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6)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겨우 삼 일째에 이 당연한 사실을 절절히 깨달을 줄이야.
쉽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정희운은 그를 피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친해지려고 보니, 정희운의 방어는 막강했다. 약간의 당혹감마저 안겨줄 정도로.
이렇게 루카 하퍼의 기분을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친해지려고 다가가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게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누군 원해서 이러는 줄 아나 싶어서 마땅찮은 한편, 언제까지 피하려나 호기심과 승부욕까지 일었다.
루카 하퍼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겨우 삼 일째에 이런 기분인데, 그녀는 촬영의 반절 가까운 기간 동안 참았다. 생각보다 놀라운 인내심의 소유자였던 거다.
“화, 화장실이 급해서 이만….”
이젠 핑계조차 성의가 없다.
불쑥 화장실 안까지 따라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너무 스토커 같아서 빠르게 지워냈다.
한숨을 내쉰 도현이 멀어진 정희운에게서 등을 돌려 반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계획의 전면 수정이 필요한 때 같았다. 목표는 누가 보더라도 친밀한 관계로 느껴지게끔 가까워지는 거였는데. 지금 상황은 오히려 사냥꾼과 사냥감, 혹은 포식자와 피식자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이러다가 이도현이 정희운을 괴롭힌다는 헛소문이 더해지면 큰일이었다. 그게 헛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반으로 돌아온 도현이 의자에 앉아서 몸을 뒤로 기댔다. 요즘 도현의 외유가 잦은 탓에, 반 아이들은 그러려니 하는 기색이었다. 저마다 알아서 선생님의 심부름이나, 밀린 수행평가 관련해서 볼일이 있었겠거니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진실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
“응. 실패.”
“쉽지 않네….”
한설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 위에 늘어졌다. 도현의 계획을 들은 후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돕겠다는 의사를 밝힌 그녀는, 며칠째 전진이 없는 상황에 상당히 낙담한 상태였다.
“그냥 희운이한테 솔직하게 말을 하는 건….”
“목표를 바꾸려고.”
한설아와 도현이 말을 한 건 거의 동시였다.
정희운한테?
눈을 찌푸린 도현이 그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상상 속의 도현이 입을 열었다.
- 안녕, 너랑 친해지려고 말 걸었어. 왜냐고? 네가 곤란한 거 알거든.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나랑 친해지는 게 어때?
도현의 표정이 떫어졌다.
‘적선하는 것도 아니고.’
상당히 자존심 상할 법한 일이었다. 도현은 정희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별개로, 많은 부분을 몰랐다. 그가 맥처럼 자존심이 강한 편인지, 아니면 유연한 편인지. 도움을 불편하고 찝찝하게 여기는지, 기꺼워하는지.
지금까지 봐온 거로는 후자에 가깝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현재 상황만으로도 버거울 그에게 또 하나의 짐을 얹어주는 꼴이었다.
“그건 좋지 않을 거 같아.”
“나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어.”
그저 답답함에 나온 소리였던 건지, 한설아도 쉬이 수긍했다. 앓는 소리를 낸 그녀가 물었다.
“넌 목표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데?”
“생각해보면, 꼭 친해져야 할 이유는 없잖아.”
“뭐?”
애초에 목적은 남들 눈에 친해 보이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5반 애들의 눈에.
그러면,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될 일 아닌가?
속사정과 진실이 어떻든 말이다.
“생각해봐. 우리의 목표는 친해 보이는 거잖아. 친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친해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그게… 그렇게 되나?”
“응, 그렇게 돼.”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도현은 정희운과 진심으로 친해질 생각은 없었으니까. 훨씬 깔끔하고, 효율적인 행동 방식이었다. 왜 이제야 생각난 거지 싶을 정도로.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설아야, 표정이 안 좋아.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난 그냥 희운이를 속이는 거 같아서….”
그녀는 말하고도 놀랐는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미안, 못 들은 걸로 해줘. 도와달라고 한 건 나였는데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아냐, 네 말도 틀린 건 없어.”
도현은 우선순위를 매기는 데 능숙하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따지다가는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게 공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동화 속에나 존재하니까.
“그래도 난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으으… 내 말은 실수였어. 정말 그냥 잊어줘. 그래서,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
“글쎄. 이왕이면, 모두가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좋지 않을까?”
도현의 입술 끝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 * *
유난히 이상한 한 주였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반 애들도 그렇지만… 역시 가장 이상한 건 복도며, 교실 앞이며, 교무실이며, 누가 의도라도 한 것처럼 자꾸 마주치는 이도현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교실에 있기 싫어서 복도로 나오자마자 때마침 5반 앞을 지나가던 이도현이랑 마주쳤다.
마치, 걔가 날 찾아다니기라도 하는 것 같네. 문득 든 생각에 희운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 이도현이 왜 나를…. 왜 나를…?
어.
희운은 조금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이도현은 언제나 불가사의했다.
사막의 신기루도 아니고.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멀어지고,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가까워지는 애였다. 아니, 신기루보다는 도깨비불이 더 어울리겠다. 그편이 더 기묘해 보이니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주체가 이도현이 되니 꽤 그럴듯했다. 이도현은 희운이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이상한 존재였으니까.
가능성, 있을지도…?
상념에 빠져서 책가방을 싸던 희운은 더 이상 손에 잡히는 게 없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긋 뒷문을 보니 아직 나가지 않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희운은 꾸물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삼삼오오 모여 하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 집에 가면, 조금 외로워졌다. 정말 조금. 아무튼, 차라리 애들이 다 빠져나가고 한산해진 다음에 나가는 편이 좋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애들이 집에 갈 생각을 안 했다. 의아함을 느낀 희운이 살짝 기웃거릴 찰나였다.
“…이도현?”
희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하던 것을 찾은 사람처럼 환한 낯빛을 한 도현이 성큼성큼 걸어와 희운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일련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희운은 그대로 가방을 빼앗기고 말았다.
“가자, 희운아.”
희운아?
“응? 뭐 안 챙긴 거 있어?”
“그런 건 없… 아니, 어디를? 왜?”
“왜긴. 같이 하교하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희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분명 그런 기억은 없는데, 상대가 너무 당당하다 보니 기억에 의심이 들었다.
사실 내가 모르는 사이 얘랑 약속이라도 한 건가? 혹시 내가 몽유병이라도… 온갖 상념이 몰아치는 와중에, 도깨비는 희운을 재촉했다.
“자, 가자. 얼른.”
도현이 발걸음을 뗄 때까지도 멍하니 있던 희운은, 약 올리듯 도현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가방에 정신을 차렸다. 내 가방!
그런 희운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슬쩍 뒤를 돌아본 도현이 여우처럼 샐쭉하니 웃었다. 낚시라도 하듯이 가방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결국, 희운은 어정쩡하게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얼굴에 와닿는 반 애들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는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교문을 막 지나쳤을 때였다.
“잠깐, 멈춰 봐.”
희운의 말에 도현이 우뚝 멈춰 섰다. 희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골랐다. 상황이 이해의 영역을 떠나 있다 보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너, 왜 그래?”
포괄적인 질문이었다. 지금 상황을 묻는 것이면서, 최근의 이상한 행동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도현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도리어 초조해진 건 희운이었다.
“너 요즘… 전이랑 다르잖아.”
말하면서도 헷갈렸다. 요즘 따라 이상하게 군 건 맞는데, 예전이라고 평범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니 꾸준히 일관성 있게 이상했던 거 같기도 하고….
“너는 왜 그러는데?”
“어?”
“전이랑 달라진 건 너 아니야? 나 피하고 있잖아.”
뜨끔한 희운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것을 관찰하듯이 찬찬히 살펴본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그냥 궁금했어. 왜 피하나 싶어서. 그런데 자꾸 말할 시간을 안 주니까, 이렇게 찾아온 거고.”
“그, 그런 거였어?”
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나 피하는 사람 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어서 신경 쓰이기도 하고… 조금 속상하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개소리라는 걸 알 수 있을 법한 말이었다. 사람을 먼저 피한 건 도현의 쪽이었으니. 그러나 개소리에 할리우드 배우의 재능 낭비가 더해지자, 그럴듯하게 들려서 문제였다.
그 말에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 희운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이젠 안 피할게.”
희운은 속이 상했다.
‘피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나와 함께 있으면 안 좋은 소문으로 엮이니까. 그러니까 이쪽에서 먼저 피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반 애들이 왜 저를 꺼리는지 몰랐다. 그 변화는 꽤 서서히 이루어져서, 희운이 눈치챘을 때쯤에는 되돌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렇게 속으로만 앓다가, 그 일이 일어났다.
체육 수업 시간이었다. 부족한 라켓을 가지러 창고에 들어간 희운이 뒤이어 들어온 아이들의 수다 소리를 들은 건 우연이었다.
- 너 아까 정희운이랑 팀 했지?
- 어. 나 진짜 때려칠 뻔. 눈치 엄청 주더라.
- 걘 진짜 왜 그럴까? 이도현이랑 좀 어울린다고 자기가 슈퍼스타인 줄 아나 봐.
그들은 한참이나 떠들고서야 나갔다. 희운은 매트 뒤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리를 털고 일어났다.
창고를 나서는 순간 희운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혔다. 어디 있었냐고 웃으며 묻는 친구에게 희운은 웃어줄 수가 없었다. 그게 눈치 주는 것처럼, 이도현에게 업어가려는 욕심쟁이의 건방짐처럼 보이더라도.
그런 적이 있었다. 아주 어렸던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크게 싸웠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방에 숨어 있었다. 친구가 화해를 신청하러 올 때까지, 계속.
몸은 그때보다 두 배는 더 커졌는데, 희운은 여전히 겁이 많았다.
그래서 태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따져 묻지도 않고, 해명하려고 굴지도 않고. 도현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했다.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름의 항변이었다. 나는 너희들의 말처럼 그런 애가 아니라고. 혹시라도, 소문을 알고 있을 도현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는데….
‘너무 내 생각만 한 거였어.’
갑자기 바뀐 태도에 당혹스러웠을 도현을 생각하지 못했다. 또 내가 실수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속이 조여왔다.
“난 그냥… 그냥 내가 안 보여도 신경 안 쓸 줄 알았어. 미안해.”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는 나를 귀찮아하니까….”
일순 도현의 얼굴에 상당한 당혹감이 차올랐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희운은 보지 못했다. 애먼 땅을 툭툭, 두들기던 희운이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안 피할게. 진짜야.”
그 나름대로 비장한 결심이었지만, 도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희운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번질 때 즈음, 그의 입술이 열렸다.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거 같은데, 계속 피해도 돼.”
“뭐?”
“아니, 그냥 피해 다녀. 나는 나대로 네가 왜 피하는지 알아낼 테니까.”
“…뭐?”
“각자 할 일 하는 거야. 너는 너 하고 싶은 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 어려운 거 없잖아?”
어려운데요?
아니, 진짜 어려운데요?
“이러면 꼭,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서 네가 억지로 나를 견디는 거 같잖아. 그런 건 안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너는 피하고 싶으면 피하고, 대신 나는 네가 피하는 이유가 궁금하니까 따라다니고. 그런 거지.”
대체 뭐가 그런 건데?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해. 나는 집 가려면 이 길로 가야 하는데, 너는?”
“어, 나는 저쪽….”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내일 보자. 아, 이건 주고 가야지.”
품 안에 밀어진 가방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희운은 가방을 양팔로 껴안은 채,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도현은 참 산뜻하게도 뒤를 돌았다.
희운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대체 뭔데?”
대답해 줄 사람 없는 의문은 허공에서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