나 많았죠. 게다가 그와 제 연기는 결이 무척이나 잘 맞았어요. 함께 연기하는 게 너무 즐거웠죠. 이번 시리즈에 그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적다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요.”
문장이 끝맺어지자, 전하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살면서 그렇게 잽싸고 절도 있었던 순간이 없었다고 확신할 만큼, 놀라운 반사 속도였다.
본격적으로 다가온 차례를 덤덤히 받아들이던 소년은 질문을 위해 일어난 여성을 보고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조금 크게 떴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명백한 반가움이었다.
‘설마, 알아본 거야?’
그녀가 이도현을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그는 유명인이고, 한번 보면 잊기 어렵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전하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눈과 얼굴이 동글동글한 게 조금 특이할 뿐, 평범하게 생겼다.
‘…아, 기억력이 좋다고 했지.’
도현에 관한 정보를 떠올린 그녀가 수긍했다. 그래도 신기한 건 여전했다. 전하리는 머릿속으로 질문을 고르다, 첫 질문으로 적당한 걸 꺼냈다.
“극 중 배역인 르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르옌은 제게 영감을 주는 캐릭터예요. 무척이나 솔직하지 않은 성격이라서, 그의 행동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재밌죠.”
그는 이어서 설명했다.
“그건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아요. 그런 부분이 캐릭터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고요. 저는 항상 제가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거든요.”
앳된 낯에 미소가 올라왔다.
“그렇게 하나둘씩 수수께끼를 풀다 보면 정답에 도착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노력하고 있어요.”
귀여운 대답을 마친 도현은 전하리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예상치도 못한 인사를 받은 전하리는 조금 넋이 나가 있다가, 옆에 앉은 윤 대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착석했다.
“이제 알겠다….”
“예? 뭘 알아요?”
도현과 레비가 비슷해 보였던 이유.
그건 도현이 자라서였다.
단순히 외적 성장을 말한 게 아니었다. 그때의 어린 소년은 분명 차분했지만,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약간의 어설픔. 그리고 어딘가 모를 위태로움이 존재했다.
하지만 방금 전하리와 눈을 마주치고 대답한 소년은 달랐다.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총명했지만, 어설프지 않았다. 위태로움이 깔려 있던 자리엔 여유가 대신했다.
막 쌓인 눈송이와, 눈이 쌓이고 쌓여 언 호수의 차이였다. 단단하게 굳은 호수의 표면에는 수많은 생채기가 그어져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일부일 뿐이었다.
그 여유가, 나아가 여유가 있음을 숨기지 않는 자신감이 레비와 닮아 있었다. 그게 두 사람의 느낌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도 질문이 쏟아졌다.
한 기자의 질문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원작의 인기에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그 질문은 다른 이들에게라면 평범할 테지만, 도현에게 주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전하리의 머릿속에 자동으로 한 가지 논란이 상기되었다.
‘안 돼.’
굳이 시사회 하루 전날에 그런 화제를 들쑤셔서 좋을 건 없었다.
배우는 가상의 인물을 연기한다. 관객들이 그 가상의 인물에게 몰입하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배우 자체에 주의가 쏠리면 몰입이 깨져버린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다가도 ‘르옌 누바라’가 아닌 ‘동양인 소년’을 떠올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전하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원작 소설에 나온 거대하고, 신비로운 세계관 속 르옌을 제 시각으로 그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내 시각으로 꾸밀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잖아요.”
자연스럽게 등장한 논점 흐리기 스킬에 전하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답인 듯 아닌 듯 대답 같은, 그러나 꼬투리 잡아서 물어보기는 애매한 답변이었다.
정치 잘하겠네.
그녀는 칭찬인지 뭔지 모를 감상을 떠올리며, 긴장으로 굳었던 몸의 힘을 풀었다. 그녀는 더 이상 불안한 눈으로 이도현을 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더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배우인 건 분명했다.
* * *
[‘Pathfinder’ 기자 회견 현장 (포토)]
[L.A. 패스파인더 기자 회견, “훈훈한 분위기” (포토)]
[패스파인더 토드 감독 “판타지면서 판타지가 아니다”]
[신시아 엘더, 깜찍한 자태 (포토)]
[헤레이즈 아이데, 기자 회견 중 놀란 얼굴… 왜?]
[‘패스파인더’ 이도현, “르옌은 수수께끼 같은 캐릭터. 그래서 공감돼…”]
[‘Pathfinder’ 레비 올란도, 이 안에 마음에 드는 배우 있어…충격 발언]
[또다시 슈퍼스타의 눈에 든 이도현! 그를 픽한 스타들은?]
[15일 (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영화 ‘패스파인더’의 프리미어 시사회가 진행되었다. 이날 이도현, 레비 올란도, 헤레이즈 아이데, 신시아 엘더, 지프 워너가 참석했다.
한편, 회견 중에 레비 올란도가 한 대답이 화제다. 영화 작업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분장이 특이해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배우를 만나서 좋았다.”고 말했다.
‘마음에 드는 배우가 누구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당연히 내 아들 아니겠냐”고 대답해 유쾌함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도현이 이처럼 슈퍼스타의 눈에 든 건 처음이 아니다.
5년 전, ‘불량 경찰’ 시사회에서 배우 강이든은 “무척 재능 있는 아이를 만났다”고 밝힌 바 있다. 심지어 그는 올 상반기 최고의 흥행 드라마 <구미호뎐>의 합류 이유로 ‘이도현’을 꼽았다.
슈퍼스타마저 끌어당기는 이도현의 매력이 궁금해진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
- 기자 미쳤냨ㅋㅋㅋㅋㅋㅋㅋㅋ
- 기레기라 하고 싶은데 이번엔 웃겼다;
- 이걸 기사라고?
- 이도현이 슈스니까 슈스가 꼬이겠지… ㅎㅁㅎㅇ
[이도현-레비 올란도 케미 뿜뿜 투샷 (포토)]
- 와 비주얼 압살
- 뭔데 그림체 편안하냐
- 서양인과 동양인인데 닮아 보이는 거 실화?
⌞ 떨어져 있을 땐 몰랐는데 붙어 있으니까 진짜 좀 비슷해 보임;;
- 저런 부자 어디 가야 볼 수 있나요 ㅠㅠㅠ
⌞ 미국이요
⌞ 아… 네^^;;
[성황리에 끝난 ‘패스파인더’ 프리미어 프레스 콘퍼런스]
[(Pathfinder) 시사회 하루 앞두고 성공적인 기자 회견 마쳐…]
* * *
한국, 서울.
9월 16일 AM 11 : 50
“야야야! 대박 소식!”
“뭔데 또.”
“또준이 또 지랄이죠.”
“아니야, 미친놈들아. 이거 봐! 도현이 기자 회견 했대!”
“…….”
“놀랐지!”
“…야, 그거 모르는 애가 지금 어딨냐?”
“아?”
서일준이 머쓱한 낯으로 핸드폰을 치웠다. 그는 태블릿으로 기사를 검색 중인 친구들 사이에 낑겨 들어갔다.
“야, 인터뷰 전문 찾아봐. 전문.”
“못 찾겠어. 기사가 너무 많아서… 아, 이건가.”
기사를 누르자 뜨는 화면에 아이들이 일시에 감탄했다.
“오, 이도현 사진 잘 나왔다.”
“씁, 이도현이 뭐냐. 형님한테.”
“맞다, 실수실수.”
“옆에 있는 거 레비 올란도야? 클라스 미쳤네….”
아이들과 두런두런 떠들던 서일준이 쑥 고개를 빼 들었다.
“우리 19일에 다 모이는 거 맞지?”
“이응이응. 반장이 예매도 단체로 했잖음.”
“다 같이 보고 형님한테 인증 샷 보내자.”
서일준의 말에 그의 친구가 뭘 묻냐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 * *
[패스파인더 월드 프리미어, 하루 앞으로 성큼… 전 세계 이목 집중]
[ 개봉 다가온다]
[전 세계의 뜨거운 주목 속에서 가 드디어 베일을 벗는다. ‘Pathfinder’는 L.A. 컨벤션 센터에서 전 세계 최초로 공개될 예정이다.
한편,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는 현지 시각 16일 오후 6시, 국내 시각으로 17일 오전 10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 우리는 언제 개봉해 ㅠㅠㅠ
⌞ 월드 프리미어가 16일, 미국 개봉이 17일, 국내 개봉이 19일인 걸로 앎
⌞ 오 생각보다 빠르네
- 극장 전 좌석 예매인 거 실화냐
- 패스파인더 예매 안 한 흑우는 없겠지?
⌞ 첫날 티켓 프리미엄 붙음;;
⌞ ㄹㅇ?? 미쳤네
- 우리도 개봉 빨리빨리 ㅠㅠ!!
- 못 기다려!!!
* * *
한국, 서울.
9월 17일, AM 12 : 00
늦은 밤.
널찍한 방 안.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소년의 얼굴 위로 핸드폰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L.A.는 지금… 오전 8시구나. 헉!”
정희운이 이불을 걷어내며 한 바퀴 빙그르 돌아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한 손으로 매트리스를 팡팡 쳐 댔다.
“그럼 열 시간 뒤에 시사회라는 소리잖아! 어떡해!”
한참 흥분한 낯으로 매트리스를 폭행하던 소년은 털썩,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갈색 눈동자가 네이버에 주르륵 떠오르는 기사를 읽어 내렸다. 대단하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흩어졌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떠올랐지만, 방 안에 떠오른 작은 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USA, L.A.
16, Sept. AM 8 : 00
“오늘 여섯 시래! 잊지 말고 전화 걸어! 아니, 바쁠 거 같으니까 전화 말고 문자!”
- 알고 있거든.
“참, 니키. 너도 내일 영화 보러 가?”
- 당연한 거 아니야?
“그치? 나는 다비드랑 헤더, 그리고 지니랑 같이 보러 가기로 했어. 원년 티타임 멤버라서. 너는?”
- …러.
“뭐? 누구라고?”
- 아, 제이스 테일러! 이제 끊어!
뚜, 뚜-
* * *
[‘Pathfinder’ 미 L.A.서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 개최]
[패스파인더, 화려한 프리미어 레드카펫 행사 공개!]
[패스파인더 : 얼어붙은 숲, L.A.서 월드 프리미어 개최… 뜨거운 레드카펫]
[패스파인더, 시사회장이 신성한 나무로 변신? 팬들 깜짝 놀라게 한 이벤트!]
* * *
그리고.
USA, L.A.
16, Sept. PM 6 : 01
한국, 서울.
9월 17일 AM 10 : 01
평일 초저녁부터 L.A. 컨벤션 센터 앞은 성황이었다. 펜스 너머, 빽빽하게 모인 인파는 어지러운 장관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겹치고 뭉개져 하나의 음향 효과처럼 깔렸다.
그때 등장한 검은색 차량이 레드 카펫 앞에 매끄럽게 멈춰 섰다. 카펫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진 펜스에 몰려든 팬들이 함성을 질러 댔다.
이윽고.
덜컥,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
누가 나올까.
팬들의 기대감 가득한 눈동자가 한곳에 집중되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까맣고 매끄러운 구두였다.
그다음에는 복사뼈에 맞춰서 완벽하게 재단된 기장의 검은 정장 바지, 회색의 와이셔츠, 그리고 그 위에 받쳐 입은 검은색의 베스트와 정장 겉옷이 보였다. 베스트는 얇은 허리선에 딱 맞춰 맵시 있었으며 은사를 수놓은 넥타이에는 깔끔한 넥타이핀까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소년이 온전히 차에서 내려 카펫 위에 발을 디뎠다. 붉은 카펫 위에서 소년의 흰 피부와 검은 정장이 유독 선명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주름 하나 없이 다린 정장과 달리 머리카락은 앞머리부터 뒷머리까지 컬이 들어가 있었는데, 세련된 옷차림, 흰 피부와 어울려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밤이라 살짝 어두워진 하늘도 소년을 꾸미는 장식이 될 뿐이었다.
잠깐의 정적.
- 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소란.
함성을 들은 소년의 입꼬리가 초승달 같은 호선을 그렸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 막 차에서 내리는 이를 도와주었다.
“신시아악!”
“도현! 도현 리!”
신시아가 도현의 손을 잡고 폴짝 뛰어내렸다. 허벅지까지 오는 흰색 스커트는 밑단이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요정 같은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종아리까지 리본이 올라오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뒤로 한 명이 더 내려왔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부드러운 파스텔 블루를 주로 쓴 정장은 소년의 몸에 꼭 맞았다. 바지에 멜빵이 연결된 스타일의 정장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내린 것을 확인한 도현은 다시금 정면을 응시했다. 살짝 어둑한 푸름 아래서도 강렬한 카펫의 붉음. 그리고 그걸 둘러싼 수많은 인파. 카메라. 기자. 플래시.
아, 드디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