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82화 (383/582)

제382화. 여정의 시작 (17)

재밌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영화 상영을 위해 모인 시사회에서, 일정 중 가장 뜨겁고도 달아오르는 순간. 즐거운 기대가 가슴을 빠듯이 채우고, 몽롱하게 기분이 고양되는 순간은.

- 꺄아아아악!

바로 스타가 레드카펫에 등장한 순간이라는 것.

그 순간만큼은 영화에 대한 불안도 걱정도 없다. 그저 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이 붉은 길 위에서 그 빛을 반짝이는 것에 열광할 뿐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인파다.

태어난 곳도,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자라온 환경과 성격까지도. 아무것도 겹치는 게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이들은 같은 열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격양된 고양감이란.

현장에 있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Pathfinder 굿즈를 들고 목이 나가라 소리를 질러도, 너무 좋아서 울먹거려도 이곳에서만큼은 그저 풍경에 일부가 될 뿐이었다.

번쩍!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초저녁의 하늘을 먹어 치울 듯이 번지는 빛의 잔상은, 취재를 위해 나온 기자들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이 순간을 기록해야겠다는 본능 아래서 사람들은 핸드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

도현은 붉은 게 카펫인지 튀어나오려는 제 심장인지 분간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렌즈가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시야에 빛과 함성이 엉겨들었다.

아,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는 열기 속에서 도현은 압도되고 말았다. 한껏 예민해진 감각이 제6의 신경계를 두드렸다. 펜스에 몰려든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가, 그 자리에 가지각색의 빛 뭉치가 떠올랐다가, 다시금 붉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뺨이 보였다.

현실이 일그러지고 너머의 세계가 비쳤다. 그러다 다시금 번쩍이는 플래시가 도현을 현실 세계로 끌어 내렸다.

어지러워.

방금까지 붉은 카펫을 밟고 서 있었던 거 같은데, 순간적으로 감각이 붕 떠올랐다. 카펫을 걷는 게 아니라 구름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차오르는 몽롱함 속에서 도현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걸 인지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다른 감각이 트인 건 처음이라서….

까득, 입 안의 살을 깨물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붕 떠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하늘을 유영하는 꿈을 꾸었다가 깬 어린아이처럼, 도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그를 쳐다보고 있는 신시아와 헤레이즈가 눈에 들어왔다. 미약한 걱정과 의문이 떠오른 얼굴에, 도현은 자신이 가만히 서 있었단 걸 깨달았다.

“…아.”

이상하게 비쳤을 거란 생각에 닿자, 도현은 빠르게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발을 뗀 건 동시였다.

소녀의 눈동자가 댕그랗게 뜨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왕방울만 한 눈이 쏟아져 내릴 거 같았다. 도현은 소녀와 시선을 맞췄다.

“이름이 뭐야?”

“타, 타티.”

“타티?”

“타티아나….”

“타티아나구나. 이름 예쁘다.”

단정한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생기가 도는 입술에서는 다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까 르루라 하던데, 르옌 부른 거 맞지? 그 공책 사인 받으려고 가져온 거면 잠깐만 빌려줘.”

발음이 안 되는지, ‘르루! 르루!’ 하고 외쳐대던 소녀였다. 처음에는 흠칫 떨던 소녀가 곧 볼이 상기된 채로 공책을 불쑥 내밀었다.

도현은 소녀가 내민 공책에 유려하게 사인을 하고 ‘너의 르루가, 타티아나에게’라는 문장까지 추가했다. 공책을 돌려받은 소녀가 기쁜지 꺄악, 하는 소리를 내었다.

도현이 허리를 들자, 옆에 다가온 헤레이즈가 너도 참 대단하다는 듯, 질린 투로 말했다.

“이 소란 속에서 그게 들려?”

그는 도현이 소리의 진원지를 찾느라 멈춰 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확히 원하던 반응이라서 도현은 기껍게 웃었다.

“물론 들리지.”

“하여튼 신기한 놈….”

그리 대꾸한 헤레이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인해주는 걸 보니까 그도 하고 싶어져서였다. 아직 이런 일에 낯선 헤레이즈에겐 나름대로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하늘이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는지, 헤레이즈는 사인해 달라며 외치는 팬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긴장으로 곱아드는 손을 펴내며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심코 주변을 훑은 청회색 눈동자가 멈칫했다. 한 남성이 겉에 걸친 남방을 벗는 광경이었는데, 이윽고 드러난 것에 제 시력을 의심하듯이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에 물든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일직선으로 직진하던 발이 주춤대다가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헤레이즈는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뇌리에 꽂히듯이 들이닥친 직감을.

매끄러운 구두의 밑창이 카펫 위를 빗겨 갔다. 미끄러지는 찰나의 순간. 헤레이즈는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놀란 팬의 얼굴과 면적을 넓혀가는 하늘,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프레임 단위로 시야에 박혔다.

조졌다.

그 생각만이 가득 차올랐다. 물론 조진 건 헤레이즈의 인생이었다. 이대로 넘어지는 건가? 정말? 첫 시사회를 뒤로 넘어지는 걸로 장식한다고? 진짜로?

참담한 미래에 두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팔을 부드럽게 잡아끄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어서 어깨가 누군가의 몸통에 닿았다. 헤레이즈가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대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퍼뜩 몸을 바로 세웠다.

“괜찮아?”

“…어, 어.”

너무 놀라서인지 말이 잘 안 나왔다. 그는 사방에서 터져 나온 괜찮냐는 질문에 간신히 정신 줄을 잡았다. 헤레이즈는 물 밖에 나온 사람처럼 숨을 토해냈다.

인생 끝나는 줄 알았네.

“야, 잡아줘서 고마….”

지금만큼은 업어줄 수도 있는 상대를 향해 진심이 한가득 담긴 감사 인사를 꺼내던 헤레이즈가 말을 멈췄다. 그가 넘어질 뻔했던 이유가 뒤늦게 떠오른 탓이었다.

“야, 그, 너….”

그가 고장 난 기계처럼 버벅거리자, 상태를 살피듯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소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헤레이즈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반사적으로 원인이 있는 쪽을 흘깃거렸다.

그건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검은 눈동자가 헤레이즈의 시선을 따라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헤레이즈가 다급히 도현의 팔을 잡았을 땐, 이미 도현이 그것을 발견한 후였다.

헤레이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망했다.

왜 꼭 오늘 같은 날 이런 일만 생기는 건지 모르겠으나, 망한 게 분명했다. 도현의 시선 끝에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어디서나 보일 법한 평범한 백인 남성은 형광 노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고.

Leyen ≠ monkey!

그의 옷에는 붉은색 글씨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헤레이즈는 가장 최악인 게 넘어질 뻔한 건지, 아니면 이도현이 저걸 발견한 건지 고를 수가 없었다.

뭐든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는 속이 울컥 차오르는 걸 느꼈다. 왜. 왜 꼭 이런 날에. 대체 왜? 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뭐가 그렇게 미워서 가만 놔두질 못하는 건데?

헤레이즈는 묻고 싶었다. 당신의 눈에는 저 애가 십 대의 소년이란 게 보이지 않냐고. 왜 꼭 쟤한테만 그렇게 가혹하게 굴어야 하냐고. 저 애가, 이렇게 조롱받을 정도로 무언갈 잘못했냐고.

아니었다.

헤레이즈가 아는 도현은 이런 모욕을 받을 인물이 아니었다.

부당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했다.

캐스팅이 발표되고 나서 쏟아진 비난도 무서웠다. 도현은 멀쩡한 척 굴었지만, 그 비난들은 보는 헤레이즈가 다 대인 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악질적이고, 집요했었다. 그래도 그건 직접적인 비난은 아니었다. 적어도 인터넷에서 이루어진 일이니까.

그러나 이건….

“사인해 드려야지, 헤레이즈.”

휘몰아치는 상념 사이로 조용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잔잔하게 울린 목소리는 일견 무감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

“사인하려던 거 아니었어?”

헤레이즈의 말을 끊은 건 도현이었다. 그는 매끄럽고도 단정한 낯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가 당한 모욕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무심하고 다정하게.

그게 너무 평소와 똑같아서 헤레이즈는 속이 울렁거렸다. 입 안의 살을 잘근잘근 깨문 헤레이즈가 간신히 대답했다.

“…맞아.”

“동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거야. 자, 얼른. 우리 보러 와주신 분들이잖아.”

“넌?”

“나도 해야지.”

그 말을 지키듯, 도현은 발걸음을 뗐다. 그걸 멍하니 지켜볼 때였다. 헤레이즈를 스쳐 지나간 도현이 그에게만 들릴 한마디를 남겼다.

헤레이즈는 잠시 그 문장을 곱씹었다.

‘걱정하지 마.’

…미친놈.

청회색 눈동자에, 기쁜 얼굴로 웃으며 팬들의 요구에 어울리는 소년이 비쳤다. 핸드폰을 건네받아 함께 사진을 찍는 얼굴이 지극히 밝았다.

진짜, 미친놈. 속으로 중얼거린 헤레이즈가 발걸음을 돌렸다. 미친놈이 시사회를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 저러고 있는데, 그가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플래시의 빛이 그가 지나간 자리를 희게 물들였다.

* * *

“가지 마!”

“르옌! 르옌 누바라!”

도현은 애타게 부르짖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도 조금 더 호응해주고 싶었으나, 그러다가는 상영이 끝날 때까지 못 갈지도 몰랐다.

“가자.”

“응.”

도현은 어느새 양옆에 붙어선 두 사람과 함께 컨벤션 센터 내부로 들어갔다. 미리 정해진 동선에 따르면, 안에 설치된 포토월에서 공식적인 포토타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프레스 콘퍼런스 룸은 다른 입구 쪽에서 들어가야 해서 몰랐는데, 건물 내부가 온통 푸른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뿐일까. 신성한 나무 내부를 재연한 건지 초록색 덩굴이 벽을 휘감고 있었다.

신시아는 연신 감탄을 터트렸지만, 헤레이즈는 묘하게 조용했다. 그러나 그는 포토월에 섰을 때, 평소의 낯으로 돌아와 유려하게 미소 지었다. 기자들이 바라던 바로 그 미소였다.

그들이 포토월에서 사진을 찍은 후. 많은 스타가 그 포토월을 거쳐 갔다. 의 출연 배우인 레비 올란도는 물론, 정령 역할의 배우, 지프 워너는 그의 연인인 바네사 킨슬리와 함께 등장해 투 숏을 남겼다.

그렇게 깜짝 등장한 건 바네사 킨슬리뿐만이 아니었다. 영화 개봉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스타가 포토월 앞에 섰다.

대표적으로 톱가수 델라 허진스, 래퍼 댄 KJ, 농구 선수 닉 톰슨 등등…. 특히 닉 톰슨은 원작의 열렬한 팬인 자녀를 데리고 와 눈길을 끌었는데, 그의 딸이 이그린으로 추정되는 코스프레를 하고 와 이목을 샀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스타가 자녀를 동반해 볼거리를 연출했다. 그런 스타들의 행진은 가 갖는 입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고,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기사에 인터넷은 후끈 달아올랐다.

레드 카펫과 포토타임이 끝나고.

본격적인 시사회를 위해 사람들은 극장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은 각각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도현은 관계자를 위해 마련된 구역에 착석했다.

소란스러운 극장 안에서, 도현은 옆자리에 앉은 소년을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이가 고개를 돌렸다. 청회색 눈동자와 검은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어디 안 좋아?”

“…하아.”

헤레이즈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려다가, 공들여 세팅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간신히 멈췄다. 그는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안 좋냐고? 내가 안 좋을 게 어딨어.”

까칠한 목소리는 미묘하게 격양되어 있었는데, 그 분노의 방향은 막연했다. 어쩌면 속상해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 그게 당연하겠지. 도현의 검은 눈이 무심히 감겼다 뜨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언뜻 냉정히 빛났다.

“분명 놀라긴 했지만… 예상한 일이잖아.”

“그렇지만!”

“헤레이즈,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건.”

그때. 관객 착석이 거의 끝나가자 안내 방송이 울렸다. 자연히 도현의 말도 끊겼다. 조급한 기색 없이 방송이 끝나길 기다리던 도현은, 멘트가 끝나고 극장의 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에 우스워질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들일 테니까.”

예언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오래된 마녀의 주문 같기도, 신전에 몸담은 이의 깨달음 같기도 했으며. 어떤 역경이 와도 이겨내는 영웅의 다짐 같기도 했다.

그렇게.

극장의 불이 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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