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83화 (384/582)

제383화. Pathfinder : The Frozen Forest (1)

나무 위에 새 한 마리가 보였다.

주변을 살피던 새는 이윽고 광활한 하늘을 날았다. 화면이 새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공 아래 펼쳐진 것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이었다.

숲 위를 한 바퀴 돈 새가 활강했다. 새가 지나간 궤적을 따라 풀잎이 너풀대며, 꽃 위를 유영하던 흰 나비가 날아올랐다. 파삭, 동시에 꽃이 무언가에 짓밟혔다.

검은 형체는 숲을 빠르게 내달렸다. 그 속도에 맞춰 늘어진 나무와 풀숲이 화면을 스쳐 지나갔다.

휙휙 정신없이 지나가는 장면이 멈춘 건, 탁 트인 절벽이 화면에 가득 펼쳐졌을 때였다.

보기만 해도 아득해지는 높이의 절벽이었다. 소년은 겁도 없이 절벽 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몇 걸음을 남겨두고 멈춰선 순간.

“아서, 이 망아지 같은 놈아!”

수풀이 흔들리며 곰같이 거대한 덩치의 남성이 불쑥 나타났다. 숨이 찬지, 무릎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이가 험상궂은 얼굴을 구겼다.

“절벽은 위험하다니까!”

그 타박에도 절벽 너머에 고정된 시선은 미동이 없다.

“롤랑.”

수선화를 닮은 머리카락이 공중에 나부꼈다. 훤히 드러난 이마 아래, 신비로운 청회안이 호수 표면의 윤슬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숲이 전보다 더 얼었어.”

화악- 거센 돌풍이 불었다.

화면이 깎아지른 듯 험준한 절벽 아래를 비췄다. 울창하게 늘어선 초목이 햇살을 조각내며 산산이 빛나고 있었다. 초록이 너울대는 숲을 지나 호수를 향해 화면이 천천히 이동했다.

처음에는 눈송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작은 얼룩이었다. 그것은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면적을 넓혀, 호숫가에 다다라서는 주위를 온통 순백하게 물들였다.

창백한 평온이 내려앉은 호숫가는 고요했다.

그리하여, 기묘하리만치.

“-아, 알았다니까.”

아서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롤랑은 잔소리가 너무 많아.”

어떻게 돌아오는 길 내내, 한시도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서가 괴로워하자 롤랑이 코웃음쳤다.

“네가 천방지축인 거겠지.”

“또 싸웠어?”

롤랑이 혀를 차며 통나무집 문을 열자, 고기 수프가 가득 든 냄비를 탁상에 옮기던 욘다드가 무심한 투로 물었다. 고소한 향이 집 안에 가득 퍼졌다.

“안 싸웠어!”

그리 대답한 아서가 잽싸게 주방으로 달려가 그릇과 수저를 가져왔다. 다 죽어가던 얼굴은 어디 가고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에 롤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와.”

제 그릇에 한가득 담기는 고깃덩이에 아서의 표정이 헤벌쭉해졌다. 아서가 막 신난 얼굴로 수저를 들어 올릴 때였다.

“내일은 산에 갈 거다.”

욘다드가 꺼낸 말에 아서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사냥하려고?”

“고기가 떨어졌어.”

투박한 대답에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자기 전에 화살촉을 갈아야겠다. 덫도 고장이 안 났는지 확인하고…. 아, 아나트 아주머니네에서 튼튼한 가죽 천도 빌려와야지.

계획을 세우면서도 먹을 것은 포기할 수 없는지, 아서가 무식하게 고기를 욱여넣으며 중얼거리자, 욘다드가 무뚝뚝한 얼굴로 물잔을 밀어주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긴.

오늘도 아서가 절벽에 갔단 소리에 내내 안절부절못했으면서 아닌 척하는 남자가 웃겨서, 롤랑은 별안간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우렁찬 소리에 탁자가 흔들리자 아서가 기겁하며 그릇을 붙잡았다.

“흘릴 뻔했잖아!”

타박 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투닥거림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저녁의 노을이 세 사람의 얼굴을 붉게 적셨다.

* * *

수풀 뒤편에 몸을 구기고 앉은 두 인형이 한곳을 응시했다. 커다란 몸을 숨기겠다고 쪼그린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두 사람은 마냥 진지했다.

그때, 풀숲에서 토끼 한 마리가 나왔다. 귀를 쫑긋거리던 토끼는 맛있는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씰룩이며 허리를 곧추세웠는데.

탓!

“잡았다!”

그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덫에 걸린 토끼를 손에 든 아서가 능숙한 손길로 토끼의 목을 비틀었다. 죽은 토끼를 받아든 욘다드가 묵묵히 가죽 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

“덫은 왜 집어넣어?”

“이제 돌아갈 거야.”

하늘을 올려다본 아서가 의아한 투로 말했다.

“왜? 아직 밝은데….”

“숲의 주인이 활동하는 시간이니까. 서둘러. 곧 있으면 위험해진다.”

“몇 마리만 더 잡으면… 아, 알았어. 갈게. 간다고.”

입맛을 다시던 아서가 설치해두었던 함정을 회수했다. 숲에 그대로 놔두면 다른 사냥꾼들이나 길을 잘못 든 부족 아이들이 다칠지도 몰랐다. 나무 아래에 두었던 마지막 함정을 해제할 때였다.

“어!”

아서의 눈이 커졌다.

“욘다드! 저기 노루! 노루야!”

소년이 다급하게 등에 멘 활을 꺼냈다. 노루를 조준했지만, 너무 성급하게 쏜 탓인지 다리를 빗맞혔다. 짧게 탄식한 아서가 활을 다시 등에 멨다.

“아서!”

“잠깐만 기다려! 다리를 다쳤으니까 멀리 못 갈 거야. 잡아 올게!”

“아서! 기다려! 아서 우더!”

이미 노루에게 온 신경이 집중된 아서의 귀에는 욘다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욘다드는 숲속에 뛰어든 아서를 보다가, 황급히 남은 것들을 정리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지칠 줄 모르고 노루의 뒤를 쫓던 아서는 노루가 나무 앞에 멈춰 서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동안 요리조리 잘 도망 다니더니, 결국엔 지친 모양이었다.

“미안.”

붉은 피를 흘리며 절뚝대는 노루에, 작게 중얼거린 아서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뒤늦게 도착한 욘다드가 아서를 부르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서가 한 발짝을 뗐을 때였다.

- 쿵

땅이 울렸다.

아서와 욘다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이 천천히 한곳을 응시했다. 화면이 두 사람의 시야처럼 깊은 숲속을 보여주었다.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그곳을 응시했다.

- 쿵

나무가 흔들리며 새들이 날아올랐다. 이윽고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쿠워어어!

거대한 곰이었다.

아서가 노리던 사냥감이 곰의 거대한 앞발에 맞고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욘다드의 다급한 외침이 아서의 정신을 깨웠다.

“도망쳐!”

발이 움직인 건 본능이었다. 아서는 무작정 뛰었다. 수풀을 뛰어넘고, 나무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 뒤를 거대한 곰이 따라붙었다.

거대한 몸체에 산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렸다. 그 충격에 아서가 비틀거리다가 바로 섰다. 급박한 추격전에 박진감 넘치는 배경 음악이 더해지자,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화면에 집중했다.

“뛰어, 더 뛰어!”

욘다드의 외침에 아서가 이를 악물었다. 욘다드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욕심을 부린 결과는 너무 혹독했다. 아서의 눈에 후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아서가 발을 박찼다. 뒤에서 나무가 쓰러지며 굉음을 내었지만, 돌아볼 정신이 없었다. 얼굴에 잔가지가 스치며 생채기를 만들어냈다.

그때였다.

“으윽!”

땅 위로 솟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린 아서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바닥을 여러 번 굴렀다. 온몸이 쓸리며 피가 배어 나왔다.

그리고.

콰앙!

관객들이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간신히 곰의 앞발을 피한 아서가 옆으로 굴렀다. 욘다드가 경악하며 아서를 불렀다. 아서는 그 부름에 대답할 수 없었다. 곰이 또다시 거대한 발을 휘두른 것이다.

푸욱!

방금까지 아서가 있던 땅이 깊게 파였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저게 제 모습이었을 거란 생각에 아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러나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계속해서 공격을 아슬하게 피해내자, 숲의 포식자가 분노하며 크게 포효했기 때문이었다.

곰이 아서에게 돌진했다.

아서는 거대한 나무뿌리 밑으로 미끄러지며 공격을 피했다. 뿌리에 막힌 곰이 포효를 내질렀다. 아서는 잠깐 뒤를 돌아, 이쪽으로 달려오는 욘다드를 향해 외쳤다.

“오지 마! 먼저 내려가 있어!”

더 말하고 싶었지만, 뿌리에 몸을 들이박는 곰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나무뿌리가 무식한 힘을 못 이겨 들썩거리고 있었다. 아서는 후, 숨을 내쉬곤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나도 곧 내려갈 테니까!”

그게 마지막 여유였다. 기어이 천천히 들리는 뿌리에 아서는 다시금 달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 안 돼! 거기는…!”

욘다드의 목소리가 폭음과 포효에 묻혀, 아서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청회안이 암담한 빛을 띄웠다.

표정은 낯설 만큼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아서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익숙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절벽으로 가는 길을.

그러나 방향을 틀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저 두툼한 앞발에 맞아 수프처럼 물렁해질 테니까.

타닥, 탁.

발걸음 소리가 느려지다가 끊겼다. 아득한 절벽 앞에 멈춰 선 아서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냥감 모는 데 성공한 곰이 네발로 걸어 나왔다.

욘다드는 무사히 내려갔을까.

한 걸음씩 더 물러서며 아서는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기에 있는 게 욘다드가 아니라서. 너는 너무 속이 좋다고 하던 롤랑의 말처럼, 이 상황에서조차 한 가지 긍정적인 사실을 찾아낸 아서가 희게 질린 낯으로 픽 웃었다.

투둑. 돌조각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서는 추락까지 한 발자국 남았음을 깨달았다.

앞은 잔뜩 분노한 곰.

뒤는 아득한 절벽.

참 멋진 선택지였다. 뭘 골라도 환장할 것 같다는 점이 그랬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아서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저건 아니지. 떨어졌다가는 뼛조각도 못 찾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서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어 앞을 향해 겨누었다. 거대한 곰에 비하면 너무 작고 초라했지만, 아서는 절망하지 않았다. 아직 그는 살아 있으니까.

한 번만. 한 번만 피한다면 곰을 절벽 아래로 떨어트릴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아서는 언제나 그렇듯 길을 찾아내어,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아서가 몰랐던 것은.

“아서 우더!”

누군가 또한 그만의 길이 있으며, 그것이 때론 아서가 정한 길과 상충하여 끔찍한 불협화음을 낸다는 것이었다.

* * *

관객석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소설의 열렬한 팬인 딸을 위해 시사회에 참석했던 닉 톰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아이를 위한 영화라고?’

딸에게 책을 읽어준 이는 다정한 아내였기에 그는 영화의 내용 자체를 몰랐다. 애초에 이런 아동용 소설을 읽는 건 동료들의 조롱거리가 될뿐더러, 그의 취향도 아니었다.

그랬던 닉 톰슨은 지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남성은 곰의 공격을 몸으로 막았다. 피가 튀고 땅이 붉게 젖어 들었다.

풀썩.

커다란 등이 쓰러졌다. 아서는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망막에 붉은 광경이 화인처럼 뜨겁게 새겨졌다.

그 순간 아서는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심장에서 뻗어 나온 열기는 온몸을 타고 흘러, 이내 손바닥으로 집중되었다. 상상을 넘어선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비명을 내뱉었다.

세상을 뒤덮을 듯 찬란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스크린이 빛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빛이 사그라들고, 다시금 세상이 색을 되찾았을 때.

쿠웅-.

거대한 곰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세계를 잡아먹을 듯 퍼져나갔던 빛은 사그라들어, 도로 손바닥으로 흡수되었다. 아서는 멍한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떨리는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에 젖은 손이 보였다.

“욘다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단어를 만들어냈다.

“욘다드.”

미약한 음성이 흩어졌다. 욘다드는 꼭,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아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빠.”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주구장창 이름만 불러대던 아들의 부름이 닿은 걸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백하던 아서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욘다드? 정신 차린 거야?”

“아서.”

흐릿하게 뜨인 눈은 꺼져가는 이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아서는 그것을 모른 척했다.

“욘다드. 걱정하지 마. 내가 업고 내려갈게. 치료사한테 보이면 금방 나을 거야. 밥도 내가 할게. 욘다드는 그냥, 그냥 나을 때까지 쉬면….”

“아서.”

재차 부르는 목소리에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무뚝뚝하지만, 실은 다정했던 목소리가 너무나 미약한 힘만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서. 잘 들어라.”

“내려가서 이야기해. 치료부터 하고….”

“그건, 그 힘은 축복이야.”

아서가 이를 악다물자, 목에 핏대가 섰다.

“웃기지 마. 축복이라면, 욘다드가 다치기 전에 나왔어야지. 그런 건 필요 없어. …욘다드!”

피를 토해낸 남성에 아서가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욘다드는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게 반응의 전부였다. 그는 그저 그래야 한다는 듯이, 느릿하게 말했다.

“의심하지 말아. 아서. 너는 옳은 길을 찾아갈 거다. 늘 그랬어. 너는 무성한 숲속에서도 길을 잃은 적이 없었지.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서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욘다드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어린 아들의 낯을 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이 일그러진 낯이 꼭 어렸을 적을 떠올리게 했다.

“내 아들, 아서….”

욘다드의 목소리가 느려지다가 이내 멎었다.

쿵.

아서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아서의 두 뺨이, 목울대가, 어깨와 팔이,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빠….”

서투른 몸짓으로 가슴에 귀를 가져대 댔지만, 식은 육체가 다시 뛰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아서는 한참이나 귀를 기울였다. 죽은 이의 위에 밤의 이불이 덮이고, 오지 않는 이를 찾아 롤랑이 그를 발견할 때까지.

그날.

아서는 가장 큰 축복을 잃었다.

* * *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울리고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겼다. 바구니를 품 안 가득 든 여성이 화면 앞을 지나쳐갔다. 바쁘지만, 얼굴엔 즐거운 미소가 가득했다.

우더 족은 최근 몇 년 중 가장 활기에 차 있었다. 오늘이 바로, 몇십 년 만에 나타난 부족의 길잡이를 축복하는 날이자 그 힘을 증명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화면은 마을의 활기찬 모습을 비추다가, 안쪽으로 이동했다. 길목을 따라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은 소담한 신전이었다. 신전 앞에는 풀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신전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커지며, 신전 내부가 보였다.

“이얏, 난 길잡이다!”

“아니야! 내가 길잡이야!”

얼굴에 축복의 문양을 그려 넣은 소년 소녀들이 신전의 단상에 꽂힌 검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쳐댔다. 그런 아이들을 말려야 할 어른들은 잔칫상 준비에 여념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장난이었다.

“어허! 이놈들!”

“으악!”

“악! 악당이다!”

험상궂은 낯의 어른이 등장하자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신전 안에 아이들이 남기고 간 웃음소리가 흐릿하게 남아 맴돌았다.

롤랑이 앓는 소리를 냈다.

“저 녀석들이….”

“아이들이잖니.”

“그래도 그렇죠. 성물을 가지고 장난치다니요.”

아이들이 잡아당기고 놀던 검은, 오래전 우더 족을 영광으로 이끌었던 길잡이가 썼던 검이었다. 그의 힘이 깃들어 있어 오직 길잡이의 힘을 지닌 자만 뽑을 수 있었다.

롤랑의 항의에 노파, 실레가 홀홀 웃었다.

“저 아이들도 기뻐서 그런 게지. 아는 거란다. 우리 부족에 새로운 별이 떴음을.”

그녀는 우더 족의 존경받는 제사장이자, 가장 지혜로운 가지였다. 현기 어린 말에 롤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 무식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롤랑, 너는 우리 부족의 가장 단단한 가지이니, 무식한 게 아니라 굳건한 거란다. 그나저나 아서는.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그게….”

“설마, 또 그 애가….”

롤랑이 대답하지 못하자 실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흰 안개가 낀 현숙한 눈동자에 염려와 안타까움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다고 해결될 슬픔이 아니거늘.”

그들의 대화에 관객들이 의문을 품을 때였다. 그 의문을 풀어주듯 화면이 바뀌었다. 바뀐 화면에 한가득 들어찬 건 수풀이었다. 수풀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단검으로 덩굴을 잘라냈다.

이윽고 나타난 이는 아서 우더였다.

관객들은 탄식했다.

수풀 사이에서 드러난 그 어린 낯이, 며칠 사이에 굉장히 건조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활기와 번뜩이는 총기는 사라지고, 두 눈은 어떠한 집념으로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찾아야 해.

아서가 중얼거렸다.

툭.

아서의 손에 의해 무참히 잘려 나간 수풀이 다시금 바닥에 떨어졌다. 무심한 발걸음이 그것을 짓밟고 지나갔다.

아서는 확연히, 망가져 있었다.

* * *

마을이 저녁노을에 물들었다.

신전 앞에 모인 부족민들은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롤랑은 나타나지 않는 아서에,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실레의 근심 어린 눈이 산 쪽을 향했다.

“올 겁니다.”

롤랑이 단단하게 말했다.

“그 애는, 아서는, 올 겁니다.”

다짐인지 믿음인지 모를 목소리였다. 실레는 그 말에 별다른 첨언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 * *

파삭. 수풀을 쳐내던 아서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그 앞에는 거대한 동굴이 있었다. 아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야.

여기에 네 원수가 있어.

쿵, 쿵 뛰는 아서의 심장 소리가 관객에게 전해졌다. 아서는 홀린 듯이 동굴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아래로 처진 손에는 단검이 늘어져 있었다.

깊숙이 들어가자, 피비린내와 함께 무언가의 그륵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서의 얼굴이 환희에 차올랐다.

화면이 천천히, 동굴 속 풍경을 비추었다. 관객들은 아서가 찾아 헤매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곰이었다.

그날 입었던 부상이 치명적이었는지, 동굴 구석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곰이었다.

곰은 그때의 포악한 기세를 잃은 채였다. 아서를 발견했음에도 그 자리에서 노려보는 게 전부였다.

아서는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널 찾았어.”

단검을 쥔 손목에 핏줄이 솟았다.

“내 손으로 죽이고 싶어서, 널 찾았어.”

칼날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희게 웃던 아서는 이윽고, 거대한 곰 뒤편에 있는 무언갈 발견하고 낯빛을 굳혔다.

꾸물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린 새끼였다.

아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 *

화르륵- 횃대에 불이 붙었다.

불을 붙인 부족민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밤에 물든 신전의 풍경이 보였다. 일렬로 나열된 횃대 한가운데, 높게 쌓아 올린 나무 장작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 주변을 빙빙 돌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문양을 그려 넣은 얼굴 위에 불빛이 너울거렸다. 그러나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마을 사람 사이에 서 있던 아나트가 탄식했다. 얼굴에는 걱정과 후회가 가득했다. 그 애를 조금 더 돌봐줄걸. 이처럼, 이렇게까지 무너질 줄 알았더라면….

그때였다.

저벅, 저벅.

누군가 횃대 사이를 걸었다. 옅은 금발이 불빛에 물들어 주홍빛으로 빛났다. 사람들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쳐가는 얼굴을 발견한 아나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서…!”

“아서다!”

“아서 우더가 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이들의 환호성에 묻혔다. 제각기 불안에 휩싸여 있던 이들이 주인공의 등장에 안도와 탄식을 내뱉었다. 여기저기서 아서 우더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그 소란에도 아서는 오직 단상만을 응시했다.

단상에 박힌 검만을.

아서가 단상 앞에 멈춰 서자, 그 옆에 서 있었던 실레가 아서를 경이로운 무언가를 보듯이 쳐다보았다. 그 희뿌연 눈에 언뜻 빛이 비친 것도 같았다. 롤랑이 아서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실레의 저지를 받고 물러섰다.

아서가 단상에 올라갔다.

소란이 멎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문 부족민들이 그 풍경을 부릅뜬 눈으로 보았다. 그들의 낯에는 기대와 불안이 어지러이 얽혀 있었다.

과연, 저 검이 뽑힐까. 그 모든 감정이 아서의 어깨 위로 얹혔다. 아나트가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간절히 빌었다.

아서가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손과 검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빛은 검신을 타고 흘러 내려가, 검신에 새겨진 문양대로 빛났다.

그리하여, 소년의 손 아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성물이 백 년 만에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내었고.

찌를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더 족의 아이들은 모두 검에 얽힌 전설을 들으며 자란다. 나중에 저 검을 쥐고 앞장서는 길잡이가 되기를 꿈꾸며, 커간다. 삶이 쌓일수록 어릴 적 꿈은 하나둘씩 내려놓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추억이었다.

아서! 아서! 아서!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외치는 이름은 사람을 전율하게 할 만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아서는 그저 가만히 황금빛 광휘를 두른 검을 볼 뿐이었다.

“아서.”

롤랑이 아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서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환호하는 이들을 눈에 담았다. 어떤 뜨거운 열기가, 갈망이 그들을 부추기고 있었고, 그것은 한데 섞이고 뭉쳐 공기마저 뜨겁게 달구었다.

아서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 힘이 정말 길잡이의 힘이라면.”

운을 뗀 아서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푸르스름한 어둠과 붉은 불빛이 어지러이 섞이는 풍경 속에서, 청회안이 맹금류의 것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려주겠지.”

조용한 음색은 단조로웠다.

하지만 롤랑은 보았다. 아서의 눈가에 맺힌 붉은 기운을. 얼마나 운 건지 까지기 직전이 되어 불긋한 눈가를 보다가, 불현듯이 깨달았다.

소년이 더는 산을 헤매고 다니지 않으리란 걸. 길을 잃었던 어린 별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걸. 롤랑은 속에서부터 들끓는 전율을 느끼며, 목에 힘을 주었다.

“너라면, 찾아낼 거다.”

“그래.”

간결하게 답한 아서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푸르스름한 하늘 위로 찬란한 황금빛이 타올랐다.

함성과 북소리가 섞여 심장을 거칠게 두들겼다. 그 모든 것이, 마치 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아서 관객들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이윽고 그날, 짙게 드리운 어둠 속에서도 붉은빛이 타오르던 어느 저녁에. 너무도 미약하여 흔들리고, 때론 길을 잃고 방황하지만, 결국엔 다시금 떠올라 빛나는 어느 한 소년이,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졌다.

영원히 지지 않고 어둠을 비출 별처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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