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6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3)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피시방이었다. 친구들과 안에 들어가자, 피시방 사장님이 그를 알은체했다. 몇 번 와본 곳이라서 사장님과는 안면이 있었다.
“자, 여기. 서비스.”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이 음료수를 들고 오셨다. 괜찮다고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떠넘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에 내가 영화를 재밌게 봐서 주는 거야.”
결국 도현은 호의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 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도현은 할 거 했다는 듯 사라지는 사장님을 보다가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캔에 맺힌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옆에 있는 여고를 포섭하려고 도현이 이곳에 다닌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흘리는 것 같긴 해도, 막상 도현이 왔을 때는 조용히 놀다 갈 수 있게 도와주는 분이었다. 기본적으로는 호의가 깔려 있을 것이다.
“빨리, 빨리 한 판부터 하자.”
“내기 콜?”
“트롤이 어딜 나대.”
분명 순하고 착한 친구들인데, 게임을 할 때면 자동반사적으로 입이 걸어졌다. 도현은 그들이 재촉하는 대로 게임을 틀었다. 시간 투자를 많이 못 해서 여전히 초라한 레벨의 캐릭터가 보였다.
“일단 그럼 우리끼리 한판. 도현아, 넌 내 팀 해. 내가 버스 태워줄게.”
“오….”
믿음직스러운 발언이었다.
여기 중에서 제일 고인물이 서일준이고, 가장 싱싱한 뉴비가 도현이기 때문에 나름 밸런스도 맞았다.
결과적으로 나름 팽팽했던 승부는 서일준 팀이 이기면서 끝났다. 승리의 비법은 별거 없었다. 팀원들이 다소 흥분하다가도, 도현만 보면 알아서 분노를 조절한 덕분이었다. 그와 다르게 조절하지 않은 상대 팀은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이후로 친구들이 아닌 이들과도 몇 번 팀을 맺고 게임을 했다. 그러나 금방 다른 게임으로 갈아탔는데, 초면에 남의 신상을 묻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온갖 기상천외한 욕설이 난무하는 걸 본 도현이 웃으면서 게임을 종료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 새끼가! 지가 혼자 카정 당해서 뒤져놓고선!”
극대노한 서일준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그는 도현처럼 끌 생각이 없는지, 한껏 분노한 채 포지션을 바꿔가며 게임을 했다. 그러나 한 팀원이 수틀릴 때마다 ‘미드 달림 ㅅㄱ’ 하는 협박과 트롤링에 못 이겨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도현은 진정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조금 걱정스레 쳐다보자 서일준은 도현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훌륭한 분노 조절제라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어쩐지 서일준에게서 진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후로는 다른 게임을 몇 번 더 하다가, 배고프다는 김병철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먹으러 갈까 고민하다가 결정 난 건, 근처에 있는 즉석 떡볶이 집이었다.
“벌써 가게?”
“네, 잘 놀았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그래. 자주 좀 와.”
사장님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오다가, 막 피시방에 들어오는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은 도현을 보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밖으로 나갔다. 도현의 친구들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모르는 체를 했다.
자동문이 닫히기 전.
“씨발, 존잘 미쳤냐.”
“야, 쟤 이도현 존나 닮음.”
작게 말한다고 한 거 같은데 너무나 잘 들리는 대화에 친구 몇몇이 표정 관리에 실패했으나, 그때는 무리를 등진 후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김병철이 실실 웃으며 도현을 돌아봤다.
“너 이도현 닮았대.”
“엄청난 칭찬이네.”
도현이 뻔뻔스레 대답하자 친구들이 키득거렸다.
즉석 떡볶이집은 한가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맛집으로 소문난 떡볶이집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미안한 눈으로 친구들을 보았다.
여기로 온 건 도현 때문이었다.
가 개봉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사람들이 적당히 거리를 지켰다. 도현을 알아봐도 저들끼리 수군거리거나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가 개봉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전에 하교 후 서점에 들렀다가, 사람들에게 포위당한 도현은 새삼 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첫 번째 시리즈에 잠깐 등장했는데도 그 정도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까마득해질 정도였다.
‘설마 시내 못 돌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영 가능성이 없진 않은 거 같아서 허허로이 웃을 때였다.
“아, 엄마가 자꾸 시험 점수 물어봐.”
김병철이 불만스레 말했다.
“너 망했잖아.”
“그러니까.”
김병철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험 점수 가지고 부모님과 갈등을 빚는 게 조금 신기해서, 그를 쳐다보고 있자 그도 도현을 보았다.
김병철의 눈이 반짝였다.
“너도 이번에 망했지?”
그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도현에게로 쏠렸다. 도현은 그 주목 속에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수업을 통째로 빠진 탓인지, 저번과 다르게 이번 시험에서는 문제나 점수를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 나름의 배려인 모양이었다.
“이도현은 망해도 정상참작 가능이고, 넌 아님.”
“아, 어쩌라고.”
친구들이 투닥거렸다.
도현은 애매하게 웃었다.
기대를 배반한 거 같아 조금 안쓰럽지만….
“저번이랑 비슷해.”
“…잠깐만. 너 저번에 전교 1등이었는데?”
“그러니까.”
“…….”
아이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들은 UFO라도 본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그냥, 우리 수준에서는 암기가 전부잖아. 외우는 건 잘해서. 그리고 너희들이 도와주기도 했고.”
“수학은 암기 과목이 아니잖아!”
도현이 보기엔 수학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1학년 수학, 그것도 학교 시험에서는 창의성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식만 제대로 외우고, 그걸 대입할 수 있다면 모두 해결되는 문제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다가는 친구들이 저를 빼고 떡볶이집에 갈 거 같아서 조금 돌려 말했다.
“중학교 1학년 과정은 이미 끝내서.”
김병철의 눈에 한가득 배신감이 차올랐다. 도현은 그 울망한 눈빛을 계속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는 곧 삶은 시금치처럼 푹 퍼져서 비틀거렸다.
“불공평한 세상….”
“넌 원래 공부도 안 했잖아.”
“조용히 해. 그건 그거고.”
“나도 이번엔 조금 아슬아슬했어.”
“너도 조용히 해! 이 기만자야!”
진짠데.
특히 역사 같은 경우. 도현이 미국에서 한국사를 공부했을 리는 없으니 전부 새로운 지식이었다. 그나마 중간고사라서 시험 과목 수가 적은 게 다행이었다.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지필 평가는 끝났지만, 다음 주부터는 실기 시험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바빴다. 결석하느라 못 봤던 수행 평가까지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음 주의 일이었다.
오늘은 놀고, 주말에 다시 열심히 준비하면 될 일이었다. 도현은 시험 생각을 미뤄두고 친구들과 떡볶이집에 들어갔다.
떡볶이에 이어서 볶음밥까지 알차게 해 먹으니 밖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계산하려고 했지만, 친구들의 격한 방어를 이기지 못했다.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우리가 사는 거야! 넌 그냥 따라오기만 해.”
도현은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친구들을 먹일 기회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용돈 받고 생활하는 애들이 돈이 얼마나 있겠는가. 얻어먹고 입 닦는 건 조금 그랬다. 도현의 시즌 2 계약금만 해도….
“노래방! 노래방!”
생각할 시간도 안 주며 저를 이끄는 친구들에 도현은 질질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노래방이었다. 단번에 3시간을 결제한 친구들이 제일 큰 방으로 들어갔다.
동행한 친구들은 음악과가 두 명, 연극영화과가 두 명, 미술과가 두 명이었다. 어쩌다 보니 적절한 과 배치가 이루어진 구성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연극영화과이자, 뮤지컬을 진로로 삼고 있는 김병철은 노래를 굉장히 잘 불렀다. 의외인 건 뮤지컬이 아닌 연극 전공인 친구도 노래를 꽤 잘 불렀다는 거였다.
“입시 학원에서 노래 연습 엄청 시켜. 다리 찢기랑. 아, 춤도.”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는 뭘까.
물론 발레를 한 덕분에 다리 찢기는 자신 있지만… 배우는 노래와 춤도 잘해야 하는 건가? 연기 학원을 다녀 본 적이 없는 도현이 아리송해했다.
도현은 무난하게 부르는 편이었다. 딱히 기교를 부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음정이나 박자가 흔들리지도 않고. 김병철은 기초가 잡혀 있다고 평가했다.
“뮤지컬은 생각 없어?”
“생각해본 적은 있는데….”
이미 하는 게 너무 많은데 거기서 노래까지 더해지면 너무 바쁠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2학년 과정 중에서 뮤지컬 기초 수업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 경험해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별로 생각 없어.”
“하긴… 넌 잘하고 있으니까.”
김병철이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자, 막 한 곡을 끝내고 마이크를 내려놓은 애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 생활 시작한 게 진짜 사기이긴 한 거 같아. 완전 탄탄대로잖아.”
“그건 이도현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걔, 누구냐….”
서일준이 넘긴 리모컨을 눌러서 최신 인기 가요 리스트를 내리고 있던 도현은 뒤이어 들린 단어에 손가락을 멈추었다.
“아. 정희운만 해도 배우인데….”
“야야, 다른 애 얘기는 왜 꺼내.”
“맞아, 노래나 부르자.”
누가 봐도 어색한 화제 전환이었다. 도현은 은근히 시선을 피하는 친구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 이름이 왜 나오지?
등교한 이후, 시험 준비로 너무 바빴기 때문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이름이다.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반에서 공부만 하느라 마주칠 일도 없어서 더욱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이름이 왜….”
“아, 노래 시작한다!”
“흠흠, 워우워~.”
“…….”
티가 날 정도로 어색한 회피였다.
연극과 두 명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저 새끼들은 연극과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하는 중얼거림이 작게 들렸다.
왜?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
도현이 정희운에게 가진 복잡한 감정을 아는 건, 본인밖에 없을 터였다. 남들이 보기엔 조금 서먹한 같은 학교 애일 텐데….
왜 그 얘기를 하면서 내 눈치를 보는 걸까.
이상했다. 답을 알려줄 사람은 여기서 한 명뿐인 거 같아서 서일준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까랑 변함이 없었다. 평소 성정을 생각해봤을 때 서일준은 모르는 사실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쟤가 모르는 걸 보면… 별일이 아닌가?
헷갈리는 문제에 고개를 갸웃하던 도현은 빨리 다음 곡 입력하라는 재촉에 못 이겨 다시금 리모컨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방향키를 누르면서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상념에 손가락이 느려졌다.
* * *
그다음 주.
잼잼이들은 새로이 뜬 기사로 인해서 한차례 떠들썩해졌다.
[완벽의 형상화? 엄친아 이도현, 전 과목 백 점]
[배우 이도현, 일과 학업까지 모두 백 점?]
[이도현, 해외 일정 중에도 공부 소홀히 하지 않아… 네티즌 “비현실적”]
- 이게 사람이냐
⌞ 내가 말했지 AI라고
⌞ 평소라면 낄낄거리고 말았을 텐데 설득력 있게 들림;;
⌞ 진짜라니까 왜 안 믿지
⌞ 이분 진심이넼ㅋㅋㅋㅋ
- 대체 어디까지 완벽하려고 그래 도현아… ㅠㅠ
- 와 나 자극받음 내 배우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 ㄹㅇ 쉬어도 뭐라 할 사람 없을 텐데 진짜 열심히 살아
⌞ 그게 도리토스 매력임
⌞ 나보다 열 살은 어린데 매번 존경스럽다…
그리고 화제의 당사자는.
“안 되겠어.”
“?”
비장하게 일어난 도현에 한설아가 의아해했다. 도현은 별다른 대답 없이 교실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 도현! 어디 가?”
“잠깐 화장실 좀.”
그러나 문밖으로 나온 도현의 발이 향하는 건 화장실 방향이 아니었다. 5반 앞에 선 도현이 우연인 척 창문을 곁눈질했다.
때아닌 007을 찍는 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