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패스파인더 : 얼어붙은 숲 (6)
‘…끝인가?’
스크린은 깜깜한데 관객석은 조용하다.
닉 톰슨은 정적 속에서 벙벙히 눈을 깜빡이다가, 보았던 것을 반추해 보았다.
초반에는 영웅의 탄생, 딱 그런 느낌이었고… 평화로운 듯하다가 누바라 족의 등장으로 분위기를 확 전환했다. 그리고 중후반부터는 사건이 겹겹이 몰아쳤다.
그렇게 숨 쉴 틈 없이 사건 사고가 이어지더니, 그들이 완전히 홀려 있는 틈을 타 냅다 엔딩을 내버렸다.
???
화면 속에서 아서와 이그린이 벙찐 게 절절히 이해되었다. 닉 톰슨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탄식과도 같은 숨을 뱉어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레니, 영화는 잘 봤….”
“파파, 쉬잇!”
“응?”
레니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에 의아해하던 닉은 둥, 하는 낮고 강한 울림에 깜짝 놀라 앞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밝아지는 화면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쿠키 영상!
닉 톰슨은 곧장 몸을 바로 했고.
쾅! 쾅! 쾅!
밝아진 화면 위로 두꺼운 책이 하염없이 쌓여갔다. 거의 시야와 수평이 될 정도로 쌓인 책에, 아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 앞으로 이것들을 배우고 익혀, 그 배움의 정도를 시험할 겁니다.
‘아, 혹시?’
닉 톰슨의 눈이 커졌다.
처음 보는 인물임에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시즌 1에서 내내 목소리만 들렸던 인물. 그러나 결코 임팩트가 작지 않았던 인물.
시험을 주관한 정령이었다.
의외인 건, 그가 겉보기에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거였다. 다른 종족처럼 꼬리가 달리거나 피부가 푸르지도 않았다.
그냥 사람 같다고 생각할 때였다.
아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정령님!”
- 말씀하세요.
“그… 길잡이 힘은?”
-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앎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모든 기초적인 과정을 끝냈을 때, 자격이 있다고 판단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정론을 늘어놓는 정령에 닉 톰슨이 웃음을 참았다.
‘이거 완전 학교잖아.’
- 또 질문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아서가 세상의 짐이란 짐은 모두 짊어진 표정으로 답했다. 아서의 눈앞에 쌓인 책들이 유난히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왜 또 공부야….”
한탄하는 아서에 닉 톰슨이 기어이 웃고 말았다. 시즌 1이 너무 여러모로 예상 밖이라,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데… 시즌 2 예고편을 보니까 딱 그가 생각했던 분위기였다.
그래, 그런데….
‘아까부터 북소리는 왜 계속 울리는 거지?’
낮게 둥, 둥 울리는 소리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분명 화면엔 눈앞이 깜깜해진 아서가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왜….
그때였다.
둥.
화면이 불시에 어두워졌다.
둥, 한 번 더 울렸을 때는, 거대한 홀이 보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운데에 자리한 가시나무 아래에 모인 이들이 일제히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둥.
서서히 화면이 위로 올라갔다.
허공에 걸린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발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떨어지며 툭, 하는 작은 소리를 내었다.
동시에.
둥!
마지막 북소리와 함께 화면이 점멸했다.
닉 톰슨은 뻣뻣하게 화면을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말 끝이라는 듯이, OST와 함께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감독의 이름을 지나 배우의 이름이 등장하고 나서야 닉 톰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뭐?(What?)”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닉 톰슨은 지금 가장 강렬히 떠오르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래서 다음 편은?
여기저기서 숨이 터져 나왔고, 이내 박수 소리가 조금씩 극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를 들은 이들은 하나씩 영화가 끝났음을 깨닫고, 그 대열에 합류했다.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해졌다.
그러나 닉 톰슨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다음 편은?
머릿속에 그런 의문만이 뱅뱅 맴돌았을 뿐이었다.
* * *
그날 저녁.
인터넷은 첫 번째 상영을 마친 사람들의 후기로 뜨겁게 달구어졌다. 바로 다음 날 미국 전역에서 동시 개봉을 하지만, 워낙 비밀에 꽁꽁 감싸져 있던 영화였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하늘을 찔렀다.
저명한 매체에서 쏟아지는 평론과 유명 인사들의 관람 후기, 그리고 일반인 참석자들의 생생하고도 진실된 감상평까지 그 열기를 돋웠다.
한국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패스파인더 레드카펫, 델라 허진스 빛나는 미모….]
[팬심 증명! 댄 KJ도 왔다!]
[닉 톰슨 딸 레니 톰슨, 귀여운 분장으로 시선 집중….]
[Pathfinder 시사회를 빛낸 슈퍼스타들!]
-ㅁㅊ 어떻게 다 아는 이름이지;;
-델라 ㅎㄷㄷ 인기 실감 난다….
-와 저 시사회 간 사람들 진짜 부럽다 ㅠㅠㅠㅠㅠ
시사회 시작 전에는 그 화려한 라인업으로 인해 한 차례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각광받은 게 있었는데.
[배우 이도현, 레드카펫 위 남다른 미모]
[스타일 변신? 이도현, 바뀐 헤어스타일에 누리꾼 반응 뜨거워….]
-이도현 미침???!?!?? ㅅㅂㅅㅂㅅㅂ!!!!
⌞야야 좀 진정해 ㅋㅋㅋ
⌞아니 이걸 어케 진정함; 장발 실화냐고….
⌞ㄹㅈㄷ
-분위기 뭐냐…. 왜 나보다 더 으른 같지?
-페어리 가방끈 도랐네… 저거 애들 레드카펫 착장 다 캐릭터 컨셉에 맞춘 거 아니야;;
⌞헐 생각해 보니까 ㄹㅇ
⌞이거 찐인 듯? ㄷㄷㄷ
⌞기자 질문에 헤레이즈가 답해준 거 있음. 일부러 맞춘 거 맞대. 이거 오피셜임
⌞ㅠㅠㅠㅠ 감사합니다 ㅠㅠ
-이도현 평생 장발해…ㅠ
⌞222 평생 장발해ㅜㅜㅜ
⌞받고 파마도 해 ㅠㅠㅠㅠㅠ
-예능에서도 존잘이었는데… 레드카펫에 서니까 확실히 다르다
-지금 저게 중1이란 거 아님;;
⌞???????
⌞듣고 보니… 와
⌞도대체 크면 어떻게 될까….
바로, 스타일링의 변화였다.
도현의 단정함은 꽤 유명했다. 8살에 베니스 시상식에서 똘똘한 눈빛을 시작으로, 영화나 드라마 때를 제외하면 대중 앞에 드러내는 모습은 항상 칼 같은 단정함, 그 자체였다.
그런 도현이 레드카펫에서 보인 스타일링 변화는 꽤 충격적이었다. 한국에서 잘 하지 않는 목덜미까지 오는 장발에 컬이 들어간 스타일이라서 더욱 그랬다. 그에 인터넷이 한 차례 후끈 달아올랐다.
그 장작이 꺼질 때쯤.
L.A.에서 한창 진행 중이던 상영이 끝나면서 다시금 여론에 불을 붙였다.
[드디어 시사회 상영 끝났다… 반응 ‘폭발적’]
[존 레널드, “높은 완성도와 환상적인 영상미” 극찬]
[시사주간지 타임, “올 한해 최고의 영화,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작품 될 것”]
[‘Pathfinder’ 첫 번째 시리즈, ‘L.A. 선공개’ 반응 폭발… 전 세계 팬들 기대 집중]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Pathfinder’의 대장정이 마침내 그 첫 시작을 알렸다. L.A. 컨벤션 센터에서 9월 16일 오후 (현지 시각)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가 열렸다.
전 세계의 팬들이 한달음에 달려온 이번 시사회 결과는 그야말로 ‘대성공’이다. 시사회 시작 전부터 전 세계의 취재진이 몰려와 그 인기를 실감케 했을 뿐더러,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레드카펫을 빛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영화 반응은 어떨까.
미국의 영화 비평 전문 사이트 로튼 애플에 올라온 비평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실망하지 않을 작품”이다.
그들은 “팬들은 안심해도 된다.”,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준 작품.”, “아역배우의 활약이 놀랍다”, “눈앞에 판타지 세계가 펼쳐지는 경험”이라며 입을 모아, 전 세계 영화 팬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한편, 북미를 울린 ‘패스파인더 : 얼어붙은 숲’은 국내에서 9월 19일, 전국 동시 개봉으로 그 베일을 벗는다.]
-얼마나 재밌으면…!!!!
-나도 얼른 보고 싶다
-완전 기대 중 ㅠㅠㅠㅠㅠ
-영화 잘 만들어진 거 같아서 진짜 다행이다
[톱스타들, SNS서 인증 글 “패스파인더 보고 왔어요!”]
[댄 KJ “환상적, 완벽함. 팬이라면 무조건 보러 갈 것!”]
호의적인 반응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개봉 존버합니다
-누가 나 기절시키고 삼일 뒤에 깨워줘 ㅠㅠ
그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국내 팬들은 하나둘씩 걱정을 내려놓으며 곧 있을 개봉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 * *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한 극장.
“…헤더! 지니!”
진 레이시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멀리서부터 걸어오던 두 소녀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 이후에 반응은 상반되었다.
헤더는 거의 뛰듯이 걸어왔고, 지니는 사뿐사뿐 느긋했다.
“너는 뛰면 죽니?”
“머리 헝클어지잖아. 싫어.”
십 분 가까이 지각해놓고 퍽 당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은 황당하지 않았다. 그런 거에 일일이 반응하기엔 그녀와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진은 헤더를 조금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델마를 졸업한 후, 헤더는 진과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놀랍게도 지니가 다니는 세인트 마리 학교였다.
이후로 두 사람은 무슨 인연인지 단짝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리 진의 집에서 가졌던 티타임으로 안면이 있다고는 하나,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런 게, 두 사람은 너무나 달라 보였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헤더는 잔머리 한 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채, 잘 닦인 안경을 쓰고 있었다. 반면 지니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조숙해 보이는 핸드백을 메고 있었다.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그들이 어떻게 친해졌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어? 애들 왔어?”
그 사이, 콜라와 팝콘을 가지러 갔던 다비드가 돌아왔다. 진은 머릿속에 차올랐던 탐구욕을 치워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우리 상영관 어디야?”
“음… 저기네. 20분 뒤 시작인데, 미리 들어가 있을까?”
“그게 낫겠다.”
진은 조금 질린 기색으로 답했다.
첫 개봉 날이기 때문인지, 극장 안이 점점 사람으로 가득 차 번잡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다른 친구들도 진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앉은 자리는 다비드, 진, 지니, 헤더 순이었다. 진은 착석한 채 광고가 흘러나오는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 옆모습을 보던 다비드가 물었다.
“긴장돼?”
“…조금. 그게 보여?”
“내가 너를 모를 리가 없잖아.”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지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매처럼 자란 소꿉친구의 연애는 제정신으로 들어주기 힘들었다.
“걘 잘할걸. 너도 알잖아.”
도현이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말이었다. 다비드의 입에서 인정하는 말이 나올 줄을 상상도 못 할 테니까.
“그렇지. 도리토스니까.”
“아직 영화 시작도 안 했는데, 너무 걔만 생각하진 마.”
하지만 역시 다비드는 다비드였다.
지니의 낯빛이 썩자, 헤더가 위로의 뜻으로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커플과 함께하게 된 지니가 고역을 치르는 시간이 지나고.
잠시 후.
영화가 시작되었다.
* * *
“…음, 저기. 애들아?”
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카페에 앉아 음료 잔만 응시하던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반응에 진이 눈매를 찡그렸다.
“우리 뭐라도 좀… 얘기해보지 않을래?”
영화가 끝나고.
아이들은 침묵에 잠겼다.
여러모로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다 먹은 콜라와 팝콘을 버리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다!
진이 불편해 보이자, 뒤늦게 멘탈을 찾아온 헤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그냥 좀, 이상해서.”
헤더의 말뜻을 대번에 알아들은 진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일 년 전까지는 같이 웃고 떠들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완전히 낯선 모습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건, 그걸 관객석에 앉아서 보는 건… 여러모로 오묘했다.
때는 적어도 그 변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너드처럼 다녔던 도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게다가 극장에서 그 인기까지 체험하고 나니 더욱 기분이 미묘해졌다. 싫다기보다는 낯선, 그보다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진은 아이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도현과 자주 연락하는 편인 데다가, 얼마 전에 실제로 만나기까지 한 그녀도 그런 느낌을 일순 받았는데, 이들은 어떻겠는가.
진은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한테 전화해?”
진의 돌발 행동을 본 헤더가 물었지만, 진이 대답하는 것보다는 통화가 연결되는 게 더 빨랐다. 그리고….
-진?
잊기 어려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