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01화 (402/582)

제401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8)

SBC 사극 드라마, <왕의 길>은 진흥왕이 승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병색이 완연한 진흥왕이 끝내 임종을 맞이하자, 그의 첩이었던 미실이 그 머리맡에서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아무런 빌드업 없이 곧장 시작한 연기였다. 감정을 잡기 어려울 법한데도, 미실 역할을 맡은 배우는 능숙하게 소화했다.

그녀의 감정이 악기라면, 그녀는 정말 멋진 장인이었다. 그녀는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율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오랜 연습과 노력으로 가다듬어진 실력이었다.

도현은 순식간에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온전한 순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을 원화-화랑의 여자 수장-로 만들어 준 진흥왕을 미실은 진심으로 존경했다. 미실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 그녀를 믿고, 끌어 올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슬픔에 잠긴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은 금륜 왕자였다.

금륜 왕자는 슬퍼하는 미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녀의 슬픔에 공감하고, 애타는 사랑을 말하며, 왕후 자리를 주겠노라고 약조했다.

<왕의 길>에서의 미실은 다소 유약하고, 위태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래서 더욱 감정적이고, 쉬이 타인에게 의지하고 마는 여인이었다. 미실의 내면이 드러나는 독백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불안과 두려움에 개연성을 더해줬다.

금륜 왕자가 내보이는 들끓는 연정에 미실은 마음을 열었다. 다시금 기운을 차린 미실은 그를 새 왕으로 옹립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신라는 제25대 왕, 진지왕을 맞이했다.

그러나.

“폐하, 제게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미실 역할의 배우, 신주하가 분노를 토해냈다.

단순히 분노가 아닌, 초조함과 불안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진지왕은, 미실이 아들을 낳았음에도 그녀를 왕후로 책봉하지 않았다.

“신첩을 왕후로 만들어 주겠다고요. 분명 그리 약조하셨습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모르겠어요? 내 그대를 왕후로 세워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뒤로 미루는 것뿐입니다. 아니면 나를 믿지 못하는 게요?”

신주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본래 주인공이 덕만 공주이다 보니, 첫 화는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시간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것에 가까웠다.

미실은 기다렸다. 애정을 속삭였던 남자를 믿으며, 오랜 시간을 스스로 다독이며 버텼다. 왕께선 나를 여전히 귀애하심이 분명하니, 언젠가 왕후로 맞이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난다. 진지왕이 기어이 다른 이를 왕후로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믿음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진지왕이 미실에게 바랐던 건 그녀의 권력뿐이었다. 순조롭게 왕의 자리에 오르고 탄탄히 기반을 다졌다 생각되는 지금, 굳이 그녀가 필요하지 않았다.

미실도 그것을 깨달았고.

“신첩이 더 이상 어여쁘지 않습니까? …아니면, 저의 힘이, 더는 필요치 않아서 그러십니까?”

사랑을 믿었던 여인, 미실은 철저히 배신당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버려진 미실은 미련인지 집착인지 모를 감정을 긁어모아, 독기를 머금고 말했다.

“폐하, 모르십니까? 가장 날카로운 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진지왕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게 웃으며, 더는 그녀가 필요치 않은 순간, 그녀를 쳐내기 위해 모른 척해 왔던 비밀을 꺼내 들었다.

“새주를 보면 그런 것도 같습니다. 새주는 자식마저 죽인 비정한 어미가 아닙니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쳐요? 지나치다고요? 먼저 나를 배신한 건 새줍니다. 정녕 모를 줄 알았습니까?”

진지왕이 분노에 차 내뱉었다.

“그대와 나의 자식이, 여아였다는 것을!”

쿵.

신주하의 두 눈이 충격에 물들었다.

도현은 몰입으로 인한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왕의 길>에서 비담은 단연코 그 출생이 가장 비밀스러우며, 복잡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미실의 가장 큰 과오이자 약점이었다.

왜냐하면.

‘비담은 미실의 자식이 아니니까.’

단순히 미실이 사통해서 낳은 사생아라는 뜻이 아니었다. <왕의 길>에서 비담은 정말로 미실의 핏줄이 아닌, 완전한 타인이었다. 그것은 미실의 비틀린 사랑으로 인한 결과였다.

금륜 왕자가 진지왕이 되고, 미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품게 되었다. 미실은 꿈에 차오른다. 이대로 아들을 낳으면 진지왕이, 자신의 부군이 자신을 더욱 귀애해 주리라고.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여아였다.

산파의 말을 들은 미실은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한다. 그러다 정말 여아라는 것을 확인한 후, 거대한 공포에 빠진다.

아들이 아님을 알고 부군의 사랑이 식어버리면? 남아를 생산하지 못한 나 대신 다른 여인을 찾게 된다면….

공포에 질린 미실은 다분히 충동적인 선택을 내린다. 오랜 시절 저를 보필해온 유모에게, 궁 밖으로 나가, 갓 태어난 남자아이를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유모가 데려온 갓난아이를 받아든 미실은 제 아이의 뺨을 건드려 보려다, 창백한 낯으로 흐느끼듯 웃으며 손을 물리고.

다음 순간, 하얀 베개로 아이를 누른다.

- 괜찮다, 괜찮아….

밤이 지날 때까지, 계속.

“어, 언제, 언제부터….”

다시 시점은 현재로 돌아왔다.

신주하의 손이 덜덜 떨렸다. 무슨 심정으로, 내가 무슨 심정으로 아이의 숨을 거뒀는데. 내가 무슨 심정으로….

“그 죄가 가려질 줄 알았습니까? 새주, 나는 당신이 무섭습니다. 무섭고 치가 떨려요.”

“폐하…. 저는, 저는 그저 폐하를 연모하여서,”

“연모요. 하!”

기조차 차지 않는다는 듯 웃은 진지왕이 차갑게 말했다.

“새주, 그대는 똑똑한 사람이지요. 내 말을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는 그 얘기를 꺼내지 마세요. 그 아이의 존재를 참아주고, 새주를 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의 도리는 다했으니.”

“아, 아….”

그렇게 미실은 무너졌다.

오직 연심 때문에 제 아이를 죽이고, 사랑하는 부군까지 기만해 가면서 그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여인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고.

“아…하하하! 하하하하!”

어쩌면, 새로이 태어났다.

신주하의 연기에 미친 듯이 몰입해 있던 도현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제 도현이 대사를 쳐야 할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 비담은 8세이기 때문에, 원래는 도현의 아역이 해야 할 부분이었다. 아역의 아역이라니까 조금 재미있지만, 아무튼 그랬다.

도현은 대타였다. 대본 리딩 날 모든 배우가 자리를 채울 수는 없으니 말이다. 도현은 속으로 수를 센 후, 표정을 활짝 폈다. 반가운 누군가를 만난 사람처럼.

그리고.

“어마마마!”

“!”

도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천진한 목소리에 성진수 감독이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떴다. 눈을 감고 들었다면 이도현이라고 조금도 믿지 못할 목소리였다. 그가 귀를 의심하는 사이, 연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 부르지 말거라.”

“예?”

“나는 네 어미가 아니다.”

비담, 도현은 그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되묻고자 고개를 든 도현은 신주하의 표정을 보고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 선명히 차오른 감정은, 증오였다.

“너 또한 내 아들이 아니다.”

자식을 버렸다. 부군을 기만하고 세상을 속였다. 그 모든 건 단 한 가지, 들끓는 연정이었는데 모든 게 끝났다.

이제 비담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아니, 죽여 없애,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할 대상이었다. 온전하다고 생각했던 비밀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마지막 모정을 발휘해 죽이진 않을 터이니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궁을 떠나거라.”

하지만 미실은 비담을 죽이지 않았다. 모정이었는지, 아니면 버려진 연정에 대한 마지막 미련이었는지, 그녀만이 알 것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비담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비극일 뿐이었다. 그저 갑자기 내리친 날벼락이고, 세상이 뒤집힌 순간이었다.

“어마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마마마!”

도현이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천진한 목소리에 섞인 간절함과 다급함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 찡해질 정도였다.

이후, 미실은 사랑받기를 포기했다. 보답받지 못한 사랑은 미실을 무정한 복수자로 만들었다. 그녀는 진지왕의 폐위를 주도했고, 화려하게 치장한 채 이제는 옛 부군의 앞에 섰다.

“제가 가진 권력이 그리도 좋으셨습니까. 어리석은 여인을 몇 년이나 속일 정도로요. 그렇다면… 그 권력 제가 갖겠습니다.”

미실이 꽃처럼 웃었다.

“폐하, 이젠 제가 어여뻐 보이십니까?”

그렇게 백정 왕자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 제26대 왕, 진평왕이었다.

* * *

잠깐 주어진 쉬는 시간에 사람들은 제각각 할 일을 했다. 화장실에 가서 자리를 비운 사람이 있는 한편, 회의실에 남은 사람도 꽤 많았다. 도현은 후자였다.

도현은 좀 전에 보았던 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흥분으로 인해 숨이 가빴다. 소년이 고개를 들자, 그 방향 끝에는 아까의 강렬함을 모두 지운 신주하가 있었다.

“음?”

그녀는 도현의 시선을 느끼고는 웃었다. 도현은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말을 걸고, 아까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목소리까지 바꿔서 연기할 줄은 몰랐는데, 인상적이었어.”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신주하였다.

“…선배님 연기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어요.”

“어머?”

얘 좀 봐라, 하는 얼굴로 웃은 신주하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나랑 비교하는 거니? 내가 연기를 해온 게 몇 년인데? 너랑 나이 차이는 어떻고?”

“건방지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화난 게 아니라 감탄한 거야. 이게 할리우드 배우의 패기구나 싶어서. 나랑 연기를 비교하는 애는 또 오랜만에 보네. 그것도 이렇게 어린 애가.”

그녀는 흥미로운 눈빛을 했다.

“너도 충분히 잘했어. 아니, 네 나이를 생각하면 아주 훌륭했지.”

어린애들이나, 경험이 미진한 배우들은 그녀의 기백에 밀려 페이스를 잃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도현은 짧은 장면이었지만, 한순간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더 욕심이 나?”

“네. 더 잘하고 싶어요.”

선배님보다 더요. 뒷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신주하는 들은 기색이었다. 그녀는 굉장히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 정말 재밌다.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어떻게 클지 정말 궁금하네.”

“영광이에요.”

“안 봐줄 테니까 열심히 해.”

그 말이 도현은 오히려 기꺼웠다. 신주하는 도현이 오랜만에 만난 감명 깊은 배우였다. 그때였다. 도현은 작게 드륵, 거리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어디 가?”

“으응!?”

희운은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과도하게 놀랐다. 말을 건 도현이 다 무안해질 정도였다. 감탄사인 듯 비명인 듯 묘한 목소리에 시선이 쏠렸다.

희운은 달아오른 낯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화, 화장실 가려고….”

“둘이 아는 사이야?”

당혹스러워하는 희운이 불쌍했는지, 신주하가 말을 걸었다. 도현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도현이랑 친구 사이라니까 이 친구도 잘할 거 같네. 아, 그렇다고 지금 연기를 보겠다는 건 아니니까. 얼른 갔다가 와, 얘야.”

조금 짓궂은 그녀의 말에 희운은 더 빨개질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른 채로 간신히 대답하고선, 도망치듯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도현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곧 고개를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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