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화. 패스파인더 : 얼어붙은 숲 (9)
“왔다!”
“뭐? 왔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의 눈빛이 한순간에 돌변했다. 그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 흠칫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저 새끼 잡아!”
“주리를 틀어버려야 해!”
친구들에게 인사하려고 손을 들어 올렸던 서일준이 슬금슬금, 손을 내렸다. 무언가 단단히 망했다는 걸 깨닫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뒷걸음질을 칠 때였다.
텁!
“어딜 가려고?”
“흐꺅!”
서일준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음산하게 웃는 한설아가 있었다. 서일준의 동공이 거세게 떨렸다.
“저, 반장.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교통사고도 일부러 내는 사람은 거의 없어.”
할 말이 없었다. 서일준이 오들오들 떨고 있자, 그의 어깨를 쥐었던 한설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잘 넘어갔으니까 봐준다.”
한설아는 본래의 착실한 모습으로 돌아와 선하게 웃었지만, 서일준의 간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게, 그렇지 않은데요.
서일준은 자신이 그 영상을 보내주었다는 걸 알렸을 때 일어날 일을 상상해 보았다. …괜히 상상했다. 그가 바르르 떨었다.
“왜 떨어? 화장실 가고 싶어?”
“아니요….”
“그럼 가서 애들 다 왔는지 확인이나 하자.”
“넵!”
빠릿하게 답한 서일준이 도착한 아이들의 수를 세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눈을 부라리는 아이들에 조금 쫄기는 했지만, 꿋꿋이 모른 척한 끝에 인원 파악을 끝냈다.
그들은 반 아이들이 다 모였단 걸 확인한 후, 상영관 앞으로 이동했다.
토요일, 거기다가 개봉 첫날이 겹치니 영화관은 거의 장터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커플끼리 온 사람, 가족 단위로 온 사람, 친구들과 온 사람, 혼자 온 사람… 그러나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1학년 2반 무리였다.
주말에 반 아이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거기다 1학년 2반에 유독 배우와 아이돌 지망생이 많아서 더욱 눈에 띄었다.
상영관 앞에 도착한 아이들은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혹시 몰라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도착했기 때문에 입장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아서 콜라를 쭉쭉 마시던 서일준은 귓가에 들려오는 이름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도현 어떻게 나왔을지 너무 궁금해!”
“빨리 보고 싶은데 시간 왜 이리 안 가냐.”
여기도 이도현.
“엄마. 이 영화에 이도현 나오는 거 알아?”
“이도현? 베니스 걔?”
저기도 이도현.
곳곳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니 표정이 괴상해졌다. 새삼 영향력이 엄청나구나 싶기도 하고, 뭐랄까….
“뭐지, 나 왜 뿌듯하지.”
“너도? 야, 나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어깨가 치솟은 반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낯으로 말했다. 그제야 서일준은 정확한 표현을 찾아냈다.
우리 집 장남이 집 밖에서 사람들한테 인정받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 대견한데 신기하고, 또 약간은 이상한 기분.
“근데 이도현 못했다던데.”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서일준의 또래로 보는 여자아이 두 명이 있었다.
“개같이 망한 거 아님?”
“진짜면 대리 수치 오질 듯.”
다른 아이들도 그 대화를 들은 듯 안색이 나빠졌다.
그때, 누군가 말을 꺼냈다.
“우리 메일 보내는 건 그대로 하는 거지?”
“응, 정리 거의 다 끝났어. 월요일에 보낼 거야.”
그 말에 대답한 건 한설아였다.
서일준은 메일이란 단어가 등장한 순간부터 입에 딱풀을 붙인 것처럼 침묵한 채, 시선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그의 귀로 친구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보낸다고 해서 확인은 할까? 확인해도 고소 안 하면….”
“그건 그래.”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그것도 그래.”
“넌 대체 무슨 쪽이야?”
“그러게?”
아이들의 얼빠진 대화를 들으면서 서일준은 착잡한 눈빛을 했다.
그거 내가 다 망쳤어, 애들아.
물론 생각보다 엄청나게 최악인 상황은 아니었다. 영상을 본 이도현의 반응은 정말 쿨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안심하기는 일렀다.
뭐든 진실이 더 뼈아픈 법이라지 않나. 그 영상이 정말 루머일 뿐이라면 괜찮다. 그러나 만약 루머가 아니라 실제가 된다면….
그때는 정말 최악의 실수를 한 게 되어버린다.
그의 머릿속에 걱정이 무럭무럭 자랄 때.
“어, 입장한다!”
“우리도 들어가자! 다들 일어나!”
상영관 입장 시간이 되었다.
서일준은 복잡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이 상태로 영화를 본다고 해서 집중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도현 언제 나오나 걱정만 하지 않을까.
* * *
툭.
어깨를 건드는 손길에 서일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야, 정신 차려. 영화 끝났어.”
“…어, 어?”
서일준이 멍청히 답했다.
끝났다고?
…이렇게?
서일준은 영혼이 나간 채로 친구들을 따라서 상영관을 나오다가, 빈 콜라 컵을 버리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이도현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그는 순간 자신이 말한 줄 알았다. 그러나 말을 꺼낸 건 그가 아니라, 그처럼 허탈하고도 허망한 낯을 한 친구였다.
그는 중얼거리듯 한마디를 더했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이도현 걱정이었어.”
그 말에 반 아이들은 제각기 반응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아이들, 그렇다며 맞장구치는 아이들,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아이들. …다 똑같은 반응인 거 같기도 하고?
짝!
찰진 소리가 들리자 서일준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반 여자애가 제 뺨을 찰지게도 때리고 있었다. 그에 놀란 서일준이 대체 뭐냐고 묻자, 옆에서 그녀를 토닥이던 친구가 대신 답해주었다.
“이도현이 잘생겨 보인대.”
“…걘 원래 그렇게 생겼잖아?”
“그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뭔데?
타이밍 좋게, 뺨을 내리치던 소녀가 울먹였다.
“결혼 지장 찍자고 하면 도현이가 앞으로 나 상대 안 해주겠지?”
“응, 참아.”
“근데… 말은 해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참아.”
서일준은 조용히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1학년 2반을 공포와 충격에 몰아넣었던 동영상 댓글을 다시금 확인했다.
- 응 패스파인더 대박 났죠?
- ㅋㅋㅋㅋㅋ이도현이 망했댘ㅋㅋㅋㅋ
- 유튜버님, 영화 보셨으면 영상 지우세요.
- 나 진짜 어이없어; 이거 때문에 괜히 걱정했는데 ㅈㄴ 괜한 걱정이었음
⌞ 결론 = 관종은 무시가 답.
기존에도 옹호 여론이 태반이었지만, 그건 이도현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단 윤리와 도덕에 기반한 호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를 본 사람들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며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한참 댓글을 확인하던 서일준은 화면 상단에 뜬 카톡 알림에, 카톡창에 들어갔다. 그러자 놀라우리만치 쌓인 메시지가 보였다.
강호이호이 21
지릴 뻔 ㅎㄷㄷ 방금
정강태 3
야야 너 걔랑 많이 친해? 10분 전
한은솔 4
엄청 멋있더라???? 15분 전
쭉쭉, 내려도 내려도 있었다.
친한 친구가 감상평을 쏟아낸 것도 있었고, 번호만 저장된 사이에 갑작스레 메시지를 보낸 사람도 심심찮게 있었다.
이도현과 같은 반이 되고 나서 연락이 쏟아졌던 일주일을 제외하면,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이도현이 신휘민과 예능에 나왔을 때도 이만큼 쏟아지지는 않았다.
카톡 답장은 미뤄 놓고, 서일준은 네이버에 들어갔다. 기사를 찾을 필요까지도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최신 인기 뉴스로 그가 찾는 내용의 기사가 떴다.
그곳의 댓글 또한 긍정적이었다.
- 존잼 ㅠㅠㅠ 2편도 나왔으면…
- 대작 탄생했다
- 아니 ㅅㅂ 이러고 끝나면 어떻게 기다리라고 ㅠㅠㅠㅠ
- 캐스팅 대박인 듯
- 애들 연기 왜 이렇게 잘해? 미쳤네
- 진짜 너무 기쁘다… 원작 200% 반영임 진짜 ㅠㅠ
그 유튜버가 가져왔던 평론과 달리, 원작과 비슷하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화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원작 팬들은 소설을 충실하게 재현한 영화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거기까지 읽은 서일준은 핸드폰을 껐다. 그는 흥분에 차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남자애들 무리에 끼어들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랑 한 번 더 보러 올 사람.”
많은 수의 손이 일제히 올라갔다.
서일준은 다음 예매는 언제로 할지 고민하면서 한 가지 진리를 깨닫고 말았다.
말마따나,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이도현 걱정이었다.
* * *
월요일 아침.
새솔 엔터테인먼트는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인터넷 반응 봤어요?”
“완전 대박 났던데요!”
새솔 엔터의 직원, 이주현이 상기된 낯으로 답했다. 그녀는 주말 동안 영화를 보고 온 관람객이기도 했다. 아니,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안 본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들은 월요일 아침에 출근한 직장인답지 않게, 커피 머신 앞에 삼삼오오 모여서 한 가지 주제로 수다를 떨어댔다.
“액션 너무 잘 뽑혔지 않아요?”
“네, 액션도 진짜 멋졌죠. 게다가 전 그 영상미가….”
“전 그 호르헤라는 캐릭터가….”
그들과 수다를 떨면서, 이주현은 속으로 안심했다. 한국에서 개봉하기 전에 워낙 잡음이 많아서 걱정스러웠는데… 결과물이 너무 괜찮았다.
“해외에서도 반응 좋은 거 같죠?”
김 대리의 질문에 직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 도현이 새솔의 손을 떠나 있다지만, 그렇다고 새솔에서 배우의 모니터링을 멈춘 건 아니었다.
얼마 전 프랑스 시사회도 성공적으로 마친 거 같고, 영화가 개봉된 세계 각국에서도 호평이 들려오고 있었다.
물론, 완벽하게 100%의 호평까지는 아니었다. 역시나 1편에서 적은 분량이 걸림돌이 되었는지, 여전히 도현을 르옌 누바라로 인정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있긴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목한 건 그런 여론이 있다는 게 아니었다. 그건 영화 촬영 전부터 있었던 목소리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거기에 대응해서 ‘윤리’나 ‘인종차별 금지’를 내세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는 완벽한 캐스팅이었다’라는 주장으로 맞선다는 거였다.
게다가 개봉 이전에는 반대 80, 옹호 10, 무관심 10 정도의 비율이었다면, 지금은 50 대 50의 팽팽한 대립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 한 편의 영화, 몇 분 남짓의 짧은 등장으로 해냈다기엔 놀라운 결과물이었다.
“어, 다들 모여서 뭐 해요?”
그때, 딱 등장한 팀장에 직원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김 대리였다.
“영화 얘기를 좀….”
“영화? 아, 다들 그건 들었죠?”
그의 말에 직원들이 눈빛을 바꾸었다. 특히 이주현은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새솔은 법적 대응 갑니다. 상영관에서 영화가 내려간 순간 공식적으로 발표할 거예요. 지금 배우의 직접적인 케어는 CLA가 하고 있으니, 국내 여론 정도는 우리가 관리해야죠.”
그 말에 이주현은 대표가 노발대발하며 이런 건 초장부터 잡아놓아야 한다고, 절대로 만만히 보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그 옆에서 옳다는 듯이 맞장구치던 경찬호까지 말이다.
새솔 직원들은 저마다 전투적으로 타오르며 자리로 갔다. 이주현도 제 책상 앞에 앉아서 메일함을 열었고.
✉[안녕하세요, 배우 이도현 악성 댓글 및 루머 유포자를 제보합니다.]
한 메일을 발견하고는 웃었다.
경찬호 팀장의 말대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