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화. 패스파인더 : 얼어붙은 숲 (8)
“으, 으아악!”
멀뚱히 손을 흔드는 신시아를 발견한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신시아가 상큼하게 웃었다.
“영화 봐주셔서 고마워요!”
“뭐야? 진짜야?”
“진짠가 봐! 세상에, 홈페이지에도 공지 떴어!”
도현은 신시아의 옆에서 손을 흔들었다. 처음엔 경악, 나중에는 환호하며 달려드는 사람들은 경호원들이 잘 막아주었다.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 이후. 시사회는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열렸지만, 팀이 그 모든 시사회에 방문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방문하기로 예정된 곳이 한 손에 꼽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정된 방문이 아니었다. 현재 하는 건 페어리 픽처스 측에서 진행한 게릴라성 무대 인사 이벤트로, 아무런 사전 안내 없이 등장해서 잠깐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식이었다.
즉, 시사회에 참석한 관객들은 배우의 방문을 까맣게 모르는 상태였다.
이 이벤트는 일종의 마케팅이자 장기적으로 이어질 영화를 위한 전략이었다.
깜짝 등장했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면서 화제성을 끈다. 그러나 일회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 패스파인더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시사회를 방문해, 만의 문화와 관습을 만들어내는 게 최종적인 목표였다.
한편, 뉴욕에서는 복불복 게임 같은 등장에, 가능성이 큰 상영관을 점치며 n회차를 도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러나 한 뉴욕 시민의 꿈은, 팀이 프랑스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좌절되었다.
그리고.
도현은 현재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있었다.
두 번째 공식 시사회 참석이 프랑스로 배정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원작자인 마리아 그라시아의 모국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녀에 대한 예우뿐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태생 탓인지 프랑스에서 에 보내는 관심은 지대했고, 그렇기에 충분히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도현은 등받이에 기대 피곤한 눈을 깜빡였다. 옆에는 헤레이즈가 잠들어 있었다. 뉴욕 내 영화관을 돌아다니고, 인터뷰도 소화하고, 프랑스로 떠나기까지 하니까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도현은 영화를 틀까 하다가, 헤레이즈가 깰지도 모른단 생각에 조용히 포기했다. 대신에 미리 챙겨왔던 소설책을 꺼냈다.
는 아니었고,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이번에 시사회 끝나고 헤레이즈, 신시아와 함께 파리 오페라 극장, 가르니에 궁-Opéra Garnier-에 놀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놀러가기로 정한 날, 예정된 공연은 없었다. 그래서 공연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책을 펴든 도현은 약간의 향수에 잠겼다. 오페라의 유령은 도현과 인연이 있었다. 델마 아카데미 시절, 이탈리아에서 샀던 가면을 쓰고 <오페라의 유령> 에릭 분장을 했었으니까 말이다.
도현은 그리움 반, 반가움 반의 심정이 되어서 페이지를 넘겼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현재의 감정은 넘겨두고 소설 속 세상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 뒤.
도현은 공항에서 내렸고.
- 여기 좀 봐!
- 얘들아!
“……?”
공항에 가득 찬 인파를 볼 수 있었다….
당황한 도현이 헤레이즈를 돌아보았지만, 그도 비슷한 처지였다. 신시아마저 놀랐는지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있었다.
찰칵!
그때,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뭔… 레드카펫 같네.”
헤레이즈의 중얼거림에 도현이 동의했다. 레드카펫에서 환호받은 적은 꽤 있었지만, 이렇게 공항을 오고 갈 때 격렬한 환호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프랑스에서 의 인기가 높다는 걸 듣긴 했다. 그런데 그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페어리 측에서는 이미 예측한 모양이었다. 고용된 경호원들이 익숙하게 길을 텄다. 세 아이가 얼빠져 있자, 레비가 도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
도현은 그제야, 이 인기가 오로지 에서 비롯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단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이상하게 굴어서 잠깐 잊고 있었지만, 레비 올란도는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 배우 중 한 명이었다.
- 레비! 레비!
역시나, 그의 이름이 가장 크게 들렸다.
도현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먼저 나아가자 헤레이즈가 화들짝 놀라며 옆에 따라붙었다.
“혼자 가면 어떡해!”
“…안 돼?”
“아.”
도현의 물음에 헤레이즈가 애매하게 탄식했다. 이내 그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잠깐 미쳤나 보다.”
현타가 온 듯한 표정에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만, 이번에는 먼저 나가지 않고 헤레이즈가 제정신을 찾기까지 기다려 주었다.
인파 사이를 헤치고 나가자 여기저기서 붙잡으려는 손길이 뻗어졌고 카메라의 셔터음이 터졌다. 도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 르옌! 르옌이 날 봤어!
그들은 진심으로 기쁜 얼굴이었다.
문득, 도현은 프랑스에서 전날에 영화가 개봉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들이 이미 영화를 한 차례 본 관람객이란 것도.
아, 그랬다. 그는 지금 그의 연기를 본 사람들의 생생한 감정 앞에 서 있는 거였다. 정제되지도, 다듬어지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상 속에.
의식하지 못한 사이, 도현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떠올랐다.
* * *
간신히 차에 올라타, 숙소까지 오는 데 성공한 도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 위에 늘어졌다.
장시간 비행에다가 예상치도 못한 인파를 만나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도현은 침대에 반듯이 누운 채로 눈을 깜빡였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 할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시간부터 확인해야겠단 생각에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응?”
카톡에 들어가니, 1학년 2반 단톡방 메시지가 +500만큼 쌓여 있었다. …대체 얼마나 떠든 거야. 그렇게 말을 많이 하면서, 또 할 말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문득 단톡방을 확인한 지도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채팅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올라온 메시지 하나가 도현의 눈길을 끌었다.
- 암튼 이도현 몰래 은밀히 이루어져야 함
뭐를 나 몰래 해?
- 나도 알려줘 ^^
그 순간 빠르게 올라가던 채팅방이 뚝 멈추었다. 약간의 데자뷔가 느껴져서 도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 ㅇㄴ
누군가의 경악이 시작이었다.
- 미친 새끼야ㅏㅏ
- 반 단톡에서 랄지하면 어캄;;;
- 그래서 어뜨캄?
- ㅁㄹ 좃댐
- 저 새끼 주리를 틀어버려
“…….”
처음엔 가볍게 물어본 거였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너무 격하니까 점점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뭐길래 이래.
- 아아아아아ㅜ무것도 아닙니다 형님ㅠㅠㅠㅠㅠ
- ^^
- 진짜 레알 진심 암것도 아님 맹세 가능
- ^^
- 아 그렇게 웃지 마시구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 아ㅠㅠㅠㅠㅠ이라ᅟᅮᆫ이ㅏᅟᅮᆯ미ㅏㅜ냐ㅜ퍼이퓨ㅠㅠ
살짝 찌를 때마다 격하게 반응하는 서일준에 도현이 상당히 흥미로운 낯으로 핸드폰 화면을 볼 때였다.
- 사실
- 우리 패파 다 같이 보러 가기로 했어
- 깜짝 인증으로 놀라게 할 거였는데
- 서일준이… 다 말했네?
- ㅋ
- 암튼 이거야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한설아였다. 도현은 잠시 그 메시지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문장을 완성해서 올렸다.
- 진짜? 전혀 몰랐는데…
- 다 같이 본다니까 좀 떨린다
- 고마워, 애들아^^
도현은 그 후로 올라오는 메시지에 적당히 답장하고 단톡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장 하단으로 내려가, 한 이름을 찾았다.
도현은 별다른 고민 없이 채팅을 보냈다.
- 일준아, 안녕.
돌아오는 답은 극적이었다.
채팅인데도 그가 펄쩍 뛰어오른 게 눈앞에 보일 정도였다. 도현은 언어인지 외계어인지 모를 것들을 잔뜩 보내는 일준을 기다려 준 후에 본래 목적을 꺼냈다.
- 설아가 말한 거, 아닌 거 알아.
- 그래서 나 몰래 은밀히 하려던 게 뭐야?
- 나 너무 궁금한데
- 알려주면 안 될까?
읽음 표시는 사라졌건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오 분 정도 지났을까. 미적미적, 느리게 한 문장씩 채팅방에 올라왔다.
- 일준이가ㅠ 시러하는 ㅠㅠ
- 밸런스 ㅜ 게임 ㅠㅠ
- 모르고 행복하기 vs 알고 고통받기
- 어느 쪽이신가여…ㅠ
도현은 곧장 후자를 골랐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가장 최악인 건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이니까.
- https://www.youtube.com/atch?v=cj0iwvberssf-Ac
- 여기요 ㅠ
링크를 눌러, 그가 보낸 영상을 확인했다. 틀자마자 나오는 강렬한 글씨의 제목에 도현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Utube]
[이도현 망했다, 캐스팅 폭망에 영화까지 망쳤다 말 나오는 이유(실시간 이슈)]
올해 본 것 중에 가장 강렬한 문장일 게 분명했다. 잠깐 손가락으로 핸드폰 옆면을 툭툭 두드리다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가면 쓴 사람이 등장하며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배우 이도현이 영화를 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소년은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 듯했으나, 중간쯤 가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검은 눈동자가 심드렁한 빛을 띄웠다.
그 눈동자에 다시 빛이 들어온 건 서일준에게서 고민의 흔적이 가득한 메시지가 왔을 때였다.
- 이거 우리 반 애들이 다 신고했고 악성 댓글은 다 피뎊 땄어
- 저 유튜버나 악플 단 인간들
- 다 할 짓 없어서 인터넷에서 열등감 푸는 사회부적응 패배자들뿐이니까
- 진짜 신경 쓰지 마
- 다 헛소리야
- 알았지??????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이걸 본 반 애들이 놀랐을 걸 생각하니까 마음이 쓰이기도 했고, 저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했을 걸 생각하니까 조금 웃음이 나기도 했다.
- 나 몰래 하려던 건 뭐야?
이어서 돌아온 답장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인실좆’, ‘철컹철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긴 했지만, 요지는 이거였다.
나를 걱정해서, 증거를 모아 소속사에 보내려고 했다고….
아.
도현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숙소의 밝은 형광등이 손바닥에 가려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그 상태에서 한참을 있다가.
“…진짜 미치겠네.”
한숨처럼 내뱉었다.
비난과 조롱을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은 익숙했다. 병원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 나와서도 그것들은 도현을 따라다녔다. 그러니 이제 와 이런 것에 놀라기엔 늦어도 한참 늦었다.
게다가 이 동영상에서 말하는 건 결정적인 증거나 실제 사실도 아니지 않나. 넘겨짚기와 부풀리기, 그리고 어떠한 목적성을 띤 욕망의 집합체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서일준이 고민 끝에 보내준 게 아니라면 끝까지 듣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4분의 시간이 낭비라고 느껴질 만큼 무의미했다. 방금까지 실제로 영화를 보았던 이들의 생생한 반응까지 경험했기에 더욱.
그러니 이렇게까지 걱정하고 눈치를 봤다는 게 웃기고, 약간은 황당하고, 그리고….
“왜 이렇게 귀엽지.”
너무 귀여웠다.
도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 헤레이즈도 무심코 그를 걱정했던 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나 싶다가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한숨처럼 웃은 소년이 짧은 고민 끝에 한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신인은 경찬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