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0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7)
산뜻하게 걷던 발걸음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느려졌다. 길거리에 멈춰 선 도현은 나지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5반 앞에서, 다른 애들은 다 나오고 있는데 혼자만 안 나오고 있길래 의아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위축되어 주변을 살피는 눈동자 따위를.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놀랍게도 그랬다. 이미 정희운의 상황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 너는 나를 귀찮아하니까….
그 의기소침한 모습이라니.
정희운은 대화하는 내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반짝이는 시선으로 보던 게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렇게 시선을 땅에 고정하고, 지은 죄도 없으면서 고개를 떨궜다. 움츠러든 어깨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 계속 피해도 돼.
그렇게 말한 건 순전히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반 애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교도 못 하는 정희운이, 이번엔 제 눈치를 보며 저렇게 구는 걸 보니까, 충동적으로 한 말.
정희운이 태도를 바꾸는 건 반길 만한 일이다. 원하는 바를 더 쉽게 이룰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도현은 그것을 거부했다.
목표에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그런 돌발적인 행동을 한 건, 전부 정희운 때문이었다. 형의 동생이면서 당당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서, 그 거칠기까지 한 배짱을 물려받기는 무슨, 발 옆에 개미만 지나가도 까무러칠 것처럼 섬약하게만 보여서.
“…아.”
도현이 탄식했다. 크게 뜨인 눈에 미미한 파동이 일었다. 호수 한가운데 돌이 떨어진 것처럼, 동요는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따돌림, 인터넷에서의 비난. 그것을 알고 나서 도현은 화가 났다. 그 비이성적인 상황에 분노를 토해냈다. 그러나, 그 상황에 분노할지언정 정희운 자체를 걱정하진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게 이상하다는 것조차 이제야 인지했다. 왜냐하면….
…형은 그런 거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니까.
악의에 익숙한 성미는 병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무신경함이기도 했다. 도현은 확신했다. 만약 형이 정희운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는 중지 한번 치켜올리고 깔끔하게 잊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정희운도, 그럴 줄 알았다.
형과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천지 차이인데, 차라리 바위 같았던 형과 다르게 작은 충격에도 일렁이는 걸 알았는데. 그래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걔가 형의 동생이니까.
그런데.
‘…아니었어.’
정희운은, 정희성과 달랐다.
정희운은, 정희성의 동생은… 그냥 정희운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게, 다였다고.
도현은 헛숨을 내뱉었다.
“정희운이었어….”
처음 배운 단어를 익히는 어린아이처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소리를 내다가, 실소 같은 웃음을 흘렸다. 짧은 웃음이 간헐적으로 끊어지다가, 깊은 숨소리와 함께 잦아들었다.
도현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느지막한 오후의 햇볕은 붉었고 바람은 서늘했다. 도현은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소년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고여 들었다.
여름의 생기를 벗고 노을의 색을 덧입히는 단풍처럼, 새로운 변화가 찾아오는 가을이었다.
* * *
그 후로 도현은 본인의 말을 지켰다. 쉬는 시간마다 찾아가는 스토커 같은 짓은 하지 않더라도, 점심시간과 하교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기겁하던 희운도 차차 거기에 적응해갔다. 본래의 목적이었던 5반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의혹, 다음에는 불신, 그다음에는 동요.
마지막은 납득.
그들이 납득한 건 단순해서가 아니었다. 정희운과 이도현 사이의 접점이 퍽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러한 게, 5반에 찾아올 때면 도현은 희운의 옆에 앉아서.
“화랑도는 당시 종합 엔터테인먼트였다고 생각하면 쉬워.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이들이자, 군인들이자, 동시에 연예인이었거든. 사실 굉장히 복잡하고도 독특한 집단이지. 용춘은 그 집단의 우두머리였고 말이야.”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곧잘 나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레 사극 드라마 <왕의 길> 촬영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두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아서 납득했다.
“그런 사람을 이해하려면, 먼저 화랑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신라에서 어떤 위치였으며 실제로 어떤 일을 수행했는지부터 정확히 알아야겠지?”
“응!”
도현을 어려워하던 희운도 어느새 그가 찾아오는 걸 기대하게 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가장 닮고 싶은 배우가 1 대 1로 과외를 해주는데 누가 싫을까.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도현이었다.
“다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역사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어. <왕의 길>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화랑세기를 기반으로 쓰인 건 맞는데, 사실 판타지 드라마라고 봐도 될 정도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거든.”
드라마에 합류하게 된 이후 틈틈이 역사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드라마에 나온 설정과 역사는 다른 부분이 너무 많았다.
드라마에서는 시간대 변경까지 이루어져서, 사실상 평행우주 속 신라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었다. 이에 관해서는 성진수 감독과의 미팅 날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드라마가 방영된 후, 방송국 측에서 실제 역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따로 제작해 편성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를 통해 허구와 역사의 경계를 구분 지으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챙겨왔던 종이 뭉치를 넘겨주었다. 정희운이 의아해하며 그것을 뒤적였다.
“이게 뭐야?”
“방금 말한 거.”
“이, 이게 다?”
“응. 보면 도움 될 거야.”
정희운의 안색이 새하얘졌다가, 새파래졌다가, 거무죽죽하게 죽었다. 그는 이내 결심했는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 공부할게!”
그 반응에 도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학교 수업에서 연기를 맞춰볼 때부터 느꼈지만, 정희운은 근성이 있었다. 욕심도 있고.
‘좀… 본래 목적을 벗어나고 있는 거 같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드라마는 찍어야 하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
대본 리딩 날이 밝았다.
* * *
SBC 방송국은 아침부터 바빴다.
오전부터 잡혀 있는 <왕의 길> 대본 리딩 때문이었다. 책상과 의자 배치를 정리하고, 배우 이름과 배역이 적힌 종이를 붙이고, 자질구레한 정리를 하는 건 모두 스태프들의 일이었다.
“민우 씨, 거기 좀 옮겨 줘요.”
“예!”
그는 의자를 옮기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가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자리 배치가 특이하네요? 의자 수도 되게 많고….”
“아, 그거. 이도현 때문에.”
“네?”
“그 이도현이 출연하는데 말석을 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이도현은 불렀는데 다른 아역배우만 안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그러니까 아역 자리까지 다 만들어야 하는데, 이도현만 앞에 두면 너무 노골적이니까 다른 아역들 자리까지 끼운 거죠.”
“아….”
그는 혀를 내두르며 마저 의자를 옮겼다.
이도현이 한참 핫한 건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거물인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기대에 차올라 이따가 보게 될 소년을 그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얼마 후.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배우들이 하나둘씩 속속들이 도착했다.
스태프는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문을 봤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어!”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신형이 지금까지 온 이의 반토막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이도현이…!
“아, 안녕하세요!”
회의실에 들어온 소년은 바로 허리를 접었다. 스태프는 그 머리카락이 갈색이라는 걸 확인하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도현이 염색을 했던가?
그는 곧 진실을 알게 되었다. 소년의 드러난 얼굴이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순한 인상의 잘생긴 소년이었다.
…아, 뭐야. 괜히 기대했네.
스태프의 눈이 순식간에 심드렁해졌다.
“안녕하세요! 정희운입니다!”
“예, 예.”
그는 건성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이곳에서 하루에도 열 번씩 새로운 연예인을 보았고, 이도현이 아닌 배우는 그에게 별다른 감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는 됐다는 듯이 손을 휘적였다. 다시금 꾸벅 허리를 숙인 정희운이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러 달려갔다.
금방 갈색 머리 소년에 대해서 잊어버린 스태프는 시계를 흘끔거렸다. 이도현은 언제 오려나. 그리고, 다시금 회의실 문을 쳐다보았을 때.
“!”
그가 기다리던 인물이 등장했다.
‘…내가 바보였네.’
헷갈릴 사람을 헷갈려야지.
이도현은 온몸으로 자신이 이도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길에서 저 뒤통수를 보더라도 맞힐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만큼 존재감이 남달랐다.
“안녕하세요.”
게다가 이도현은 겸손하기까지 했다! 인기를 얻게 된 배우들은 스태프는 본체만체, 신경도 안 쓰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도현은 한 명 한 명씩 인사를 건넸다.
그가 자신에게도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자, 스태프는 묘한 감동과 뿌듯함에 휩싸였다. 저런 사람한테 내가 대우받는 데서 오는 충족감이었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오늘 응원할게요!”
“하하,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는 훈훈하게 끝이 났다.
워낙 친근하게 웃어준 탓에, 스태프는 어쩌면 이번 촬영 때 그와 친분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눈을 반짝였다.
* * *
‘이제는 방송국이 익숙하게 느껴지네.’
SBC는 방송국 투어로 한 번 와본 적도 있고 말이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도현은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쪽에 어정쩡하니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정희운을 발견했다.
왜 저러고 있지.
도현은 감독과 대화를 마무리한 후에 그에게 다가갔다. 정희운은 도현을 보더니 반색했다. 도현이 그에게 말을 걸려던 때였다.
“아, 이도현 배우님! 정말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정희운 옆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오며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일단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누군가 싶어서 쳐다보니, 사람 좋게 웃은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 희운이 매니저예요. 하하, 희운이랑 배우님이 굉장히 친한 사이라던데!”
“그래요?”
그런 소리를 할 애는 아닌데.
“우리 희운이가 많이 신세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이야, 진짜 빛이 나시네요.”
그는 수다스럽고, 어느 정도 방정맞은 사람 같았다. 그 옆에 서 있던 정희운이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도현은 부드러이 그의 말을 잘라낸 후, 희운에게 말을 걸었다.
“안 앉고 뭐 해?”
“아… 누구 들어오시면 인사하려고.”
“거의 다 왔어. 일단 앉아. 같이 앉아 있자.”
“응!”
희운과 함께 배정된 곳에 착석하자, 한 배우가 말을 걸어왔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 배우였다.
“우리 도현 배우님은, 사극은 처음인가?”
“아, 네. 퓨전사극 비슷한 거는 찍어봤지만요. 올해에 방영된 건데….”
도현의 목소리는 곧장 끼어든 목소리에 의해 끊겼다. 한 여자 배우가 호의 가득한 낯으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거 말하는 거죠? <구미호뎐>! 저 그거 진짜 재밌게 봤잖아요. 저 도현 배우님 팬이에요!”
“저도, 저도요!”
분위기가 도현 중심으로 흘러가자, 자연스럽게 끼어든 성진수 감독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도현 씨 1호 팬은 접니다.”
“네? 제가 먼저였을걸요?”
감독과 안면이 있는 듯한 배우가 딴지를 걸자, 분위기는 완전히 풀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어정쩡하게 앉아 눈동자를 굴리던 정희운도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얼마 뒤엔 모든 배우가 자리를 채웠다.
도현과 희운의 사이에는 덕만 공주 아역을 맡은 진윤아가 자리했다. 그녀는 얼마 전 영화관에서 본 미국 배우가 신기한지 자꾸만 도현에게 말을 걸다가, 완전히 그 방향으로 몸을 틀어 앉기까지 했다.
소녀가 몸을 바로 한 건 성진수 감독의 우렁참 외침이 울렸을 때였다.
“왕의 길 대본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그 순간 도현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도현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면서, 미실 역할의 배우를 주시했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폐하!”
첫 시작은 미실 역할의 배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