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2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9)
<왕의 길> 대본 리딩 현장의 최고 인기인은, 단연코 도현이었다. 사실 어딜 가도 그러지 않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를 이상하거나 특이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네, 아주.’
한 스태프가 그 광경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도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장면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배우라는 점일까.
“나를 알고 있어?”
“그럼요. 당연히 알고 있죠. <대왕전기>에도 출연하셨잖아요.”
“진짜 알고 있네!”
도현을 둘러싼 배우들은 여러 차례 놀라는 중이었다. 도현이 이곳에 있는 모든 배우의 이름과 커리어를 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걸 다 외워요?”
그들은 도현을 상당히 특이하게 여겼는데, 도현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명단을 뽑아 달달달 외운 게 아니었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한 번씩 찾아봐요.”
그냥, 봤더니 안 잊힌 거지.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겸손의 말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도현의 뛰어난 기억력은 배우들 사이에서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배우가 자신을 기억해주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배우들과 안면을 트며 대화를 나누던 도현은, 정희운이 조용히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오늘따라 조용한 그가 신경 쓰여 고개를 틀었지만, 눈이 마주친 사람은 정희운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
도현과 눈을 마주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진윤아가 맑은 눈을 반짝였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있다면 다 갖다줄 기세였다.
“네? 아니, 없어요.”
“왜 없지?”
고개를 갸웃한 진윤아가 발랄하게 말했다.
“저는 하나 있어요!”
“네?”
불길할 정도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이따 가기 전에 번호 교환하면 안 돼요? 다른 애들한테는 절대 말 안 할게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요.”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적극적인가.
…아, 이거 그거네.
초반에 저를 보는 정희운의 눈빛이 딱 저랬다. 동경, 선망, 친애, 반가움, 호감… 아무튼 좋은 감정만 꾹꾹 눌러 담은 눈빛.
‘지금은 달라졌지만….’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 생기가 없었다. 반짝임도 줄어들었다. …왜일까. 그걸 깨닫고 나니,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생각난 김에 정희운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다시금 재잘대기 시작하는 진윤아 탓에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동료 배우니까 알고 지내면 좋을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할게요.”
“정말요? 앗싸! 그리고 저한테 말 편하게 해도 돼요! 제가 동생이거든요!”
“동생?”
“저 6학년이에요!”
저 말은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소리였다. 새삼 실감 나는 나이에 도현이 진윤아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약간, 갓 태어난 토끼가 뛰어다니는 걸 보는 눈빛이었다.
“그럼 너도 편하게 해.”
“네, 아니, 응!”
그 빛나는 표정은 동경으로 꽉꽉 들어차 있어서 도현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내가 이런 시선을 받을 사람이었던가.
고개를 드니 어른들이 아역배우들의 친목 현장을 훈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도현은 괜히 부끄러운 느낌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본 리딩을 시작하겠다는 말이 들렸다. 도현은 대본을 다시금 점검한 후,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오늘 찍은 영상은 적당한 편집을 거친 후, 예고편처럼 짧게 나갈 예정이었다.
아직 도현의 등장 장면은 멀었는데도 카메라 한 대가 도현을 찍고 있었다. 화제성을 쪽쪽 뽑아먹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도현은 앞에 있는 물로 목을 한 번 축인 후, 입술을 핥았다. 생각해보면 꽤 오랜만의 연기였다. 마지막이 몇 개월 전이었으니까. 도현의 얼굴에 즐거운 기색이 올라왔다.
그가 즐거운 이유는 비단 오랜만의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2화에는 도현뿐만 아니라 정희운도 등장했다. 도현의 시선이 드디어 긴장한 낯빛의 소년에게 닿는 데 성공했다.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데.
학교 수업 때 몇 번 본 적 있지만, 실전과 연습은 다른 법이었다. 연습 땐 평범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막상 무대에 서면 빛나는 배우들이 있었다. 오늘은 정식 무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는 할 수 있는 거니까.
“시작하겠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사인에 도현의 눈빛이 곧장 진지해졌다.
* * *
2화의 첫 시작은, 진평왕의 백정 왕자 시절의 정부인이 왕후로 책봉되는 장면이었다. 진평왕의 첩이 된 미실은 그 장면을 웃으며 바라본다.
그날 저녁.
“어찌 이리 태연하십니까! 왕으로 세운 건 궁주신데, 애먼 이가 왕후가 되다니요!”
“글쎄요.”
“궁주!”
풍월주의 외침에도 신주하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녀는 생긋 웃더니, 묘한 눈으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진정하세요. 그저, 계속해서 남아를 생산하지 못하는 왕후라면….”
신주하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이전의 순수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여인만이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있느니만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 뜻은….”
“왕후의 아들은 삼 년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하늘의 기운이 제게 그렇게 알려주고 있군요.”
옛 부군도, 눈앞의 연인도, 나의 권력을 사랑한 거라면, 내가 권력 그 자체가 되면, 그 또한 나를 사랑한 게 되지 않겠는가.
신주하의 묘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해당 장면이 끝이 났다. 드라마에서 그다음은 곧장 몇 년 후로 넘어간다. 덕만과 천명 공주가 태어나고, 왕자가 셋이 태어나지만 셋 모두 세 살을 채우지 못하는 시점으로.
왕후가 있는 내실로부터 오열 소리가 들려왔다. 왕후는 창백하게 질려 죽은 아이를 붙잡고 절망했다.
왕후 역할을 맡은 배우는, 도현의 <구미호뎐>을 언급하며 팬이라고 말했던 여배우였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연기는 몰입력이 있어서, 그것을 보고 있던 진윤아는 그녀의 감정에 동화되었다.
붉어진 눈시울로 가슴께를 들썩거리던 진윤아가 애처로이 그녀를 불렀다.
“어마마마….”
또다시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식된 왕후에게 공주의 목소리는 닿지 못했다. 덕만은 주먹을 말아 쥐다가,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덕만 공주의 동생, 천명 공주는 덕만의 뒤를 따라갔지만, 놓치고 만다.
천명은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런 천명의 귀에 궁녀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온 건 우연이었다.
“왕자님이 또….”
“왕후께서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사실 아니야?”
“얘! 너 미쳤어? 그런 소리 하다간 큰일 나!”
천명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숨이 거칠어졌다. 정제되진 않았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은 연기였다. 오히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현이 어린 아역에게서 눈을 뗐다.
이제 용춘이 등장할 차례였다.
대본에 따르면, 씩씩거리는 천명의 뒤에서 용춘이 나타나 그녀의 귀를 막아준다. 그리고 다정하게 어린 소녀를 달랜다.
어린 공주의 애끓는 짝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검은 눈에 흥미와 기대가 차올랐다. 시선 끝에는 잔뜩 긴장한 소년이 있었다. 특유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대본에 고정한 소년이.
소년이 긴 호흡을 내쉬었다.
그리고.
“저런 소리는 듣지 마세요.”
정희운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용숙?”
“귀담을 필요 없는 낭설입니다.”
푹신한 구름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는 한없이 온화했다. 정희운은 설핏 낯빛을 굳힌 후, 사뭇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제가 따끔히 혼내줄까요?”
…괜찮네.
발성도 좋았고 흐름도 자연스러웠다. 정희운이 해석한 용춘은 어딘가 그와 닮아 있었다. 누르면 그대로 푹 눌릴 것처럼 물렁하게 보이는 점이 그랬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분명 정희운과 잘 어울리는 연기였다. 스스로에게 잘 맞는 연기를 잘도 찾아왔구나 싶을 만큼. 다만, 너무 부드럽고 편안하다 보니 용춘의 첫 등장이자 천명의 오랜 사랑의 시작이라기엔….
“약간 아쉽네.”
도현은 순간 자신이 말한 줄 알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신주하였다.
“얘, 잘했어. 잘했는데 조금만 바꿔서 다시 해볼래? 조금 더 단호함을 섞어서. 다정한 건 좋은데 너무 부드럽기만 해 보여. 그보단 부드러움 안에 단단한 심지가 있는 느낌으로. 알겠어?”
“네, 네! 다시 해보겠습니다!”
정희운은 당혹스러운 것처럼 보였으나, 곧 안색을 수습하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대응하는 모습에 도현은 의외란 표정을 했다.
내가 쟤를 너무 무르게만 봤나.
심호흡한 정희운은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후,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 후 연기가 시작됐다.
“저런 소리는 듣지 마세요.”
그러나 나름 만전을 기하고 시작한 연기는 곧장 끊기고 말았는데,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신주하가 다시금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부분은 더 부드러워도 돼. 처음부터 딱딱하게 나가는 게 아니라, 두 번째 대사부터.”
신주하는 나름대로 친절하게 정정해 주면서도 ‘이걸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정희운의 낯빛이 조금 붉어졌다. 그는 금방 기합이 들어간 대답을 외쳤다.
“다시 하겠습니다! 큼, 흠… 저런 소리는 듣지 마세요.”
“용숙?”
“귀담을 필요 없는 낭설입니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제가 따끔히 혼내줄까요?”
“너무 빨랐어. 마지막 대사 들어가기 전에 한 호흡 쉬고.”
“귀, 귀담을….”
“아니, 하아…. 처음부터 다시 해야지.”
신주하의 한숨 소리에 정희운의 손이 움찔 떨렸다. 정희운의 얼굴에 미소가 올라왔다. 애써 웃으며 다시 해보겠다고 한 소년은 이제 아까와 달리 창백해 보였다.
“저런 소리는 듣지 마세요.”
“요, 용숙?”
“귀담을 필요 없는 낭설입니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제가 따끔히 혼내줄까요?”
대사를 읊으면서도 반사적으로 신주하의 안색을 살피던 정희운은 장면이 끝난 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너 지금 면접 보니? 왜 내 눈치를 봐?”
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깨져 나갈 듯 차가운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희운이 뻣뻣하게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은 네 배역한테 해야 할 일이고. 배우는 틀리든 말든 자기 연기에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너는 너 스스로 믿지 못하고 있잖아.”
그녀는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낯으로 말했다.
“너도 못 믿는데, 남더러 믿어달라고? 네 연기의 답을 남한테서밖에 못 구하겠어?”
신주하의 목소리가 조금 뾰족해지자, 성진수 감독이 다급히 끼어들어 넉살 좋게 말했다.
“아이고. 주하 씨, 조금 진정하시고요. 아직 어린 배우라 긴장해서 그렇죠.”
신주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하자, 성진수 감독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대본을 쥔 손을 무의식적으로 오므리던 정희운은 보았다.
감독의 말은 자신을 두둔하고 있지만, 시선은 희운이 아니라 도현의 쪽을 향하고 있었다. 도현과의 친분을 이유로 희운을 캐스팅해왔던 만큼, 현 상황에서 도현이 감정이 상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의 중심에 있는 건 자신인데, 내가 타자가 되는 건, 조금은 묘한 일이라서 희운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