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397화 (398/582)

제397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4)

결과적으로, 창문을 통해 훔쳐보기는 실패했다. 어물쩍거리며 서 있자 5반 애들이 창가에 다닥다닥 붙은 탓이었다. 심지어 한 명은 누구를 찾으러 왔냐고 물어봐서 도현은 목 뒤편이 싸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야. 괜찮아.”

결국 이렇게 말하고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도현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며 자책했다. 니콜라스나 다비드가 들었다면 실컷 비웃었을 만한 행동이었다.

곧장 반으로 들어갈 기분이 아니라 의미 없이 복도를 배회하다가, 화장실로 향했다. 손이라도 씻고 정신을 차리려는 의도였다.

쏴아아-

수돗물이 세차게 내렸다. 찬물에 닿으니 정신이 조금 개는 것도 같았다. 그래. 아까는 너무 충동적으로 굴었다. 아무리 주말 내내 궁금했어도 그렇지. 사람이라면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해야 할 거 아닌가.

적당한 자기 성찰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아!”

반면, 상대는 봄을 맞이한 꽃처럼 활짝 피어났는데, 멀리서 보면 혹한의 겨울과 생기로 가득 찬 봄 정도의 온도 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반가움이 번졌던 얼굴은 곧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저, 오랜만이네.”

…아. 맞다.

“그, 그럼 난 먼저 가볼게!”

도현은 잊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여름 방학이 시작하기 몇 주 전부터 정희운의 태도가 묘해졌었다는 사실이.

늘 자신만 보면 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브로콜리처럼 달려들더니, 그때는 이상하게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왜 잊고 있었는지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괘씸해서.

용춘 역할 캐스팅. 분명 좋은 기회일 텐데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선택을 떠넘기려는 모습에 도현은 자신도 놀랄 만큼 많이 실망했다. 그에게 가지고 있었던 배우로서의 기대를 배반당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며칠 뒤, 다시 찾아온 정희운은 그 배역을 맡겠다고 말했다. 도현이 싫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눈빛으로.

거기에 어떠한 감명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서… 그래. 솔직히, 사적으로는 완전히 친밀해질 수는 없더라도, 연기로 이어진 사이라면. 그러니까 동료 배우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쩌겠나. 이러나저러나, 도현은 연기에 미쳐 있었다. 그 정희운을 ‘정희성 동생’이 아닌 ‘동료 배우’로 구분해서 인식할 만큼.

그런데….

- …아, 안녕! 먼저 지나가!

- 아, 교실에 실내화 두고 왔다, 다시 가봐야겠네. 그럼 안녕!

그렇게 마음먹은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상대가 태도를 바꿔버렸다. 그게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고. 손바닥 뒤집듯이 데면데면하게 굴기 시작했다.

‘맞아, 그랬지.’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니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나중에는 짜증 났다. 싫은 티 내도 달라붙을 때는 언제고. 마지막에는 이걸 신경 쓰고 있는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다시 생각났지만.’

도현은 멀어지는 정희운을 잡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손을 털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도현은 휑뎅그렁한 복도를 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글쎄, 이 모든 게 도현을 피하고자 하는 시도였다면 잘못 생각했다. 평소라면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바뀐 태도와 친구들의 묘한 발언. 그 모든 게 어서 와서 비밀을 알아내라며 손짓하는 거 같지 않은가.

소년이 사라진 복도를 보던 검은 눈이 호선을 그렸다.

* * *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해서, 직접 발로 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몸소 바보 같은 짓이란 걸 깨달았으니까.

이 학교에서 도현은 뭘 하든 시선을 몰고 다녔다. 특히, 영화의 영향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은 더욱이. 주시하는 시선이 사방에 깔려있는 한, 무언갈 몰래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다.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도현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 않을 만한 사람.

도현이 알기론 한 명뿐이었다.

“설아야.”

“응?”

도현이 화사하게 웃자, 한설아가 주춤했다. 왜 저렇게 웃지. 쟤가 저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네가 알려줬으면 하는 게 있어.”

은근한 목소리에 한설아가 두려운 듯이 의자를 뒤로 뺐다. 도현은 계속해서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정희운에게 관심이 많으면서, 그에게 피해가 갈 행동을 하지 않을 사람. 동시에 도현에게도 호의와 책임감을 가진 사람.

한설아 밖에 더 있겠는가.

* * *

“…뭐?”

그러나 단연코, 이런 전개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한설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잠깐만.”

도현은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는 한설아에게 들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는데.”

뺨을 문지른 도현이 차분히 한 음절씩 내뱉었다.

“그러니까… 정희운이 용춘 역할에 캐스팅된 후로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고? 근데 그게… 나 때문이고?”

“너 때문은 아니지. 사람들이 나쁜 거니까.”

“진짜라는 거네.”

도현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싶어서 막막한 숨이 새어 나왔다.

“인터넷에서 너랑 걔랑 묶어서 비교하는 글이 자주 올라오다 보니까… 여론이 좀 안 좋았거든. 너는 몰랐겠지만.”

몰랐다.

아니… 정말 몰랐나?

정희운 캐스팅 이후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두 사람을 묶은 기사가 많이 올라오는 걸 알고 있었다.

‘제2의 이도현이랬나.’

동갑인 나이에 제2라는 호칭이 붙은 게 퍽 이상해서 인상에 깊이 남았다.

도현은 자문했다.

정말 그걸로 정희운이 비난을 받을 걸 몰랐을까?

“근데 여론이 나빠지고, 인터넷에서 비호감으로 찍히니까 평소에 희운이를 싫어하는 애들이 그걸 가지고 다른 애들을 선동했나 봐.”

“…다른 애들은? 그래서 그대로 선동당해 주고?”

말이 조금 공격적으로 나간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진정되질 않았다.

“잘 모르겠어. 나도 친구한테 들은 얘기라서….”

그녀는 변명조로 덧붙였다.

“내 친구도 몇 번 말려봤는데, 반 분위기 자체가 그렇게 되어서 바꾸기가 어렵다는 거 같아. 5반 애들이 다 희운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그보다는 주동자들이 영향력이 커서….”

결론은, 다 싫어하는 건 아니고 심지어 잘못된 일이란 것도 인지하고 있지만, 몇몇 주동자의 눈치를 보느라 나서지 못하고 있단 소리였다.

도현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미간을 좁혔다. 기가 차서 헛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그는 가장 큰 의문을 토해냈다.

“대체 왜? 내가 가만히 있는데?”

정희운이 제 이름에 끼워팔기가 되든 말든, 그에게 제2의 이도현이라는 이름이 붙든 말든 불편해할 사람은 도현이었다. 뜬금없는 5반 머저리가 아니라.

한설아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대답하지 않아도 돼.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 그건 구실일 뿐이었겠지.”

잠깐 어이없어서 판단 능력을 상실했던 거 같다.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길 원하는 이에게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나. 그저 꼬투리를 잡을 수만 있으면 됐겠지.

그냥 평소에 정희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도현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런 순둥이가 마음에 안 들 구석이 어디 있다고.

저한테는 사람 손을 탄 개처럼 굴고 다른 데에서는 까다롭게 굴면 또 모르겠는데, 정희운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 자체가 순했다. 도현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럼 뭘까.

열등감? 질투심?

도현만큼 압도적이진 않아도, 정희운은 또래보다 앞서 나가 있는 편이었다. 그는 아역배우 중에서 나름 이름을 알린 축에 속하니까.

그래서 질투나 자격지심을 느낀 건가?

도현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자격지심을 숨기고 정희운을 대하는 누군가, 그리고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웃는 정희운.

…가능성 있네.

“변명 같지만, 아니, 변명이 맞지만,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다른 반이라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직접적인 괴롭힘이 있는 게 아니라서 학교 폭력으로 신고하기도 어려웠고. 또, 그런 식으로 일을 키우기에는 본인이 원하는지도 알 수 없는 데다가 공인이라서… 혹시라도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면 어떡해.”

한설아는 답답한 속내를 모조리 꺼내어 토해냈다. 그녀는 그간 많이 서러웠는지, 차분히 말하려고 노력함에도 군데군데 흥분한 흔적이 보였다.

한설아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너한테 말해준 거야. …이런 거 부담스러울 거 알고, 네가 정희운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아는데. 혹시 너라면 뭔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내가?”

“넌 애들이 함부로 못 대하잖아. 그러니까….”

“말 끊어서 미안한데, 나도 어려워.”

그녀가 이렇게까지 순순히 말해준 이유는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현은 2반이었다. 그런데 5반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해결할까.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5반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어도 그가 없을 때면 문제는 또다시 생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구실 자체를 무용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도현이 멈칫했다.

한설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나 보네.”

“…아니, 아예 방법이 없진 않은데.”

그게 끌리지 않아서 문제였다.

은근한 따돌림을 주동하는 자들의 근거는 도현이었다. 정확히는, 도현의 유명세에 업어가려는 태도겠지.

그런데 만약.

‘나랑 정희운이 친밀한 사이라면?’

그 기사가 과장이 아니라 정말 둘이 친근하고,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면? 그렇게 업어가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그러면 내가 기분 나쁠 거라 지레짐작해서 정희운을 따돌린 이들이 명분을 잃어.’

도현은 언제나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줏대 없이 분위기에 편승했던 다른 5반 아이들도 태도를 바꿀 것이다. 따돌림의 주동자보다는, 이도현이라는 존재가 더욱 거대하게 느껴질 테니까.

그게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애들이라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무슨 방법인데? 어?”

“…그러게.”

“그게 무슨 말이야?”

도현은 한설아의 재촉을 못 들은 척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뭐냐니까? 왜 말을 안 해?”

“설아야, 알려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한데 나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

“뭐? 야! 이도현! 너 어디 가! 야!”

도현은 한설아의 황당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떴다. 대화할 만한 외진 곳을 찾느라, 건물 밖에 나왔기 때문에 다시 교실까지 걸어가야 했다.

계단을 오르고 5반 앞을 지나쳐 갈 때 도현의 발걸음이 티가 나지 않을 만큼 느려졌다.

이제야 전부 이해되었다.

캐스팅 기사가 뜨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저를 피하기 시작했던 정희운. 아무리 시험공부로 바빠도 그렇지, 누군가 의도라도 한 듯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지난 일주일. 아까 화장실에서 어색하게 웃던 얼굴까지, 모두.

“돌아버리겠네.”

도현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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