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85화 (386/582)

제385화. Pathfinder : The Frozen Forest (3)

이그린은 이미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였다. 눈 아래 숨겨져 있던 돌부리에 찍히고 긁힌 맨발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소녀가 밟고 선 눈이 조금씩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쏠까?”

“잘 쏘지도 못하면서 나서긴.”

“야, 아깐 실수한 거고!”

소녀는 그저 저들의 장난감이었다. 장난치듯 몰이하여, 오락처럼 목숨을 빼앗는.

이그린의 올리브색 눈동자에 참담함이 떠오른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그린도, 그녀를 쫓던 네 명의 소년들도 얼빠진 낯으로 갑자기 등장한 이를 쳐다보았다. 콰앙-! 집중된 시선 속에서 아서가 거대한 대검을 바닥에 꽂았다.

“술래잡기 중에 미안하지만, 여긴 내가 먼저 왔거든.”

“나무엔 관심 없어. 뒤에 있는 것만 넘겨주면 되는데… 그럴 생각이 없는 거 같네?”

소년이 뱀 같은 동공을 세로로 좁히자, 아서는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호숫가에서 아서를 경멸했던 그 소년이었다.

소년, 호르헤가 비소했다.

“싸우려고? 여긴 네 명인데.”

“그러니까 한 명보단 두 명이 낫겠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아서가 바닥에 꽂은 검을 뽑아내었다. 그리고 호르헤를 쳐다보며 휙 대검을 털어냈다.

검신에 음각된 문양대로 화르륵 타오른 불길이 아서가 그은 검로를 따라 황금빛 불꽃을 쏟아냈다. 금색의 불길은 흐드러지는 노란 꽃처럼 눈밭에 내려앉아 언 땅을 녹였다.

불길은 호르헤의 발끝을 살짝 태우고 멈추었다. 까맣게 그을음이 남은 신발에 호르헤의 낯빛이 처음으로 변했다.

말하자면, 아서의 힘은 아니었다.

전대 길잡이가 남긴 검에 담긴 힘이었으나, 그걸 이들이 알 리가 있나. 그들은 아서가 이미 길잡이의 힘을 다룰 줄 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소년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킬킬대던 얼굴에 경계가 떠올랐다. 그들은 아서를 온전한 ‘강자’로 인식한 거 같았다.

한계까지 팽창한 풍선처럼 긴장된 분위기에, 관객들이 시한폭탄을 보는 기분으로 화면에 집중할 때였다.

“됐어, 다른 사냥감을 찾자.”

그 풍선을 맥없이 터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발언에 다른 이들이 놀라 항변했다.

“뭐? 호르헤! 겨우 둘이잖아!”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쏟아지는 반발에 가는 동공이 샐쭉해졌다. 아, 역시 멍청하고 쓸모없다. 르옌 님을 어서 만나야 할 텐데…. 그의 주인을 떠올리자 차오르는 흥분에 입맛을 다신 호르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사냥은 놀이일 뿐이니까, 귀찮아지는 건 사양이야. 뭐, 싸울 거면 싸우든가. 난 간다.”

그러면서 미련 없이 뒤돈다.

“호, 호르헤!”

남은 아이들이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그 뒤를 따랐다. 긴장감 있는 대치에 비해 맥 빠지는 결말이었다.

그들이 멀어지자, 내심 긴장하고 있던 아서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한숨과 함께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아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소녀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한 귀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쫑긋거렸다.

아서가 거기에 시선이 팔렸을 때.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었어.”

감사 인사는 고사하고, 매정하게도 말한 소녀가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뒤를 돌았다. 떠나려는 모양새에 아서가 다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왜?”

이그린이 불편한 표정을 숨겼다.

도와준 것이 고마운 것과 별개로, 경쟁자에게 빚을 지는 건 사양이었다. 그녀는 제 한 몸 건사하는 것도 힘드니까. 그래서 소년이 무언갈 요구하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었다.

“너 별의 조각이 뭔지 알아?”

“아니. 나도 몰라.”

“그럼 같이 찾는 건 어때?”

“뭐?”

뭘 믿고 같이하자는 건지. 그녀가 방금까지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건 맞지만, 그게 선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더 약했을 뿐. 그런데 눈앞의 소년은 멍청한 말을 늘어놓았다.

“아까처럼 공격받을 때도 혼자보단 둘이 좀 더 나을 테고… 그리고 별의 조각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아. 같은 편이 있으면 좋지.”

약간의 호기심과 호의.

그것이 떠오른 소년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소녀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다가.

슬슬 침묵이 길어질 때 즈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 *

“됐다.”

숲은 모든 게 얼어서 불을 피울 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문제는 이그린이 주머니에서 나뭇가지를 꺼내면서 해결되었다. 왜 주머니에 나뭇가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추위 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두 아이는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았다. 한동안 불씨가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그 정적을 깬 건 아서였다.

“아까 그 애들은 왜 널 공격한 거야?”

“당연한 일이야.”

“그게 당연하다고?”

아서의 낯빛이 굳자, 이그린이 나뭇잎 한 개를 던져 넣었다. 매캐한 연기가 타올랐다.

“이건 경쟁이잖아. 자연에서도 경쟁자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은 흔해. 그러니까 당연하지.”

조용하고 몽롱한 목소리와 달리,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말에 아서가 흠칫했다. 그에, 나뭇잎 한 개를 더 던져 넣은 이그린은 생각했다.

‘금방 낙오되겠네.’

다시금 확신할 때였다.

“그런데.”

“응.”

“방금 넣은 나뭇잎은 뭐야?”

“레몬 유칼립투스 잎. 해충 방지용.”

“…여긴 벌레도 얼었을 텐데?”

“아.”

맹한 대답에 아서는 한숨을 삼켰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영 혼자 놔두기 불안한 애였다. 자신이 잘 챙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동상이몽이었다.

* * *

영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모닥불 앞에 앉은 아이들은 별의 조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날이 밝으면 찾기로 하고 두 아이는 잠을 청했다.

먼저 불침번을 선 건 아서였다.

대검을 껴안고 모닥불을 멍하니 쳐다보던 아서가 고개를 들었다. 별이 어느새 이동해 있었다. 아서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차례야.”

나무에 기대어 잠든 소녀를 툭툭 두들기자, 이그린이 눈을 떴다. 이그린은 담요를 걷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위치를 교대했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광경이었다.

닉 톰슨은 흐뭇한 미소를 건 채 화면을 보았다.

‘동료는 중요하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모닥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그린이 품에서 무언갈 꺼냈다. 그것을 발견한 닉 톰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무슨….’

도대체, 안심할 틈을 안 준다.

소녀의 손에 은밀하게 들린 것은, 선득하게 빛나는 단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공주님, 이그린이 최애라고 하지 않았나. 슬쩍 고개를 돌리니, 옆자리에 앉은 딸이 입을 반쯤 헤 벌리고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었다.

닉 톰슨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왜 꼭 저런…?

화면에서는, 단검을 역수로 쥔 소녀가 잠든 소년을 무감정한 낯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한 걸음 내딛자, 닉 톰슨은 이제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그러지 마.”

잠든 줄만 알았던 아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닉 톰슨의 눈에 빛이 들어온 것도 동시였다.

‘그렇지!’

살짝 헷갈리긴 했는데, 그래도 꿈과 희망이 영 없는 세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적어도 잠든 동료를 쓱싹하고 떠나버리는 전개는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가 남몰래 안도하는 사이, 아서가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그거, 집어넣지?”

“…너 안 잔 거야?”

“아니. 그냥 잠귀가 밝은 편이라.”

그 말처럼 목소리에는 졸음기가 가득했다. 졸음을 몰아내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인 아서가 이그린을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넌 날 공격하지 않을 거야.”

대책 없고, 근거도 없는 말이었다.

그 황당한 믿음에 이그린이 무어라 항변하려던 때. 아서가 느긋하고도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계속 망설였잖아.”

그 발언에 놀란 건 이그린뿐만이 아니었다. 관객들은 아서가 이그린의 배신을 미리 알고 있었단 걸 깨닫고 쭈뼛 소름이 돋았다.

‘주인공은 주인공이란 건가.’

평범해 보이면서도 언뜻 드러나는 비범함이 사람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아서의 비범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관객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너… 뭐 하는 거야?”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이그린이 물었지만.

“응? 당연히 다시 자려는 건데.”

이해할 수 없는 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넋이 나간 이그린을 놔두고 아서는 눈을 감았다. 참으로 편안한 자세로 나무에 기댄 채,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너도 괜히 힘 낭비하지 말고 쉬어. 내일은 오늘보다 더 힘들지도 몰라.”

그리고선 입을 다물었다.

십 분, 이십 분.

그로부터 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그린은 인정했다.

진짜 잠들었다.

아주 숙면을 취하시는지, 도롱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이그린은 황망함에 물든 얼굴로, 멍하니 아서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단검이 애처롭게 빛났다.

* * *

아침이 밝아도 새소리는 없었다.

여전히 춥고, 투명하고, 시린 숲이었다. 아서는 떨어진 체온에 몸을 움츠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다가 코앞에 있는 얼굴을 보고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깜짝아!”

“너 좀 이상해.”

…지금 누가 하고 싶은 말을?

아서의 얼굴에 황당함이 차올랐다. 그는 놀란 심정을 진정시키다가, 이내 이그린이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서가 환하게 웃었다.

“넌 그 이상한 애랑 동료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부정 또한 없었다.

* * *

운명이라는 것은 그랬다.

너무나 거대한 흐름 위에 놓여 있어서, 인지하지 못한 순간 찾아온다. 어느 순간 그것을 알아차리더라도 벗어날 수 없다. 결국엔 휘말리고야 마는 것이기에, 운명인 것이다.

* * *

정령의 시험을 치르는 숲은 이상한 곳이었다. 그곳은 모든 게 얼어 있었다. 나무도, 나뭇가지에 달린 잎도. 풀과 꽃, 그리고 계곡물까지. 마치 한순간 박제되어 버린 것처럼,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얼어붙은 숲은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그 탓인지 아서와 이그린은 숲을 돌아다니는 내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가져온 육포로 끼니를 때웠지만, 그것도 부족해지자 나중엔 언 열매를 따서 먹었다.

그런 그들이 심장이 뛰는 생명체를 발견할 때는, 같은 후보들과 마주치는 순간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서로를 경계하며 각자 갈 길을 가고, 정보 교환을 시도해보고, 식량을 약탈하려는 시도를 막아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서와 이그린은 같이 있는 게 익숙해져 갔다.

“여기.”

나무에서 뛰어 내린 이그린이 아서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꽁꽁 언 작은 열매였다.

콰득, 그것을 깨문 아서가 중얼거렸다.

“찾을 수는 있는 걸까.”

“글쎄.”

그들은 바위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뭔지 감도 안 잡히는 별의 조각을 찾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때였다.

“소리가 들려.”

“소리?”

난데없는 말에 아서가 의아해했다.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이그린은, 잠시 후 작게 중얼거렸다.

“물소리….”

이그린의 눈이 숲속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리고.

화면이 나무 사이를 파고들어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했다. 두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그곳에서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화면이 점점 가까워지자, 관객들이 눈을 반짝였다.

검은 옷에 뒤로 멘 활.

온통 검은 와중에 유일하게 흰빛을 머금은 은발.

르옌 누바라였다.

* * *

저벅, 저벅.

숲을 헤치며 나아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숲이건만, 소년은 길을 아는 것처럼 거침없이 걸었다.

깊이, 더 깊이 들어간 끝에.

소년의 발이 멈췄다.

“여기가 맞았군.”

커다란 동굴이었다.

그 앞에 선 소년은 곧장 동굴로 들어가지 않았다. 르옌은 가만히 서서 하늘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을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하얀 눈꺼풀에 가려지고.

소년이 있는 곳을 시작으로, 화면에 숲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 바위 옆, 수풀 속, 그리고 그 너머까지. 빠르게 이동하던 화면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되감아졌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듯 화면이 역재생되다가, 이윽고 소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을 때.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소년이 눈을 떴다.

드러난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의 조각도 없었다. 표정 없는 삭막한 낯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가, 눈앞의 동굴을 응시했다.

관객들은 깨달았다.

방금 르옌이 무엇을 했는지.

동굴 근처의 기척을 읽어낸 것이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모조리.

지금까지 봤던 후보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능력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도 무감정해 더욱 뇌리에 깊이 박혔다.

이윽고.

소년이 동굴에 삼켜졌다.

어두운 동굴 안.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 안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희미한 붉은빛이 일렁였다. 대리석 같은 뺨과 건조한 눈동자 위로 생명력을 끼얹듯 불빛이 너울거렸다.

동굴 벽을 손으로 짚고 걷던 르옌은, 어느 순간 멈춰 섰다.

피이이-

붉게 타오르는 새였다.

새의 날개는 깊은 굴속에서도 전혀 빛을 잃지 않은 채, 신비로운 광휘를 품고 붉게 타올랐다. 화르륵 타오르는 날개가 불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신비로운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던 관객들은, 이내 그 새의 발목과 날개에 두꺼운 쇠사슬이 감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컥. 철컥!

쇠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새가 몸부림쳤다. 그럴 때마다 다리와 날개가 찢어졌다. 하지만, 핏물이 떨어질 새도 없이 상처는 다시 아물었다.

검은 눈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분히 허리춤에 매단 검을 꺼내 들었다. 서늘한 쇳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가만히 있는 게 덜 아플 거야.”

조언이라도 하듯, 기복 없는 목소리로 말한 르옌이 곧장 칼을 휘둘렀다. 픽시의 날개가 베이며 일순간 불이 강하게 타올랐다. 구슬픈 울음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잠깐 주저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곧 표정을 지운 소년은 그 아래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뚝, 뚝. 회복력을 상회한 상처에, 붉은 피가 기어이 날개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려, 창백한 손바닥 위에 고였다.

이어, 그것은 놀랍게도 하나로 뭉치더니,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다시 드러난 손바닥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형체가 있었을 뿐이었다.

꽈악, 주먹을 쥐자 빛이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르옌은 차오르는 충족감에 처음으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르옌은 주저 없이 새를 등졌다.

그의 발소리와 새의 희미한 울음소리가 섞여서 들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발소리만이 들렸다.

동굴을 나오자 강한 햇빛이 얼굴에 드리웠다.

빛에 적응하듯이 가만히 서 있던 소년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빛을 흡수한 손은 평소와 똑같았다.

흰 얼굴에 다시금 권태로움이 차오른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르옌이 손을 내렸다. 흥미가 가신 무미건조한 낯빛으로, 동굴을 떠나고자 발을 뗐다.

그때였다.

아가 겁내지 말렴.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 *

그럼에도 때때로 선택의 순간은 존재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것들은 떠밀리듯 운명의 기로 앞에 서서, 선택을 종용받는다.

그렇게 그들은 운명의 주인이 되거나, 혹은 노예가 되어.

* * *

노랫소리를 따라간 르옌이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앞을 막아선 덩굴을 치워내자, 그의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길게 늘어트린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인다. 높은 나무 위에 걸터앉은 소녀가 발을 흔들었다. 낡은 가죽신이 그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어둠은 달님이 지켜주고

길은 별님이 밝혀주니

흥얼거리는 소리가 공중에 떠오르지 못하고 가라앉아,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다가, 나무 아래에 선 소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가, 밤은 너를 사랑한단다

* * *

이윽고, 주어진 운명을 맞이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