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8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5)
- 지겹다 지겨워
- 우리 애 머리채는 왜 잡아
- 이도현 연관 검색어에 정희운 뜨는 거 ㅋㅋㅋ 존웃
- 나 사촌이 가연예중 다니는데 이도현이랑 정희운 1도 안 친하댔음;; 왜 자꾸 엮는 거
- 정희운이 ㄴㄱ?
흰 낯이 불편한 빛을 띄웠다.
“…기분 나빠.”
여론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댓글을 찾아보았다. 대체 얼마나 엉망이길래 사람을 따돌리기까지 하나 싶어서.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응 이도현 버스 타니까 개꿀맛 ㅇㅈ?
-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내 낯이 다 뜨거워진다. 닮은 곳이 하나도 없는데 뭔 이도현 타령?
- 얘 요즘 이런 언플 많이 하네ㅋㅋㅋ 효과는 좋은 듯? 나도 이번에 정희운 이름 처음 앎
⌞ 근데 싸 보임 ㅋ
틱.
더 봐도 의미 없을 거 같아서 화면을 껐다. 도현은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은 후, 양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착잡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차라리 내가 엮인 일이 아니었더라면, 아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더라면 신경을 거뒀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서….
툭.
도현이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시야 근처에 매끄럽게 빛나는 핸드폰이 보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현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검은 눈동자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닮았다, 닮았다, 생각했더니 이런 것까지 닮는 건가.
이런 상황은 아주 익숙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 일로 불특정 다수에게 일방적인 조롱과 비난을 받는 상황 말이다. 정희운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인터넷에 저러한 기사를 뿌린 건 아닐 테니까.
사람들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상대를 오해하고 곡해하고,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내가 윈저 프란시스의 배역을 부정하게 빼앗았다는 헛소문이 돌았을 때처럼.
그게 조금 진절머리 났다.
사람을 믿는다. 그들의 근원적인 곳에는 선함과 정의가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평생에 걸쳐 가장 경애하고 그리워할 대상이 그것을 알려 주었다. 잊지 못할 만큼 뜨거운 화인으로.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들이 언제나 자극적인 걸 찾아 헤매며 그것을 위해서 얼마든지 추악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쉽사리 타인을 비난하는 이들이 바라는 건, 제대로 된 해명이나 진실이 아니다. 저열한 흥미 충족과 대상의 비극뿐이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아니다.
다만, 내가 화가 나는 건.
“얜, 어리잖아.”
숨이 불안정하게 흩어졌다. 도현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흥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빨라진 심장은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거 같았다.
나에게는 약간의 피로, 혹은 불신을 안겨줄 뿐이다.
그렇지만 정희운은 아니었다.
정희운은 정말 중학생이었다.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불행도, 스물여덟 해의 기억조차 없는 평범한 중학생!
그게 너무 화가 났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몰상식하고 비정상적인 행위라서….
아.
도현은 얼빠진 낯으로 탄식했다.
“…이래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걱정했구나.”
나 바보인가.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의 시작은 방랑자 촬영 때 과호흡을 일으켰던 때였다. 그것은 곧 학교에서 다비드와 그 무리에게 인종 차별을 당했을 때, 그리고 르옌 캐스팅으로 논란이 일었을 때로 이어져, 최근까지 닿았다.
이래서였구나.
걱정하는 이들을 이해하는 척 굴었지만, 실은 몰이해가 동반했다.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과민반응이 아닐까… 마음속 한구석에 내심 그런 생각이 자리했다.
이래서 걱정한 거였어.
도현은 불시에 찾아온 이해에 탄식 같은 숨을 내뱉었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다가, 바보 같아 보이리란 걸 자각하고 책상에 뺨을 문댔다. 차가운 나무의 촉감이 기분 좋게 전해졌다.
일단, 진정하자.
아까부터 흥분 때문에 감정이 섞이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감정이 섞여서 흥분한 게 바른 순서겠지만.
몹시 유감스러운 사실이나, 정희운은 언제나 도현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고 일종의 진리였다.
영혼의 주도권이 흔들린 적은 크게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영혼이 합쳐졌을 때.
두 번째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세 번째는….
아직도 생생했다.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서던 날.
도현은 영혼의 강한 울림을 느꼈다. 심장이 강렬하게 맥동하며, 온 신경이 한쪽으로 쏠렸다. 저기야, 네가 그리워하던 게 저기에 있어. 그러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세찬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 감각은 금방 도현을 집어삼켰다.
그 순간 평온할 수 있었던 건 오직 초인적인 인내심 덕분이었다. 도현은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신입생 선서문을 읽는 그 잠깐의 시간이 평생처럼 길고 고됐다.
마침내 단상을 내려갈 때, 그리하여 너를 마주쳤을 때. 내가 무엇을 그토록 찾아 헤맸는지 깨달았다. 그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도저히 몰라볼 수 없는 싱그러운 개나리 빛이 그를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감정이 이리저리 섞였다. 형의 것과 나의 것으로. 밉다가도 선연한 애정이 치솟아 올랐다. 그렇게 한없이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훅 낯설어졌다.
그래서 동요했다.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지금의 내가 나는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러나, 늘 그러했듯 시간은 공평해서.
그 공평함 속에서 혼란은 하나의 익숙함이 되었다. 익숙함은 쌓이고 쌓여, 결국엔 일정한 질서가 되었다. 도현은 형과 제 것을 구분하는 일에 능숙해졌다.
차분히 고르는 호흡을 따라 흥분이 잦아들어 갔다. 익숙하게 형의 감정을 분리해낸 도현의 눈이 한층 냉정한 빛을 띄웠다.
책상에서 고개를 든 도현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까만 액정에 하관이 비쳐 보였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현은 보이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는 정희운을 외면할 수 없다.
적어도 그 외면이 정희운의 불행에 일조하는 한은.
* * *
결론을 내린 다음 날.
침대 위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누워 있던 도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아래 가지런히 놓인 실내화를 신으면서 점점 머리가 맑아졌다.
그러고선 문득, 깨닫는 것이다.
어제 내렸던 결론의 맹점을.
다 좋은데, 어떻게 친해지지?
“도현아, 빵이 질기니?”
“아.”
생각에 빠져 전투적으로 식빵을 잘근잘근 분쇄하던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도현은 다시금 고개를 내렸다. 앞에 놓인 건 우유에 푹 적셔서 만든 부드러운 프렌치토스트였다. 그 위를 장식적으로 꾸민 바나나가 눈에 띄었다.
“아니요. 맛있어요.”
“그, 그렇게 맛있나?”
이장혁의 얼굴에 뿌듯함과 민망함이 섞인 미소가 번졌다. 오늘의 쉐프는 그였기에, 도현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도현은 진심이라는 듯 웃어 보인 후 포크로 바나나를 하나 쿡 찍었다.
입 안에 달달한 맛이 퍼졌다.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우물거리던 도현은, 불시에 찾아온 충동에 휩쓸려 입을 열었다.
“친해지고 싶은 애가 있는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소년에게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소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자 친, 억!”
이장혁의 허리를 세게 꼬집은 서혜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부드럽게 웃었다.
“같은 학교 애야?”
“네.”
“음… 같은 반이고?”
“다른 반이에요.”
도현의 시선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이장혁의 두 눈이 기대감을 담아 환히 빛나고 있었다. 도현은 그리 크진 않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 친구는 아니고요.”
“아….”
그의 어깨가 실망감으로 내려앉았다.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거야.
어이없는 기분에 도현이 얕은 숨을 내쉬었다.
“제가 관심 있는 애도 없고, 그런 관심을 보이는 애도 없어요.”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묘해졌다. 도현은 프렌치토스트 끄트머리를 조금 잘라 먹었다. 더 말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앳된 낯과 단호한 태도가 이루는 조화는 참으로 묘해서, 이장혁은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친해지고 싶다 해서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지금까지 친해졌던 다른 친구들을 생각해봐. 그 친구들이랑은 어떻게 친해졌니?”
다른 친구들….
“진은 제가 예쁘다고 먼저 다가왔고.”
“푸웁!”
“……”
“…아, 아니야. 계속해.”
“니키는 진과 친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아, 집에 있던 수영장이 니키한테 점수를 산 것도 있고요. 이 점은 감사해요. 집에 수영장이 없었으면 친해지는 데 시간이 더 걸렸을 거 같아요.”
“…하하. 그렇구나.”
“리암이랑 맥은 싸우다 보니 정이 들어서….”
“그, 그래. 충분히 참고되었으니까 그만 말해도 될 것 같아….”
부모님은 어쩐지 어질어질한 표정이었다. 도현은 크게 유감없이 말했다.
“별 도움은 안 되죠?”
정희운을 얼굴이나 수영장으로 꼬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여기는 수영장도 없고. 그렇다고 싸울 수는 없잖아. 지금 싸우는 건 불씨보고 더 크게 타오르라고 정성스레 부채질하고 장작까지 주는 꼴이었다.
“그래도 공통점은 있잖니. 접점이 많이 있었다는 거. 일단 그 친구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르니까, 접점을 늘리면서 천천히 다가가는 건 어때?”
그녀는 잠깐 쉰 후, 웃음을 참느라 흐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진이 네 얼…굴을 좋아하는 거나 니키가 수영장을 좋아하는 것도 다 그런 과정에서 알게 된 거잖아. 싸우면서 친해진 것도 친해질 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서고.”
일단 얼굴을 최대한 많이 마주쳐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리 느긋하게 굴 만큼 시간이 충분하진 않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다른 반이라 접점을 만들긴 어렵겠지. 그래도 그 부분은 네가 노력해야 해. 친해지는 건 원래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냥 가서 너랑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면 다 반길 거 같은, 으학!”
“하하, 파리가 돌아다니네.”
팍! 팍! 세 마리째의 파리를 잡는 서혜나를 보던 도현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이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그게 어려운 건 저도 알아요.”
진도, 니콜라스도, 맥도. 단 한 번도 친해지기 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정말 한 번도 관계가 쉬운 적이 없었다.
도현은 작게 썬 빵 조각 하나를 입에 물었다. 해결된 일은 없었다. 들은 조언도 원론적인 것뿐이었다. 그런데 아까보다 답답함이 가신 기분이었다.
고민을 부모님과 나눌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앞으로 종종 이렇게 말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도현은 우유 광고 모델답게 우유를 깔끔하게 원샷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언 고마워요. 저 다 먹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아, 토스트 진짜 맛있었어요.”
일단, 부딪쳐봐야 했다.
* * *
일은 순조로이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만나야 할지 고민하며 복도로 나왔을 때, 정말 운 좋게도 반에서 나온 정희운을 발견했으니까.
내가 쟤를 찾아다니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한 치 앞날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용건은 생각해두지 않았다. 일단 말부터 걸고 볼 생각이었다. 붙잡으면 할 말이 생각나겠거니 싶었다.
퍽 무책임하게 돌진한 도현은 한 가지 거슬리는 광경을 발견했다. 저를 발견한 정희운이 교실로 되돌아가려는 광경을.
안 되지.
“안녕.”
교실 문과 정희운 사이에 자연스럽게 발을 끼워 넣으며 막아선 도현이 웃었다. 정희운의 갈색 눈동자가 길을 막아선 발을 한 번, 그리고 웃는 낯을 한 번 보며 크게 떨렸다.
“어, 어, 안녕.”
“어디 가는 길이야?”
“나?”
“응, 너.”
“그냥… 어, 아! 그래! 선생님이 부르셔서 가는 중이었어! 지금 바로 가 봐야 해서!”
“지금?”
방금 교실로 들어가려던 걸 봤는데.
“으응! 그럼 다음에 봐!”
명백한 회피였다.
도현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려다가, 이곳이 5반 후문이란 걸 깨닫고 표정을 관리했다. 어찌 되었든 남들 눈에는 친근한 대화로 비쳐 보여야 했다. 도현은 다음을 기약하며 사라지는 정희운을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