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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387화 (388/582)

제387화. Pathfinder : The Frozen Forest (5)

“-푸하!”

물 위로 떠오른 이그린이 거친 숨을 뱉어냈다. 눈앞에서 자꾸 물이 튀겨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그린은 손에 닿은 온기를 놓칠세라 세게 그러쥐었다.

“아서! 정신 좀 차려 봐! 아서 우더!”

이그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소년의 안색이 너무 창백했기 때문이었다. 그 주변으로 번지는 선홍빛 피에, 이를 악문 이그린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경악했다.

아득한 폭포였다.

* * *

‘…이거, 살 수 있는 건 맞지?’

아까부터 몰아치는 전개에 넋을 놓고 집중하던 닉 톰슨이 생각했다.

동화 같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가족의 죽음부터 시작해,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과거의 일, 후보끼리의 사냥 등등… 하나 같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렇게까지 클리셰를 깨부술 줄은 몰랐다.

‘보통 저런 위기 상황에서는 주인공이 각성해서 적들을 다 물리치지 않나?’

별의 조각은 고사하고, 목숨조차 간당간당하게 생겼다. 동료가 물에 뛰어들길래 살겠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폭포다.

가까워지는 폭포에 이그린의 얼굴이 공포로 희게 질렸다. 어떡하지, 대체 어떻게 해야…. 올리브색 시선이 기절한 소년에게 닿았다.

…얘를 버리면.

그런 이그린의 갈등이 관객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그린을 비난할 수 없었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고, 엉망진창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관객석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한참이나 갈등 어린 눈을 하던 이그린이 결국, 아서를 세게 껴안고 눈을 질끈 감았기 때문이었다.

“…빚, 갚은 거야.”

형편없이 떨리는 작은 목소리가 물소리에 잡아먹혔다.

그리고 추락이었다.

* * *

눈과 귀, 코로 물이 들어찬다.

온 세상이 먹먹했다.

눈앞에서 공기 방울이 뽀르르, 떠올랐다가 물살에 휩쓸려 사라진다. 점점 숨이 부족해져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그린은 차가운 육체를 더욱 끌어당긴 채,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번쩍!

정처 없이 추락하던 소녀가 돌연히 눈을 떴다. 소녀의 눈동자가 물 속 어딘가를 응시했다.

소리가, 들렸다.

깊은 공동을 헤매는 울음 같은 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어.

몽롱한 정신 속에서, 그런 확신이 들었다. 소녀의 눈이 일순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 * *

타닥, 타닥.

미약한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화면이 잠든 소년의 얼굴을 비추었다. 굳게 잠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열렸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윽!”

어둑한 주위에 급히 몸을 일으키던 아서는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신음했다. 그러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이지 마.”

그제야 아서는 제 옆에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엉망이 된 겉옷을 바닥에 펼쳐둔 이그린이 모닥불을 뒤적이며 말했다.

“너, 목숨만 겨우 붙은 상태야.”

이그린의 말에 아서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왜 이그린의 옷이 누더기가 되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복부와 손에 천이 칭칭 덧대어 감겨 있었다.

손을 들어 냄새를 맡으니 쌉싸름한 약초 향이 났다.

“네가 치료해준 거야?”

“응.”

“그 애들은? 아니, 여긴 어디야?”

“나도 몰라.”

폭포에 떨어지고 난 후부터의 기억이 없었다. 정확히는,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아서와 자신이 이상한 동굴에 기절해 있었다.

이그린은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침묵하기를 택했다. 아서는 더 자세히 묻지 않고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별의 조각은 어떻게 됐어?”

이그린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을 짐작한 아서가 입을 다물었다. 아서마저 입을 닫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뚝, 뚝, 동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그 정적을 깬 건 이그린이었다.

“이틀은 넘게 지났어. 아마도… 모레 아니, 내일이면 달이 완전히 찰 거야. 어쩌면 오늘일 수도 있지.”

길잡이 후보들에게 무한정의 시간이 주어진 건 아니었다. 달이 기울고 시험이 시작되었으니, 다시금 달이 차오를 때까지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별의 조각은….”

아서가 말끝을 흐렸다.

이그린의 가라앉은 낯을 보던 아서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다치지 않은 쪽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나가는 길을 찾아보자. 또 별의 조각을 찾을지도 모르잖아.”

“그 몸으로?”

“이 정도면 움직일 수 있어.”

이그린의 눈에는 아서가 명줄을 재촉하는 걸로 보였다. 지난 이틀간 그녀가 이곳을 떠나지 못한 건, 아서 때문이었다.

잠시 눈만 떼면 숨이 약해지는 통에….

“일어나, 이그린. 길이라도 찾아보자.”

멍청한 오기다.

그를 치료한 게 그녀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분명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텐데, 아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일으켰다.

이그린은 아서의 목에 흥건한 식은땀을 쳐다보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아서가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들은 말없이 동굴 안을 걸었다.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걷고, 걷고, 계속해서 걸었다. 억지로 신음을 참아내는 숨소리와 두 사람의 불규칙 적인 발소리만이 동굴 안을 울릴 때였다.

“…소리.”

작게 중얼거린 이그린이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의아해하던 아서는 곧 아픔조차 잊고 입술을 벌렸다.

거대한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불씨가 타올랐다가 녹기를 반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하게 젖은 소년과 소녀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붉게 일렁이는 새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픽시···.”

이그린이 탄식처럼 말하자, 아서는 어렸을 때 들었던 전설을 떠올렸다.

노바우드 대륙에 존재했다던, 세 신성한 동물. 창공을 누비는 말, 실라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 스마고그. 그리고….

끊임없이 타오르며 다시 태어나는 새, 픽시.

각자 수호와 지혜, 생명을 관할한다고 알려진 이 신성한 동물들은 과거에는 태초의 종족에게 도움을 주며 함께 살았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그저 전설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는데….

“그게 진짜였다니.”

놀라 중얼거리던 아서는, 한 박자 늦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날개와 발목에 묵직한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고, 새가 날갯짓할 때마다 파직거리며 화상 같은 상처를 남겼다.

“대체 누가… 아니, 일단 풀어줘야, 읏!”

아서는 강한 반발력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사슬에 닿았던 손끝이 화상을 입고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시금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아서는 벌겋게 익은 손을 부여잡고 약하게 신음했다.

“멍청한 짓 하지 마. 남은 손도 필요 없어서 그래?”

“그렇지만… 아?”

아서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새가 거대한 몸을 숙이더니, 발갛게 익은 아서의 손바닥에 부리를 가져다 대었기 때문이었다.

놀란 표정을 짓던 아서가 이내 웃었다.

“나 걱정해주는 거야? 나는 괜찮,”

“아서, 너 손이!”

“응? 어… 어어? 왜, 왜 이러지?”

아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상을 입었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희고 매끄럽게 빛났다. 이윽고 아서는 위화감을 눈치챘다.

온몸에 퍼지던 고통이 없다.

아서는 고개를 들었고, 곧 새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기적의 원인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너구나.”

몸이 너무 가벼웠다. 찌르는 듯한 통증도. 타는 듯한 고통도 없었다. 그러나 아서는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아서를 고통에서 해방해 준 새의 몸에는 무거운 사슬이 감겨 있었으니까.

잠깐 복잡한 눈빛을 하던 아서는, 곧 단단한 표정을 지었다.

“우더의 가지로서 맹세해. 널 구할 거야. 길잡이 후보로 탈락하더라도, 어떻게든.”

그 맹세를 이해한 걸까.

픽시가 길게 울었다. 아서는 픽시를 보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이그린이 그 광경을 보며 안도하고 있을 때였다.

“응?”

“!”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 소리를 내었다. 픽시가 별안간 제 날개깃을 두 장 뽑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떨어트린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화악-

그들의 발밑에 흰 원이 생겨났다.

귀환의 진이었다.

기어이, 시험이 끝난 것이다.

아서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이그린도 방금까지의 놀람을 잊은 채, 어두운 낯을 했다. 그러나 아서는 금방 낭패감을 수습하고 여전히 그들을 쳐다보는 새를 올려다보았다. 씨익, 소년이 환하게 웃었다.

“꼭 구하러 올 테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소년이 남긴 목소리만이 동굴에 남아 메아리쳤다. 새는 올망올망한 푸른 눈으로 소년 소녀가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피이, 하고 작게 울었다.

천천히 화면이 어두워졌다.

* * *

“으앗.”

갑자기 어딘가로 내던져진 아서가 뒤로 넘어졌다. 그건 아서 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들이 저마다 넘어지거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얼떨떨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아서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호숫가였다.

처음, 증명을 위해 모였던 바로 그 호숫가.

그때, 목소리가 울렸다.

-첫 번째 증명이 끝났다.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 같은 기묘한 목소리였다. 그에 후보들은 저마다 시험이 끝났다는 걸 실감했다.

아서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롤랑이 많이 기대했는데. 실레랑 아나트 아주머니, 부족 애들도. 그리고….

…욘다드도.

주먹 쥔 손이 작게 떨렸다.

죄책감과 자책감, 그리고 패배감 같은 감정들이 뒤엉켜 아서를 덮쳤다.

-힘은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법.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고통 어린 비명이 울렸다. 그들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그 위로 황금빛 안개가 흘러나오더니 공중에서 흩어졌다.

아서는 사색이 되었다.

허공에서 덧없이 흩어지는 것이 길잡이로서 품고 있던 힘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옆을 돌아보니 이그린도 하얗게 질린 낯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자격을 증명한 그대들은 두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 신성한 나무로 오라.

“응?”

-그대들의 길 위에 빛이 가득하길.

그리고 끝이었다.

???

의문에 가득 찬 아서와 이그린의 시선이 맞닿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조금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을 하다가.

“그 깃털!”

이그린이 소리쳤다.

그에 관객들은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고 저마다 안도의 숨을 내뱉거나, 주먹을 꽉 쥐었다. 초조하던 심정이 한순간 풀린 탓에 탄성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아서에게도 깨달음은 찾아왔다.

“그게 별의 조각이었다고!?”

넋이 나간 채, 이그린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와락! 그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뚝이 느껴졌다. 켁, 목이 눌린 아서가 기침을 뱉어냈다.

“아서, 욘석아!”

“롤랑! 아서가 아파하잖니!”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고, 또,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롤랑, 실레!”

아서가 그의 가족을 부르며 환히 웃었다.

카메라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화면은 기쁨에 가득 차 미소 짓는 아서와 울먹이는 이그린을 보여주다가, 다른 이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백의의 무리와 함께 호숫가를 떠나는 르옌과, 그 옆에 꼭 붙어서 무어라 말하는 호르헤, 그리고 다시금 달이 떠오른 호숫가를 비추다가.

쿵.

크게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까맣게 물들었다.

이윽고, 완전한 어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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