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86화 (387/582)

제386화. Pathfinder : The Frozen Forest (4)

그 모습은 마치 수채화로 그려낸 동화 속 풍경 같았다.

정말 동화였다면, 새와 초목, 그리고 바람의 소리가 들렸겠지만. 창백한 숲에서 색채를 지닌 건 고요한 노을뿐이다.

그때, 르옌이 별안간 미간을 좁혔다. 툭, 툭. 묘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소년이 흰 뺨을 기울였다.

그리고, 쩍-! 마치 얼음이 깨져나가는 것처럼, 삽시간에 나뭇가지가 꺾였다. 노을처럼 평온히 내려앉던 노랫소리도 멎었다.

미색의 천 옷이 허공에 펄럭인다.

그리고 그 위로, 꽃무릇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수놓았다.

줄이 끊긴 인형처럼 추락하는 소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우물 밑바닥에 갇힌 사람처럼 물끄러미 고개를 든 소년은, 차라리 잘 꾸며진 하나의 연극 같다고 생각했다.

르옌은 손을 뻗었다.

우려나 걱정에서 기인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추락하는 이가 있으니,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리하여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고.

시선이 얽혔다.

잔상처럼 남은 그 새파란 눈동자에 대해 곱씹어 보기도 전이었다. 약간의 충격과 함께, 팔 위로 무게감이 전해졌다. 검은 눈동자 위로 붉은 머리카락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것이 비쳤다.

시선이 자연스레 그 움직임을 따라갔고, 르옌은 제 품에 안겨 저를 응시하는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낯선 타인의 품에 떨어졌으면서, 놀란 기색조차 없는 이상한 소녀를.

르옌이 미지의 생물을 관찰하듯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사뭇 싸늘한 낯 위로, 길고 섬세한 속눈썹을 살랑이며. 한참이나 탐구하듯 들여다보다가, 소녀를 내려주었다.

그 손길은 더없이 정중했지만, 그뿐이었다. 소녀, 니흐타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려도 제 할 일은 했다는 듯 깔끔하게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그건 격렬하지도, 애달프지도, 먹먹하리만치 슬픈 장면도 아니었다.

그저 기묘했다.

두 사람이 탐색의 시선을 교환한다. 오가는 말은 없었다. 침묵 속에서 다양한 감정이 오갔다. 경계와 관찰, 일말의 호기심, 어떠한 집념과 잡념, 그리고….

“아까 그 노래, 뭐였지?”

그리 묻고 나서야, 르옌은 자신이 이것을 궁금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하등 신경 쓸 가치 없는 흥얼거림 따위를, 자신이 왜?

“엄마가 들려주던 자장가야.”

“그런가.”

역시나, 그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건성으로 답한 르옌이 볼일은 끝났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막 발걸음을 뗄 때였다.

“그게 다야?”

무미건조한 물음이 그를 붙잡았다. 르옌이 뒤를 돌아보자, 그가 내려준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 그를 응시하는 소녀가 보였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거슬렸다.

르옌은 굳이 그 거슬림을 숨기지 않았다. 검은 눈이 약간의 염증과 만성적인 권태, 그리고 못마땅함을 담아 서늘하게 빛났다.

“죽으려던 이에게 더 물을 건 없어.”

대답은 듣지 않았다.

니흐타도 이번에는 떠나는 이를 붙잡지 않았다.

다만, 멀어지는 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바람에도 분분히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아니었더라면 시간이 멈추었다고 느낄 만큼이나, 미동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달을 우러르는 달맞이꽃처럼.

밤이 숲을 집어삼켰다.

* * *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지?”

벌써 몇 시간째다. 침묵 속에서 숲속을 헤맨 게. 피곤한 건 둘째 치고, 아서는 슬슬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별의 조각은 언제 찾지….

그때였다.

“이거….”

무언가를 느낀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아.”

쏴아아아- 철썩! 물이 몰아치며 흰 거품을 만들어 내었다. 바위에 부딪힐 때면, 높이 튀어 올라 하늘을 적셨다. 침묵에 잠긴 숲속에서 발견한, 맥동하는 생명력은 뜻밖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강이네….”

탄식처럼 말한 아서는, 강을 찬찬히 눈으로 훑었고, 보았다.

“벼, 별의 조각!”

그들이 내내 찾아다니던 것을.

강 끝자락.

강 한가운데 높이 솟은 바위에 있는 것은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별의 조각이다.

몸 안의 내재한 무언가가 저것에 반응했다. 심장이 쿵쿵 뛰며 얼른 손을 뻗으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손끝이 움찔거렸다. 아서가 흥분을 참지 않으며 소리쳤다.

“찾았어! 우리가 찾았다고!”

그들은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러나 곧, 그 기쁨은 막막한 난처함으로 변했다. 화면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거센 물살을 비추었다.

꿀꺽, 아서가 마른침을 삼켰다.

* * *

화면이 다시금 밝아졌을 땐.

“아아악!”

“비명 지르지 마! 흔들리잖아!”

“으으읍!”

이번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아서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뻗었다. 그가 다른 덩굴을 잡자마자, 방금까지 매달려 있던 덩굴이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강에 떠내려갔다.

질린 낯으로 밑을 보던 아서는, 이내 결연한 눈빛을 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이를 악문 아서가 독기 차오른 눈으로 다시금 전진했다.

위태로운 광경이었다.

물이 거세게 흐르는 강줄기 중심으로 숲은 미약하게 녹아 있었고, 아서와 이그린은 옅게 성에가 낀 덩굴줄기를 타고 바위를 향해 나아갔다.

위험천만한 묘기를 부리며 아슬아슬하게 전진하는 모습에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그리고.

“아, 저게….”

그것은 작은 구체였다.

흩어졌다가 도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구체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뱀이 서로의 꼬리의 꼬리를 무는 모양새였다. 그것은 어떠한 광휘를 품고 있었는데, 그들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아서는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저거야.

저걸, 손에 넣어.

본능과 같은 속삭임이 가득 찼다.

그리하여, 단 한 뼘의 거리만 남겨둔 순간.

푸욱!

…어?

아서의 눈이 크게 떠졌다.

* * *

주륵, 팔뚝에 깊이 박힌 화살을 따라 핏물이 흘러내려, 강 속으로 떨어졌다.

흰 물살이 선홍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금 하얘진다. 눈을 한 번 깜빡인 아서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돌리는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이어졌다.

빠앙, 강가에 선 호르헤가 활시위를 장난스레 당겼다가 놓으며 우스운 입 모양을 했다. 경직된 두 사람을 쳐다보던 호르헤가 인사하듯 화살을 흔들어 보이더니, 활시위에 화살을 다시 걸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과.

까득, 화살을 문 고개가 주저 없이 들린다. 핏방울이 허공에 비산했다. 그것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피가 흐르는 팔로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어 허공을 가르자,

투욱.

코앞까지 다다랐던 화살이 검에 베여 힘을 잃고 추락했다.

퉤, 입에 문 화살을 뱉은 아서가 고개를 들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청회색 눈동자로 가늘게 웃는 소년의 얼굴이 비친다.

-아서가 정신을 차린 건 동시였다.

‘미친.’

순식간에 급박해진 상황에 닉 톰슨은 입을 다물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서가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화살이 날아오고, 설상가상으로 다른 소년들이 덩굴을 타고 오기 시작했다. 아서와 이그린은 발을 디딜 곳 없는 강 위에서, 고립되었다.

챙! 또다시 날아온 화살을 쳐낸 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청회안이 옆을 향하자, 여전히 신비로이 빛나는 별의 조각이 보였다.

저것만 손에 넣으면.

…그런데, 어떻게?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귀를 파고들었다. 놀란 아서가 시선을 돌리자, 애처롭게 허공을 가르는 손이 보였다. -풍덩! 물보라가 일었다가 곧 다른 물살에 휘말려 가라앉았다.

“또 누가 올래?”

소녀가 옷깃을 매만지며 서늘하게 물었다.

그제야 아서는 상황을 파악했다.

이그린이 단도를 날려 소년이 매달린 덩굴줄기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 잔혹한 손속에 아서의 뺨이 떨렸다.

거침없이 전진하던 소년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들은 비명이 사라진 강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이 선뜻 움직이지 못하며 주저할 때였다.

피잉!

소년들 사이로 화살 하나가 지나갔다.

“그냥 가, 이 머저리들아.”

화살의 주인은 한심한 표정을 한 호르헤였다. 그는 일견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보고 죽으란 소리야?”

“물론 너희가 죽이고 싶게 멍청하긴 한데….”

싸악, 끝이 두 갈래로 갈린 혀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와 주변을 쓸었다. 그의 시선이 이그린에게 닿았다.

“제법이네. 속일 줄도 알고.”

뱀 같은 눈매를 가늘게 접힌다.

“너. 무기 더 없지?”

소년들은 한 박자 느리게 그 말뜻을 이해했다.

희비가 교차했다.

반신반의한 채 소녀를 쳐다보다가, 정말로 공격이 날아오지 않는단 걸 확인한 소년들이 신이 나 외쳐댔다.

“진짜네!”

“호르헤! 어떻게 안 거야?”

호르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 게 아니었다. 뭐든 상관없었을 뿐이지. 그는 진실을 덮어둔 채, 궁지에 몰린 두 사냥감을 보고 즐겁게 웃었다.

속임수를 들킨 이그린이 다급히 외쳤다.

“아서 우더! 뭐든, 어떻게든 해봐!”

그 외침에 아서가 얼굴을 찡그리며 바위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갈등이 떠올랐다. 가만히 있다가는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될 뿐이다. 그러나 검을 들고 있으면 저것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검을 손에서 놓으면….

아서가 짧은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

관객들은 경악한 눈으로 화면을 보았다.

아서가 검을 집어넣었다. 별의 조각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왔다. 그러나 아서는 화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었다.

화면이 느리게 재생된다.

아서의 손끝이 별의 조각을 스치고, 손바닥을 펼쳐서 그것을 손에 쥐기 전에.

“-아서 우더!!”

푸욱.

손바닥을 뚫고 화살이 튀어나왔다. 아득한 통증에 아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푹.

“으음, 방심은 안 되지.”

두 번째로 날아온 화살이 아서의 복부를 꿰뚫었다. 아서의 입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덩굴을 쥔 손의 힘이 풀렸다. 이어서.

“…아.”

이그린의 몸이 덜덜 떨렸다. 무거운 것이 물속에 가라앉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그것은 거센 물살에 휘말려 사라졌다.

…왜?

온몸에 핏기가 가신 것처럼 낯빛이 창백해졌다. 이그린은 아서가 매달렸‘던’ 덩굴을 보다가, 강가를 쳐다보았다. 소년이 안타깝다는 듯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자, 덩굴에 매달린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녀는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그린은 덩굴을 놓았다.

관객석에서 적막이 흘렀다.

이그린이 매달려 있던 덩굴을 잡아채, 대롱대롱 매달린 소년이 시시하다며 투덜댔다. 호르헤는 사냥감을 놓친 게 아쉬운지 쯧, 혀를 찼다.

“그거, 가져와.”

호르헤의 말에 소년이 바위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손에 별의 조각이 들어왔다.

* * *

그리고.

무거운 소리가 들렸다.

물속에서 팔을 휘젓는 듯, 먹먹하고도 무거운 소리가.

푸르고 깊은 물속에서 소녀가 팔을 뻗었다.

선홍빛에 감싸인 채, 아래로 가라앉는 소년을 향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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