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94화 (395/582)

제394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

거울 앞에 선 소년이 고개를 좌우로 틀어보았다. 전날에 짧게 자른 탓에 시원해진 목덜미가 생경했다. 괜히 머리카락을 매만져 보다가, 슬쩍 웃었다.

얼마나 오래 길렀다고.

겨우 두 달 정도 길이를 유지했을 뿐인데 짧아졌다고 어색해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털어내자 곧게 펴진 생머리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거울에는 아주 익숙한 모습이 있었다.

주름 한 점 없이 빳빳한 동복 와이셔츠와 바르게 맨 넥타이, 그 위에 걸친 동복 가디건. 그리고 여느 때처럼 단정한 머리카락.

제 모습을 확인한 도현이 책상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메고 문밖을 나섰다. 그러자 거실에 있던 부모님이 현관 앞까지 걸어와 배웅해 주었다.

“잘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

탁, 삐리릭-.

현관문을 나서니 도어 록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오니 이른 아침의 공기가 도현을 반겼다.

오랜만의 등굣길이다.

고요한 시간을 만끽하다가, 도로가 나타날 즈음에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도현의 플레이리스트는 진이 추천해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일렉베이스의 브리티시 록이 흘러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금방 학교에 도착했다. 이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교무실로 향했다. 너무 일찍 왔는지 아직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서 곤란했는데, 경비원과 마주쳐서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은 도현은, 열쇠를 반납하고 돌아왔다. 텅 빈 교실 자리에 앉아서 턱을 괴었다. 시선은 창가를 향해 있었다.

톡, 톡. 흰 손가락이 일정한 박자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멈춘 건,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을 때였다.

“!”

창가 자리에 앉은 소년을 발견한 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랐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에 도현은 희게 웃었다.

성공적인 서프라이즈였다.

* * *

“진짜, 어떻게 말도 안 하고 올 수 있냐고.”

서일준은 억울함에 투덜거렸다.

당번이라 일찍 등교했더니 자물쇠가 풀려 있었다. 이 시간에 등교하는 애가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함을 느끼며 문을 열자, 한동안 기사 사진에서 주구장창 보았던 인물이 거기 있는 거 아닌가.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근데 그 얼굴이 한 명 더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이도현이 학교에 온 것이다.

“미안. 근데 생각보다 더 놀라서 뿌듯하다.”

“말의 앞뒤가 다르다는 생각은 안 들고…?”

허망한 목소리에 도현이 작게 웃었다. 입꼬리를 따라 동굴이 생기며 흰 뺨에 생기가 돌았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서일준은 일순 넋을 놓았다.

“화도 못 내겠네….”

스스로 외모에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서일준보다는 이도현의 탓이었다. 바쁘게 살았으면 조금 초췌해져서 돌아와야지, 왜 발전하냐는 말이다.

그사이, 아이들이 하나둘씩 등교했다. 그들은 서일준과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월요일 아침에 좌절하며 좀비처럼 등장했다가, 도현을 발견하고 토끼 눈이 된다. 그다음 ‘이도현!’ 하는 비명과 함께 달려오면 끝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현의 주위에 모인 원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도현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외출했다가 둥지로 돌아온 어미 새가 된 기분이야.”

“뭐?”

황당하다는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서일준도 마찬가지의 심정이 되어 도현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쟤가 외국 물을 먹고 오더니 이상해졌네….”

옆에 있는 친구가 중얼거리자, 서일준은 어이없는 와중에도 오류를 짚어냈다.

“야. 쟨 원래 이상했어.”

“내가?”

의아한 빛을 띄우는 검은 눈동자에 서일준은 잘됐다는 심정이 되었다. 내가 얘한테 할 말이 얼마나 많았는데.

“너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어떻게 해야 거기서 그런 말을 해?”

“뭘 말하는 거야?”

“공항에서 말이야!”

“아.”

작게 탄식한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기사 사진에서 봤던 것과 다르게, 구불거리는 것 없이 곧게 펴진 머리카락이 고갯짓을 따라 흩어졌다.

“그게 왜?”

“…….”

서일준은 침묵했다.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라서 더욱 말문이 막혔다.

“…이런 게 난놈이구나.”

누군가 탄식처럼 뱉은 말에 다른 아이들이 동조하듯 한마디씩 얹었다. 쟨 원래 싹수부터 달랐어. 저래야 할리우드 스타 하나 봐. 우리가 포기하자… 이런저런 말들이 나왔다.

그 소란 속에서 서일준은 문득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도현이 3학년 선배들한테 냅다 들이박았을 때. 그때 정말 기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건 순한 맛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세상 순하게 웃는 저 애는 레드카펫에서 혐오 문구가 써진 티셔츠를 봐도 태연히 넘어가고, 특종을 잡으려고 눈이 벌게진 기자들이 달려들어도 제 할 말을 하는 애였다.

그런 애가 고작 학교 선배한테 굽히고 들어갈 리가 없었다. 전제부터가 성립되지 않는 문제였다.

‘하지만 선배들은 몰랐지….’

서일준이 뜨뜻미지근한 눈빛을 했다. 그 눈빛을 받은 도현이 어리둥절해하는데,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 별다른 소식은 없어?”

“소식?”

어, 이거.

“그냥. 한국에 온 뒤로?”

그 모호한 말에 반 애들이 제각기 반응했다. 그게 뭘 떠보는 말인지 깨달은 탓이었다. 그리고 서일준은.

‘아, 아는 척하면 안 돼!’

필사적으로 평온한 낯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반 애들은 그가 모든 걸 밝혀버렸단 사실을 몰랐다.

서일준은 도현에게 눈빛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안다는 걸 티 내지 말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그 간절함을 읽었는지, 도현이 태연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 온 후로는… 글쎄. 다음 달 초에 대본 리딩 들어간다고 들었어.”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자 몇 명이 실망하는 게 눈에 보였다. 도현은 계속해서 다른 이야기들을 늘어놓다가, 마지막으로 지나가듯이 말을 꺼냈다.

“아, 그것도 있네. 소속사에서 고소를 진행하겠다고 하더라고.”

거기까지 말한 도현이 씩 웃었다.

그 자연스러운 전개에 서일준은 감탄했다. 저게 바로 할리우드 짬바구나. 모르는 척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서일준은 속으로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한편, 도현은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하얗게 질렸다가, 안도했다가, 눈을 반짝거리는 서일준도 웃겼고. 그가 아무것도 모르리라 생각하고 은밀한 눈빛을 교환하는 반 애들도 그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간신히 웃음을 삼켜낸 도현이 다음 말을 이었다.

“근데 당장은 아니고….”

“왜!?”

“원래는 영화가 내려간 순간 고소 진행하려고 했어.”

도현은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들른 곳은 미용실이 아니었다.

새솔 엔터테인먼트였다.

곧장 새솔로 가서 고소 건과 관련해서 논의한 도현은, 결과적으로 고소를 미루기로 했다. 그것에 관해서 어떤 불안이나 두려움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시기가 별로였다.

“근데 아까 말한 것처럼, 곧 있으면 드라마 들어가거든. 거기에 신경이 분산되면 여러모로 성가실 거 같아서.”

적어도 도현에게 고소란, 합의 없는 처벌이었다. 합의할 거면 고소를 진행할 이유가 없다는 게 도현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또한 알았다. 그렇게 진행하게 되면 얼마나 일이 시끄러워지는지. 합의, 선처 관련해서 성가셔질 게 눈에 훤했다.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야. 아마 이번 주 내로 법정 대응, 강경 조치하겠다는 공식 발표가 뜰걸.”

도현의 말에 그러면 그냥 겁주기 식으로 여기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터져 나왔다.

도현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게 맞으니까.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멍청한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수습할 수 있는 실수와 그럴 수 없는 잘못. 도현이 생각하기에, 이건 전자였다.

공식 발표를 보고 과거의 행동을 후회한다면 그걸로 된 일이다. 누구나 두 번의 기회는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두 번째에서도 같은 선택을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야.’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아닌지, 여기저기서 불만과 걱정이 터져 나왔다. 아우성이 커지자 한설아가 나섰다.

“도현이랑 새솔이 생각이 있겠지. 우리는 응원이나 하자.”

도현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 쟤는 똑똑하니까….”

“…하하, 그런가.”

어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친구들에게는 합리적인 척 지껄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어디 가서 말하지 못할, 그러고 싶지도 않은 이유가 끼어 있었다.

캐스팅 논란. 레드카펫 테러. 한국에서의 루머. 영상 이슈. 그것들이 버겁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러나,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래. 도현은 조금, 지겨웠다.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 자주 노출되면 지친다. 도현의 경우 남들보다 무감한 편이긴 해도 감정이 완전히 마비된 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상처받진 않아도 피로 정도는 느꼈다.

말 그대로였다. 생각하니 또 피곤해지는 느낌에 더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았던 도현은 화제를 전환했다.

“그거 말고, 더 궁금한 건 없어?”

단숨에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질문이 쏟아져 나온 건 그다음이었다.

“델라 허진스랑 인사했어?”

“댄 KJ 실제로 보면 어때?”

“프랑스에서….”

마치 이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이 쏟아졌다.

“델라 허진스랑 인사는 나눴어. 댄 KJ는… 상상했던 것보다 친절하더라. 아, 사진도 찍었는데 볼래? 댄 말고도 있어. 음, 그리고….”

프랑스에서 가르니에 궁을 구경했던 것까지 말하고 나니, 담임 선생님이 반에 들어왔다. 아쉬워하는 반 아이들에 다음에 더 이야기해 주겠다며 능숙하게 어르고 달랜 도현은 선생님께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도현이 잘 다녀왔어?”

“네, 잘 다녀왔어요.”

그녀는 굉장히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래. 나도 여기서 계속 소식 듣고 있었어. 우리 반 학생이 해외에서 잘 해나가는 걸 보니까… 너무 멋지고 자랑스럽더라.”

선생님과 도현이 훈훈한 시선을 교환할 때였다. 서일준의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쌤, 저희는요?”

“너희는… 부끄럽지.”

“네에?”

“차별 반대!”

아이들의 성화에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도현은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돌아왔다니….’

언제부터 여기가 돌아올 곳이 되었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면면들이 보였다. 친구 사귀는 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고작 몇 달 전인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샌디에이고와는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그래. 도현은 돌아왔다고 느꼈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이곳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에 오길 잘한 건가.’

이전에 상상이나 했을까. 샌디에이고를 떠나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거기서 또 다른 안정감을 찾게 될 줄.

‘그리고….’

도현은 아주 오랜만에 한국에 왔던 본래 목적을 상기했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부채감을 덜어내고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왜 잊고 있었지.

그 문제를 떠나서, 그냥 가족 관계에 대한 어떠한 상념을 모두 잊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지? 도현이 차근히 생각을 되짚어갈 때였다.

“조용히 하고! 아무튼, 도현아. 이런 말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말해야만 하는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해 주렴.”

“네?”

뭐길래 이렇게 사설이 길단 말인가.

“다음 주에… 중간고사야.”

“…….”

길만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훈훈하게 웃던 도현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시험도 돌아와 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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