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95화 (396/582)

제395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2)

“도현아, 잘 다녀왔….”

“학교 다녀왔습니다!”

탕!

서혜나와 이장혁은 멍한 눈으로 아들이 있었다가 사라진 복도를 보았다. 심지어 이장혁은 소파에서 어정쩡하게 일어난 자세 그대로였다.

뭐지?

둘은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휘몰아쳤다. 드디어 사춘기가 찾아온 건가. 소음을 내며 닫힌 저 문은 가족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것인가 등등….

그러다 서혜나는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화가 나도 저런 식으로 표현할 애가 아니었다. 차라리 묘하게 싸늘하게 굴어서 상대를 가시방석으로 만들면 모를까.

깔끔하게 결론 내린 서혜나와 다르게 이장혁은 도현에 대한 파악이 덜 끝난 상태였다. 그는 다시 앉지도, 일어나지도 못한 채 충격에 젖은 눈을 떨었다. 평소엔 별 차이가 없다가도, 이럴 때면 서혜나가 도현과 함께 보낸 시간이 티가 났다.

툭. 사뿐히 등을 밀자 맥없이 밀려난 이장혁이 바로 섰다. 서혜나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에 들어가 보자.”

그래도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지.

* * *

“…어? 무슨 일이에요?”

두 사람이 도현의 방에 들어가서 맞닥뜨린 광경은 굉장히 일상적이었다. 인테리어 잡지에 실린 집처럼 깨끗하기만 한 방 안. 그리고 책상 앞에 반듯이 앉아서 책을 펼친 도현.

‘평소랑 똑같은데?’

고개를 갸웃한 서혜나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달라진 거 하나 없이 아침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엄마 아빠?”

“아니.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

“네, 있어요.”

“그래. 없구… 뭐?”

예상을 한참 빗겨간 대답에 서혜나가 놀라 되물었다. 도현이 의자를 빙그르, 돌려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 진중한 표정에 두 사람이 조금 긴장했다.

“다음 주가 중간고사예요.”

말을 이어갈수록 기다란 눈매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저 오늘에서야 알았어요. 딱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 근데 더 놀라운 건, 시험 범위마저도 오늘 알았다는 거예요.”

도현은 심각한 거 같은데, 서혜나와 이장혁은 뺨을 파들거렸다. 뭐 때문에 그렇게 심각해져 있나 했더니 학교 시험이었다.

미국에선 너무 어른스러워서 다 커버린 거 같았는데, 지금 보니 또 그 나이처럼 보였다.

“그, 그거 큰일이네.”

웃음을 참느라 흔들린 목소리는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도현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꿰뚫듯이 닿아오자 두 사람은 순간 웃은 걸 들킨 건가 싶어 흠칫했다.

“속상하긴 한데, 지난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부터 하면 돼요. 다행히 친구들이 교과서랑 노트를 빌려줘서요.”

책상에 한가득 쌓인 게 빌려온 교과서와 노트인 모양이었다. 시험이 일주일 남았다면 친구들도 필요할 텐데, 빌려줬다는 대목에서 두 사람이 고마움과 흐뭇함을 느낄 때였다.

쌓인 것들을 흘긋 쳐다본 도현이 찡그리듯이 웃었고.

“그래서 한동안 많이 바쁠 거예요. 봐야 할 게 많아서… 오늘부터 시작하려고요.”

부드러운 축객령이 떨어졌다.

타악.

두 사람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를 가로질러 거실을 지나, 안방에 들어간 두 사람은 토해내듯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무래도 그건 비밀이지?”

“응, 절대 안 돼. 무덤까지 가져가.”

서혜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두 사람은 도현의 중간고사 일정을 알고 있었다. 도현의 담임 선생님이 몇 주 전에 연락해서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말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애 과로사하는 건 못 봐.’

도현의 성격에 그걸 알면 가만히 있었겠는가. 두 사람이 판단하건대,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그냥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무조건 시간 날 때마다 공부했겠지….”

이장혁이 앓듯이 뱉은 말에 서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의 일정이 생각보다 널널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생각보다’였다. 그리고 고려해야 하는 건 직접적인 일정뿐만이 아니었다.

그 일정을 위해 비행기와 차로 이동해야 했던 시간, 시차 적응에다가 정신적인 피로까지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도현은, 필요하다면 위의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는 애였다. 서혜나와 이장혁은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원인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해결했다.

“너무 무리하면 안 될 텐데.”

하지만 더는 막을 수 없다.

솔직히 그들은 도현이 학교 시험에서 0점을 맞아 와도 상관없었다. AMC 성적에 기뻐하긴 했어도, 그건 그냥 부모로서 아이가 노력해서 얻어온 성과가 기꺼웠던 거였다.

서혜나가 바라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건강하게 자라주기. 모든 부모가 그렇다지만, 희귀병 이력을 가진 자식을 둔 부모로서 그녀는 더없이 진심이었다.

‘근데 본인이 욕심이 많지.’

자기가 하고 싶다는데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타고난 능력이 가득한 아이라서, 본인은 사실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서혜나는 제발 도현이 적당히 조절하면서 공부하길 바라며, 복잡한 숨을 내쉬었다.

* * *

“자, 국어 학습지 정리한 거.”

“고마워. 금방 돌려줄게.”

“충분히 보고 돌려줘도 돼. 그리고 이거. 선생님이 강조하신 부분 표시한 거야. 여기서 문제 내신다고 했으니까 참고해.”

“이런 거 다 알려줘도 돼?”

“어차피 다른 애들 다 아는 건데 뭐. 그리고 솔직히 너는 내 경쟁 상대가 아니야.”

보편적으로 상대를 낮잡아볼 때 쓰는 표현이겠지만, 이 경우에는 반대였다.

“어차피 안 빌려줘도 너는 나보다 점수 잘 받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한설아에 도현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히 보자면 저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중학교 첫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시점부터, 친구들을 봐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고마워. 나중에 나도 도울 부분이 있으면 도울게.”

“괜찮아. 별거 아닌걸.”

별거 아니라고 하기에, 지금까지 도현이 빌려 간 교과서의 과반수가 한설아의 것이었다. 그녀가 짝이자 반장이라서도 있지만, 그녀의 정리가 제일 꼼꼼하고 깔끔해서이기도 했다.

“진심이야.”

한설아는 머뭇거리다가 그래, 라고 답했다.

그녀는 호의와 감사가 가득한 검은 눈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할리우드 스타의 보은이라니. 저 말이 진담이라는 건 알겠는데,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짐작조차 안 간다.

그녀는 열심히 학습지를 훑고 있는 도현을 구경하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그대로 내뱉었다.

“나는 네가 시험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아, 성적 빼고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종이에서 시선을 뗀 도현이 그녀를 응시했다. 창가의 커튼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자 쓸데없이 과하게 화사했다. 얘는 다 좋은데, 가끔 이상하게 화보를 찍을 때가 있었다.

“경쟁에서 지는 건 싫어하거든.”

재능에, 실력에, 타고난 머리까지 있으면 의지 정도는 박약해도 되는 거 아닌가. 한설아는 잠깐 불공평함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현은 조용해진 한설아를 뒤로하고 눈앞의 글씨에 집중했다.

중학교 1학년 과정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게다가 도현은 뛰어난 암기력을 가졌다. 그건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묻는다면.

‘일단 뭔지 알아야 외우든 말든 하지.’

미국에서 일정을 소화하느라 중간고사 시험 범위 수업을 통째로 날렸다. 그는 무엇을 배웠는지조차 모른다는 말이었다.

대부분은 기초 상식에 기반해서 풀 수 있지만, 그래도 가끔가다 처음 보는 것들이 나오곤 했다. 그러한 것들은 한 번쯤 보고 익혀두어야 했다.

한참 집중하고 있었을까.

수업 시작종이 울림과 동시에 앞문으로 한 남성이 들어왔다. 형광등 아래에서 벗겨진 이마가 환히 빛났다. 수학 선생님이었다.

그는 반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도현을 발견하고선 두 눈을 번뜩였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매처럼 집요한 눈빛이었다.

“다들 시험 준비는 잘하고 있어?”

“쌤! 망했어요!”

“쉽게 내주세요!”

아이들이 약한 소리를 내며 징징대자, 수학 선생님이 껄껄 웃었다. 학생들의 고통을 즐거움으로 아는 참된 교사의 자세였다.

“쉬우면 또 재미없잖아. 수학은 원래 어려운 거야.”

또다시 자신만의 신념에 빠져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정영헌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 도현이는… 아이고. 역시 이번 시험은 힘들겠지?”

묘한 어투였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자문자답했다.

“암, 힘들 거야. 그렇게 해외에서 어? 큰일을 하고 왔는데. 그럴 수도 있지. 혹시 뭐 어려운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서 질문해. 선생님이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도현은 별다른 부언 없이 답하며 웃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고 다음 주가 되어서 시험이 끝날 때까지도 도현이 수학 선생님을 찾아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당연했다.

도현이 신경 쓰는 건 암기 과목뿐이었으니까.

지난번 시험에서도 도현이 수학 과목만큼은 공부한 적이 없다는 걸 몰랐던 수학 선생님의 패착이었다.

* * *

2주 뒤, 교무실.

“아니. 아아니!”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정영헌에 주변에 있던 선생님들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그중 한 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가 허, 하는 숨을 뱉더니 말했다.

“이도현이가 또 만점을 받았어요.”

그는 곧장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이게 말이 돼요?”

동의를 구하는 몸짓이었지만, 어째 동료 선생님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정 선생님도 참…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렇게 크게 반응해요. 큰일 난 줄 알았네.”

“이게 큰일이지 뭐가 큰일이에요? 아니, 내내 미국에 있었던 애가 다른 애들도 백 점 못 맞은 걸 다 맞히는 게 말이나 돼요? 난 진짜 이거 커닝이라도 한 거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을….”

“정 선생님… 모르세요?”

“내가 뭘 몰라요?”

동료 선생님은 핸드폰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띄워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정영헌은 그것을 받아서 읽었다.

“뭐길래 지금… 어?”

그는 스쳐 지나간 문장들에 눈을 깜빡이다가,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한껏 당혹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도현, AMC 8만 점… AMC 10 118.5, A, AMIE 초청?”

“도현이 걔, 수학 천재로 유명하잖아요. 정 선생님 이거 모르셨어요?”

“아니, 아니… 이게.”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똑같았다.

다른 선생님들은 당연하다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수학이 전공인 정영헌은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 줄 알고 있었다.

정영헌은 한참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상대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허탈한 낯으로 의자에 풀썩 앉았다.

“내가 바보였네….”

AMC 10은 이미 중학생 수학은 마스터했다고 봐도 좋은 시험이었다. 거기서 고득점, 심지어 AMIE 자격을 얻을 만큼의 고득점을 얻었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그랬다. 애초에, 중학교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이상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아니, 내가 연기 천재가 수학까지 천재일 줄 짐작이나 했겠냐고. 그는 몹시 억울해졌다.

* * *

“도현쓰, 뭐 해?”

“응? 아니. 그냥 나뭇잎이 떨어졌길래.”

“뭐야. 그게.”

맥없는 대답에 서일준이 꺄르륵 웃으며 도현의 어깨를 쳤다. 도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주변에는 서일준 말고도 다섯 명의 아이들이 더 있었다.

길었던 시험이 끝났다.

그리고.

“오늘은 뇌 빼고 노는 거다! 다들 돈 내놔, 돈 내놔! 아니, 스탑. 도현쓰 너는 내지 마. 어허. 넣어 두래도.”

오늘은 시험이 끝난 기념이자, 동시에 이미 지나버린 도현의 생일파티를 대신하는 날이었다. 도현은 신난 친구들을 보다가, 덩달아 들뜬 낯으로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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