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93화 (394/582)

제393화. 패스파인더 : 얼어붙은 숲 (11)

“대답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

오스카가 도현을 감싸며 단호히 말했다. 그편이 현명한 대처라는 데 동의한 도현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경호원들이 막고 있는데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기자들이 있었다.

“남자와 초면이었어?”

“해당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뭐라도 하나 얻어걸리길 바라는 심정인지, 기자들은 되는대로 질문을 내뱉었다. 이에 오스카는 얼굴을 굳혔다.

이슈 한번 만들어 보려고 유명 인사를 자극하는 질 낮은 기자들은 이 판에서 흔하다. 거기에 화가 나서 감정을 표출하거나 욕설을 내뱉으면 더욱 좋다. 기삿거리가 되니까.

얼마 전만 해도, 유명 배우 한 명이 카메라를 부숴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끈덕지게 따라붙던 기자 한 명이 조롱을 쏟아내서였다.

오스카는 플래시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품에 안듯이 감싼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감정을 알 수 없는 흰 낯 위로 긴 속눈썹이 조금 빠르게 팔랑거렸다.

오스카는 도현의 뒤로 따라붙는 칭호를 떠올렸다.

최연소 수상 기록을 가진 천재.

운이 아니라는 듯이 증명해 보인 두 번째 영화의 흥행.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어이 의 주연을 따낸 소년.

만약 의 흥행이 저조했다면 놀랍기는 해도 딱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결국엔 한계를 보이고 만 천재, 반짝 빛나다가 사그라드는 별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

누군가는 추락을 바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승승장구하는 걸 보는 것만큼, 나락에 떨어지는 걸 구경하기를 좋아하니까.

그러나 는 그들의 기대를 비웃듯이 예상을 뛰어넘은 매출을 올리며,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그로 인해 관심이 집중된 사람은 둘이었다.

한 명은 헤레이즈 아이데.

다른 한 명은 이도현.

그러나 주목의 대상이라는 점만 같을 뿐, 그 의도나 방향은 확연히 달랐다.

헤레이즈를 향하는 게 새로 탄생한 스타에 대한 기대라면… 도현에게 향하는 것은 조금 더 의뭉스럽고, 얼룩져 있었다.

‘공교롭지.’

극 중에서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둘이 현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니. 배역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근거리에 있던 기자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기분은 어땠니?”

그리고 오스카는 품 안의 소년이 작게 실소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심정에 조심스레 살폈으나, 불쾌함 이상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스카는 안도했다.

크게 상처받지는 않은 거 같았다.

이제 그들을 픽업하러 온 차량에 가까워졌다. 걱정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일단 이곳을 무사히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조금만 더 참아.”

오스카가 도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작은 머리통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오스카는 도현이 들었음을 확신했다.

드르륵!

차 앞에 선 오스카가 먼저 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며 한발 비켜서자, 도현은 금방이라도 올라탈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탑승하기 직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놓고 온 사람처럼, 사뭇 자연스럽게.

아늑한 차 안이 아니라, 플래시를 터트리는 기자들 쪽을 쳐다본 소년은.

“잘 모르겠네요.”

유감스러운 듯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제가 조금 바쁜 편이라 잊어버렸거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차에 올라탔다. 조금 벙벙히 있던 오스카가 황급히 따라 올라타며, 문을 닫아버렸다.

곧장 차를 향해 기자들이 몰아닥쳤다. 창문을 통해 그 어지러운 풍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러나 곧 출발한 차로 인해서 그 풍경은 빠르게 멀어졌다.

“도현, 너….”

그가 운을 떼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년이 그를 응시했다. 희고 앳된 낯이 시야에 들어오자 오스카는 정신이 맑아졌다.

“…다음번에는 조심해. 괜히 트집 잡히면 안 좋으니까.”

잔소리는 거기까지만 했다.

누구보다 놀랐을 사람이 도현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생각해보니, 그다지 문제 될 부분이 없었다.

모욕도 조롱도 없다. 기자들이 물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준 것도 아니다. 이렇다 할 명확한 감정 상태 대신에, ‘바빠서 잊어버렸다.’라고 말했다.

“괜찮아? 이 문제는 우리 측에서 잘 처리할 건데, 가장 중요한 건 네 의견이야. 네가 원한다면 상대를 고소하는 것도 가능해.”

“음….”

“지금 당장 생각하라는 거 아니야. 지금은 그냥 쉬어. 담요 좀 덮고… 마실 것 좀 줄까?”

그가 안절부절못하자 도현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괜찮아요, 오스카. 그렇게 유리구슬 다루듯이 하지 않아도 돼요. 저 정말 괜찮으니까. 잊고 있었단 말 진심이거든요.”

“그, 그거 진짜였어? 비꼰 게 아니라?”

“무슨 소리예요.”

그 대답에 오스카는 굉장히 멋쩍어졌다. 내가 너처럼 한가한 줄 아냐는 비꼼인 줄 알았다. 별거 아닌 대답으로 정신 나간 인종 차별자와 기자들을 동시에 물 먹여서 내심 감탄했는데….

그보다 순수한 대답이었구나.

‘너무 어른으로 봤나.’

오스카가 반성할 때였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도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연히 비꼰 거죠.”

“…당연한 거구나.”

그는 반성을 넣어두기로 했다.

떨떠름한 눈빛을 하는 사이, 도현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걸 멀거니 보고 있던 오스카는 뒤이어 든 생각에 황급히 물었다.

“너 뭐 하려고?”

“음….”

뭔데, 왜 미적대는데.

불안한 예감이 그를 관통했다.

그리고.

“그 영상 좀 보려고요.”

어째 부정적인 예감은 빗겨 가는 법이 없었다. 낯빛이 푸르죽죽해진 오스카가 만류해 보았지만.

“이미 겪은 일인데 안 본다고 달라지나요. 그리고 아까도 봤잖아요.”

무척이나 부드럽게 그 걱정을 흘려 넘긴 도현이 막을 새도 없이 유튜브를 틀었다. 태연하다 못해 추울 정도로 냉철한 태도였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오스카도 제대로 못 봤죠? 같이 봐요.”

권유까지 하는 모습에 오스카는 말문이 막힌 채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이게 뭔 상황이지.’

영화 관람도 아니고, 망할 백인 우월주의 머저리가 등장하는 유튜브 영상을 같이 시청하는 상황이라니….

- 아서! 아서!

- 르옌!

이것저것 잡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재생되고야 만 영상에 오스카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체념한 그의 눈에 그때의 광경이 펼쳐졌다.

영상의 주인은 기자가 아니라,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했던 일반인인 모양이었다. 화면이 계속해서 흔들렸다.

‘우리 애 팬인가?’

카메라는 도현을 따라다녔다.

그 탓인지 넘어지려던 헤레이즈를 도현이 잡아주고, 그들이 어딘가를 응시하는 게 화면에 고스란히 잡혔다. 그들이 보는 게 궁금했는지 카메라도 그 방향을 따라서 움직였고.

그 남자가 보였다.

촬영자가 놀란 듯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이어서 ‘What? Fucking asshole!’ 하는 거친 욕설이 쏟아지다가, 불시에 영상이 끝났다. 흥분한 탓에 실수로 촬영을 종료한 거 같았다.

“…이제 만족해?”

“네, 궁금한 건 해결됐거든요.”

반쯤 포기한 오스카가 한 질문에 도현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에 오스카가 무엇이냐는 듯이 묻자, 도현이 영상이 멈춘 화면을 쳐다보았다.

“영상은 가지고 있었을 텐데 늦게 공개해서 의아했거든요.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 알고 싶었는데… 알 것 같네요.”

어떻게 해야 이 와중에 그런 게 궁금한 걸까.

오스카는 도현을 꽤 오래 봐 왔지만, 때때로 알기 어려웠다. 특히,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을 보일 때 말이다.

“저 진짜 괜찮아요. 아, 그리고 고소는 안 해도 돼요.”

그래. 이럴 때 말이다.

“왜? 너무 섣부르게 결정할 필요는….”

“다시 말할게요.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어요. 그럼 또 거기로 주의가 쏠릴 거 아니에요.”

게다가 말문이 막히게 하는 재주도 탁월했다.

“오스카, 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불쌍한 동양인 소년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일상적인 어조였다.

“제가 바라는 건, 그들이 제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보단 영화에 집중해주는 거고요.”

그렇기에 더욱 와닿았다.

소년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난 것 같아서.

하지만 오스카는 이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도현을 봐 온 이로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네 마음 이해해. 넌 연기에 누구보다 진심이니까. 하지만 도현, 너는 이런 대우에 익숙해지면 안 돼.”

오스카는 도현의 저러한 태도가 타고난 염세적 태도와 맞물려 발생한, 일종의 체념이 아닐까 싶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고, 저들은 계속 저럴 테니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체념 혹은 포기.

“그건 아니에요.”

그 생각을 부정하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건 헤레이즈한테도 말한 건데, 저는 자신이 있거든요. 결국은 제가 옳다는 걸 증명할 자신이요. 그때가 되면 다들 알 거예요. 누가 틀렸고 누가 맞았는지. 누가 우스워졌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도현의 얼굴 위로 어렴풋한 미소가 어렸다.

“꼭 공권력이 아니더라도… 벌은 받을 거 같아서요.”

의뭉스레 말한 도현이 핸드폰을 톡, 톡 두드렸다. 그는 찾았다, 라는 말과 함께 오스카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괜히 끼어들어서 귀찮아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것을 본 오스카는 왠지 목덜미가 조금 싸해지는 기분이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감싸 안으며, 눈앞의 소년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며칠 뒤.

도현은 뉴스에서 우연히 그에 관련한 소식을 접했다.

그가 작은 기업의 사장이었으며, 이로 인해 주가가 폭락했다는 것.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 협력사 또는 고객의 보이콧이 이어지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사장 자리에서 퇴임했다는 것까지. 그럼에도 여전히 기업 이미지는 회복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CEO였다는 것은 의외였으나, 그 외의 것은 예상대로였다.

‘정보력이 발달해서 그런가.’

그날, 도현이 오스카에게 보여주었던 건 그 남자의 인별이었다. 누군가 그의 신상을 밝힌 탓에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로 점철되어 있던 인별.

이어지는 뉴스에 도현은 죄 없는 직원들이 조금 안타까웠으나 곧 신경을 거두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생각하면 정작 중요한 건 챙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선인 건 주변과 본인의 안위였다. 텔레비전을 끄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딱, 그 정도의 관심이 전부였다.

2* * *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도현은 황급히 달려오는 인형을 발견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반갑게 웃었다.

“니키.”

후, 숨을 내쉰 니콜라스가 그를 쳐다보았다. 수영 선수이니 폐활량이 뛰어날 텐데도 숨이 거칠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게 분명했다.

“벌써 가?”

“응. 이제 가야 해.”

길다면 긴 일정이 끝났다.

이젠 정말 한국으로 돌아간다. 샌디에이고에 들러서 짐만 챙긴 후 다음 날 곧장 한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지금은 잠깐 짬을 내어 뉴욕에 거주하는 니콜라스를 보러 온 참이었다.

니콜라스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잘 나오지 않는 거 같았다. 이내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도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서도 잘 지내라.”

“…너도.”

두 번째 이별인데도 이토록 아쉬운 이유는 뭘까. 도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친구랑 멀어지는 건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 없는 사이 눅눅해지지 말고.”

그 정겨운 말에 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흠, 흠. 다음에 또 봐.”

“물론. 연락할게.”

“그래! 바쁘다며, 빨리 가!”

니콜라스는 이런 분위기가 견디기 힘든 듯, 도현의 등을 떠밀었다. 도현은 크게 웃으며 그가 미는 대로 밀렸다.

차에 올라타 창문을 내리니,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니콜라스가 보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다가 비슷한 타이밍에 씩 웃었다.

“조금 더 있다가 와도 되는데.”

서혜나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가요.”

잠시 후, 차가 느릿하게 출발했다.

도현은 창문을 계속 열어 놓은 채로 니콜라스를 보다가 손을 흔들었다. 점점 작아지는 니콜라스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가 아주 작아져서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손을 내린 도현은, 창문을 닫지 않았다. 대신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걸 가만히 느끼다가 징징 울리는 핸드폰에 잔잔하게 웃었다.

다시, 돌아갈 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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