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패스파인더 : 얼어붙은 숲 (7)
무작정 통화 걸기는 했어도, 그가 곧장 받을 줄은 몰랐던 진이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금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진, 밖이야?
“아, 응. 카페야.”
- 혼자?
“아니, 친구들이랑. 다비드랑 헤더, 지니도 있어.”
진이 핸드폰을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으며 일러 주자, 도현이 반색하며 말했다.
- 헤더? 헤더가 있어? 진, 헤더한테 안부 인사 좀 전해 줘. 아, 지니랑 다비드도.
“이거 스피커야.”
- 아… 그래?
잠깐의 침묵 후, 반가움과 친애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랜만이네. 헤더, 지니.
“난?”
- 다비드 넌 자주 봤잖아.
진과 다비드가 붙어 다니다 보니, 진이 도현에게 통화를 걸 때 옆에 다비드가 있을 때가 많았다. 그 탓에 정말 본의 아니게도, 진 다음으로 가장 통화를 많이 한 사람이 다비드일 정도였다.
- 다들 모여서 노는 거야?
“당연히 네 영화 보러 왔지!”
- 이거 헤더 목소리지? 와, 오랜만에 듣는다. 헤더, 그동안 잘 지냈어?
살갑게 말을 붙여오는 목소리는 델마 아카데미 시절과 다를 게 없어서, 헤더의 얼굴이 무의식중에 풀렸다.
“난 잘 지냈는데, 너 지금 통화해도 괜찮은 거야? 안 바빠?”
- 응. 안 바빠.
“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 음… 그게.
약간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 어제 시사회 끝나고 애프터 파티가 있었거든. 나는 일찍 들어가서 잘 모르지만, 새벽까지 이어졌나 봐. 근데 감독님이 그럴 줄 알고 시사회 다음 날은 아무런 일정도 안 잡아뒀어. 그래서 바쁜 건 내일부터.
웃음기가 중간중간 섞인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 상영관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전체적인 음색은 비슷해도 풍기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판이했다.
- 아무튼, 영화 본 거야?
“응. 방금 보고 나왔어.”
- 그래?
그는 잠깐의 텀을 두고 말했다.
- 뭐라고 물어보는 게 적당할지 모르겠네. 일단… 재밌었어?
“그걸 말이라고 해?”
헤더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리 극장에서 나올 때 사람들 다 패스파인더 얘기만 한 거 알아? 완전 난리도 아니었어.”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상영이 끝난 후, 상영관은 사람들의 흥분 어린 목소리로 시끄러워졌다. 굳이 상영관까지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본 관람객들의 호평과 찬양이 인터넷과 SNS에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 너는 어땠는데?
“나도 당연히 재밌었지! 다비드, 걔는 완전 넋 놓고 봤어. 지니도 괜찮았대. 내가 아는데, 이거 완전 극찬이야. 지니는 판타지나 액션은 쳐다도 안 보거든.”
“도리야, 난 별로였어!”
그때, 헤더와 도현이 대화하는 걸 듣고 있던 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세 사람이 뭐냐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진은 진심을 가득 담아 외쳤다.
“네 분량이 너무 적잖아!”
- 아….
수화기 너머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말이 돼? 어떻게 너를 그렇게 보여주다가 말 수가 있어? 그럴 거면 잘생기지를 말든가. 아니면 강렬하지를 말든가. 그러는 게 세상에 어디 있어!”
쾅! 울분이 차올랐는지 진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랄 법도 했지만, 다비드는 진의 손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했고, 헤더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지니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누가 봐도 네가 최고였는데, 꼭 그렇게 개미 뒷다리에 붙은 먼지 한 톨만큼 등장시켜야 했을까?”
- 저, 진? 그 정도까지는 아닌….
“2편 나오려면 2년은 걸릴 거 아니야. 그때까지 겨우 노래 세 곡 정도 분량 가지고 버티라고? 내가 샤워하면서 노래 불러도 세 곡은 넘겠다!”
- 으응, 그렇구나….
“그래! 나는 정말이지, 페어리에 실망했어!”
진이 마지막 대못을 박자, 꾹꾹 눌러 참던 웃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끅끅대며 웃는 소리에 진이 불만스레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쩔 수 없잖아. 원작에서도 1권에서는 르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걸.
“그래도….”
진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내내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던 지니가 입을 열었다.
“난 좋았다고 보는데.”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짧지만, 인상 깊었어.”
헤더는 지니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등장 장면 엄청났지.’
헤더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렸다.
온통 희게 치장한 이들 사이에서 도현이 등장했을 때, 일순 상영관이 조용해졌었다. 단체로 뭐에 홀린 듯이 그의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앞좌석이었나, 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들 무리에서 감탄 섞인 욕설이 튀어나와서 하마터면 크게 뿜을 뻔하기도 했다. 단전부터 올라왔을 게 분명한 욕설이라서 다시 생각해도 웃겼다.
물론 그 애는 옆에 앉은 친구에게 닥치라는 친절한 충고를 들었다.
그러나 헤더는 그 친구를 충분히 이해했다.
좋은 리더한테는 카리스마가 중요하다, 그런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도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그 순간 깨달았다. 저거구나, 하고.
단순히 헤더가 도현의 친구라서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실제로 상영이 끝난 후, 가장 많이 들린 단어 중 하나가 ‘르옌’이었다.
대화를 일일이 엿들은 게 아니라 그 내용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도현이 관람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 진, 내 분량 말고 다른 건 어땠어?
“아서? 걔가 헤레이즈지? 되게 잘생겼더라.”
- 아….
“진! 나는!”
헤더는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뒤로하고 생각에 잠겼다. 물론, 지니의 말처럼 도현의 등장은 상당히 인상 깊었다. 다음 편이 기대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진의 말도 틀린 건 없어.’
분량 자체가 적은 것도 사실이다.
헤더는 생각해 보았다.
도현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대중들. 그리고 임팩트 있긴 해도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딱 두 번뿐인 짧은 등장.
“으음….”
작게 앓는 소리를 낸 헤더가 다비드와 투닥거리는 진을 쳐다보았다. 분량이 적다고 화내는 게 단순히 평소 같은 주접인 줄 알았는데… 문득, 그것뿐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 *
서울, 가연 예술 중학교.
1학년 2반 교실.
한설아는 구석에 모여서 심각한 낯으로 동영상을 보는 아이들을 발견하곤, 의아한 낯으로 다가갔다.
“거기서 뭐 해?”
“너도 이리 와서 봐봐.”
“뭔데….”
[Utube]
[패스파인더, 제대로 망했다? 미국에서 나오고 있는 반응 (실시간 이슈)]
“뭐, 뭐야 이게?”
너무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상당히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제목 위로는, 이도현의 얼굴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다급히 영상을 재생하니, 흰 가면을 쓴 사람이 나와서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 전 세계적인 명작, 패스파인더가 영화로 개봉해서 연일 화제죠? 시사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식 개봉을 하면서 더욱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개봉한 패스파인더가 망했다는 소리가 점점 나오고 있단 거 아시나요?
“말을 왜 저렇게 해….”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 지금 보시는 자료는 미국의 한 영화 매체에서 올린 평론입니다. ‘원작에만 충실했다.’, ‘신선함이 전혀 없다.’, ‘러닝 타임 내내 지루해서 힘들었다.’라고 쓰여 있네요. 그 밑에 댓글을 한번 볼까요?
화면에 떠오른 기사와 댓글에 한설아가 눈매를 찡그렸다.
- 패스파인더가 이런 평가를 받는 건, 단순히 ‘원작 따라 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패스파인더는 심의 관련해서도 이슈인데요, 한 기사를 보시죠.
[패스파인더, 아이용 영화? 그저 기괴해]
[독일서 패스파인더 심의 항의]
[유명 평론가, 알론 머스크 “패스파인더는 아이에게 유해”]
- 아이와 어른들이 두루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다가, 괜히 가랑이가 찢어져 버린 상황이네요. 한 가지만 집중하는 게 나았을 텐데 말이죠. 이게 과유불급이라는 걸까요? 정말 아쉽네요.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한없이 깎아내리고 있었다. 듣다 보면 이미 패스파인더가 망해도 대차게 망해버린 거 같았다.
불쾌한 화법이었다.
- 패스파인더는 19일 국내에서 개봉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국내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해지네요. 실시간 이슈였습니다.
그렇게 영상이 끝났다.
한설아는 까매진 화면을 노려보다가 허리를 폈다.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있었다.
“이거 다 어그로야.”
“아는데….”
한설아가 알기론, 미국에서 호평과 찬사가 나오고 있었다. 물론 늘 호평만 있을 수는 없으니, 혹평도 존재하긴 할 터다. 그것들을 모아다가 전체적인 여론인 척 올리는 질 나쁜 영상이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봤는데, 미국 개봉 하루 만에 수입이 3천만 달러를 넘겼대.”
그뿐일까. 주말 동안 예상 수입이 8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추세였다. 게다가, 미국의 일부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성화로 인해 학교 수업을 영화 관람으로 대체하기도 했다는데… 저런 동영상을 믿는 게 더 이상했다.
“이런 거 믿지 마, 애들아.”
그녀는 확신에 찬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조차, 저녁에 새로 뜬 동영상에는 초연하게 굴 수가 없었다.
* * *
잠옷을 입고 책상 앞에 앉은 한설아는 친구들이 단톡방에 보낸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 배우 이도현이 할리우드 영화, 패스파인더에 캐스팅되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었죠? 원작 팬들의 거센 반발에도 캐스팅을 취소하지 않으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관련해서 페어리 픽처스의 선택이 틀렸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자꾸 뭐가 나온대, 진짜.
어이없고 짜증 나면서도 한설아는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한 영화 매체의 반응을 보시죠. ‘완벽한 영화에 얼룩을 남긴 동양인 배우’, ‘페어리는 완전히 틀렸어’, ‘지금이라도 바꾸면 안 되는 거야?’, ‘웁스, 그가 나오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어. 그는 이 영화에 완전히 안 어울려!’. 보시다시피, 원작 팬들이 단단히 뿔이 난 모습인데요.
가면을 쓴 이가 정면을 응시했다.
- 일각에서는, 사실 페어리 픽처스에서 배우 교체를 노리고 있는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영화에서 르옌의 적은 분량을 언급했는데요, 만약 진짜라면 그를 수월하게 치우기 위해서 분량을 자른 거겠네요.
더 들어주고 있기 힘들어서 영상을 멈춘 한설아는 그 밑으로 내려서 댓글을 확인했다.
- 망한 건 님 인생이고요
- 진짜 뇌절 오진다…
- 중학생 애 가지고 자극적인 콘텐츠 뽑으면서 돈벌이하고 싶냐? 진짜 천박하다
- 얼굴이나 공개하고 말해
- 이도현 파이팅! 잘하고 있어!
- 그 일각이 메이트판ㅋㅋㅋㅋ 님 대학 과제도 출처 나무위키로 했으면 ㅇㅈ
가장 위에 뜬 댓글들은 상당히 정상적이라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내릴수록 얼굴이 굳어갔다.
- 그럴 줄 알았다ㅋㅋㅋㅋ
- 국위 선양이라고 난리 치더니… 이게 무슨 국가 망신이냐 ㅠㅠ
⌞ ㄴㄴ 이도현은 미국인임
⌞ ㅅㅂㅋㅋㅋㅋ 토스해 버리네
⌞ 이도현 솔직히 국뽕 때문에 올려치기 넘 심했음 이제야 제자리 찾는 듯
⌞ 제자리 ㅇㅈㄹ;; 님 인성부터 제자리를 찾아보세요 제발;;
- 이도현이 먹히는 건 국내뿐이지 ㅋㅋㅋㅋ 그것도 국뽕 부스터 빨임
⌞ 이런 애들은 걔가 할리우드판에서 놀던 애란 걸 기억은 하는 걸까….
⌞ ㄴㄴ지능을 기대하지 마셈
- 으휴ㅜ 내가 다 창피 잘란척하다 망했네
⌞ 잘란척 X 잘난 척 O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뒤로 가기를 누른 한설아는, 그 유튜버의 채널에 이것 말고도 다른 영상이 많이 올라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서 이도현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혹시, 혹시 해서 들어간 커뮤니티는 더했다. 거기에는 온갖 음습한 인간들이 모인 것 같았다. 동영상에는 그나마 선을 지켰던 댓글이, 그곳에서는 정도를 모르고 비난과 조롱을 쏟고 있었다.
한설아는 숨을 내쉰 후, 단톡방으로 들어갔다.
- 유튜버 신고했음;
- 난 댓글 피뎊 땀
- 아 나도 따는 중 이거 새솔에 보내면 됨?
- 오 좋다 모아서 보내는 거 어때?
- 굿굿
- ㅇㅋ 다른 애들한테도 말할게!
친구들의 채팅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한설아는 깨달은 얼굴을 하고선 유튜버를 신고했다. 선을 넘은 댓글도 일일이 신고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미친 새끼들.”
정화 작업을 하는 그녀의 입에서 드물게 거친 욕설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제발, 이도현이 유튜브를 보지 않기만을 빌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