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03화 (404/582)

제403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0)

성진수 감독은 식은땀을 흘리며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모셔온 귀한 몸인데, 이 한 번으로 SBC를 안 좋게 보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거니까.

도현은 특유의 무감하고도 고요한 낯이라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성진수 감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주하가 조금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여기 더 어린 배우도 있어요. 어리다는 이유로 못 하겠으면 배우를 하면 안 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도 감독이 말리는데 더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였다.그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됐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몇몇 선배 배우에게 죄송하다는 듯이 웃어 보인 후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분위기를 흐렸네요. 다시 시작하죠.”

“죄송할 게 뭐 있어요. 다 연기 욕심에 그런 거지. 그리고 아가. 이름이… 정희운?”

“…아, 네!”

책상에 붙은 제 이름표에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정희운이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드러난 얼굴은 약간 창백했다.

“그래, 희운이. 너무 풀 죽을 필요 없어. 주하가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말해준 거야. 안 그랬으면 말도 안 해줬지. 그러니까 앞으로 더 잘하면 돼.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희운은 어설픈 미소를 내걸었다.

연륜 있는 배우의 중재로 인해 분위기는 완전히 풀린 것처럼 보였다.

이후로 신주하는 정희운의 연기에 종종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별다른 첨언을 하진 않았다. 겉보기에는 이렇다 할 문제 없이 순조로운 대본 리딩이 이어졌다.

장면이 넘어감에 따라 조금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점차 흐려지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르러서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증발했다. 자연스러운 증발은 아니었다.

“육 년입니다.”

순식간에 모든 기억을 휘발시키고 주목을 쓸어 담는, 괴물 같은 존재가 등장한 탓이었다.

도현이 신주하를 보았다.

“육 년간, 수도 없이 고민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무슨 죄를 저질러 어머니께서 나를 버렸을까. 왜 그리 매정하게 내치셨을까. 잘못했다고 빌면 받아들여 주실까!”

대사가 길어질수록 감정 또한 고조되어 갔다. 감정이 격렬해질수록 소년은 분노로 마비되어 갔다. 신주하를, 어머니인 미실을 또렷하게 응시한 소년은, 심장에서부터 올라온 핏물처럼 대사를 울컥 토해냈다.

“그런데, 제가 사생아였다고요.”

숨을 쉬는 타이밍, 불안하게 흐트러지는 숨결, 대사의 강약, 분노로 상처를 숨긴 눈빛과 음의 높낮이까지.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때부터 대본 리딩은 신주하와 이도현의 지배하에 흘러갔다. 두 사람의 연기는 서로 한 치의 밀림 없이 치열했다. 희운을 탐탁잖은 눈으로 보고 한숨을 내쉬던 신주하는 불씨가 타닥, 타닥 타오르는 눈으로 도현에게 몰입했다.

“너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오지 말아야 했다고요? 그게 전부입니까? 당신은 키운 정도 없으십니까?”

“내게 쓸모없는 것은 필요 없다.”

“당신께선 좋으시겠습니다. 쓸모로 값어치를 매겨 제 자식까지 버리니까. 모든 것을 값어치로 판단하면 되니 참으로 편한 인생이 아닙니까?”

비담이 완전히 타인이라는 것은 비담마저도 몰라야 하는 진실이었다. 특히나 핏줄로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신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실을 숨긴 미실과 십사 년 만에 출생의 진실을 깨달은 비담이 저마다의 감정을 갖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드라마 <왕의 길>의 주인공은 미래의 선덕 여왕, 현재의 덕만 공주였다. 그러나 이 순간, 주인공조차 밀어내고 공간을 장악한 이는 이도현과 신주하였다.

대각선 위치로 떨어져 있는 테이블. 분명 먼 자리임에도 두 사람은 그들만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 공간이 그들에 의해 마음대로 조율되고 연주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불시에 몰아치는 재해를 맞닥뜨린 것처럼, 무력하게 두 사람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미실의 말은 맞았다. 궁에 온 비담은 감당할 수 없는 비참함을 몇 번이고 겪어야 했다. 그의 비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실은 비담에게 또다시 절망을 안겨준다.

비담과 덕만의 사이에 연정이 오갔음을 알고, 덕만을 이용하고 기만하도록 종용한 것이다.

비담은 분노했다. 더 실망할 곳이 없을 것 같았는데, 계속해서 바닥을 보여주는 어미에 또다시 실망하고, 역정을 냈다. 그렇게 분노하던 비담은 미실과 눈을 마주치게 되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제가 무슨 짓을 하든 미실을 동요시킬 수 없다는 것을.

하하, 짧게 웃음을 토해낸 도현이 일그러지는 낯으로 웃었다. 그것을 웃는 낯이라고 칭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지막한 음성이 울렸다.

“…그러면, 그리하면. 저는 조금 쓸모가 생깁니까?”

검은 눈동자는 채워질 수 없는 모정을 분노로 채웠다. 자신을 버린 어미에 대한 비틀린 분노와 집착이 어둡게 번들거렸다.

‘저 미친.’

아까부터 완전히 집중해서 보고 있던 성진수 감독은 온몸을 타고 흐르는 떨림을 느꼈다.

신주하와 도현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그들은 분명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이었다. 그러나 모자지간이란 걸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었다. 보답받지 못할 애정에 굶주려 스스로를 망치고 만다는 점이, 결국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다는 점이 그러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순간을 도현은 건조하게 표현해냈다. 너무 검어서 차라리 표백된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웃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깨달았다.

이래서 이도현이구나.

이쪽 업계에서 그의 천재성은 입이 닳도록 오르내리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사람들은 막연히 생각하곤 한다. 재능 있고, 운이 따라준 아이구나.

그 생각이 깨어져 나간다.

재능? 당연히 있지. 운? 물론 따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너머, 넘볼 수 없는 어떠한 영역의 무언가가 존재했다.

희운 역시 도현을 보며 동경과 경탄의 눈빛을 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조금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는 중력이 버거운 듯 힘을 잃고 추락했다.

희운이 생각해도 도현을 캐스팅한 건 신의 한 수였다. 화제성, 연기력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그에 비해….

대본을 쥔 작은 손이 살짝 떨렸다. 희운은 애써 제 이름표를 보았다. 정희운, 용춘 역. 몇 자 안 되는 그 글자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봐, 내 이름이 쓰여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야. 내 자리야.

내 자리야, 그러니까 괜찮아.

* * *

“너 진짜 잘하더라. 내가 밀리는 거 같았어.”

도현은 곧장 부인했다.

“선배님 연기 보고 많이 배웠어요. 제가 멀었단 걸 다시 느꼈습니다.”

“어머. 말도 잘하네.”

대체 부족한 게 뭐냐며, 짓궂게 말한 신주하가 호의와 흥미가 어린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래도 잘했다는 건 진짜야. 겸손한 건 좋은데, 자신감도 중요한 거 알지?”

그 말에 도현은 약간 멈칫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신경을 쓰기 전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감사합니다.”

“벌써 촬영 때가 기대돼서 어쩌지. 그땐 더 괜찮은 연기 보여주는 거니?”

“네, 오늘은 힘을 좀 뺐거든요.”

“얘 뻔뻔한 것 좀 봐!”

웃음을 터트린 신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에 힘 준 연기 기대할게. 오늘 수고했어.”

“선배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그래.”

손을 살랑살랑 흔든 신주하는 몇몇 사람들과 더 인사를 나눈 후 회의실을 나갔다.

신주하가 떠나고 도현은 무언가를 찾는 듯이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런 도현의 눈에, 회의실을 떠나는 정희운의 뒷모습이 보였다.

“잠깐….”

“도현 씨! 오늘 진짜 대단했어요.”

“아, 감독님.”

도현은 정희운이 나간 문을 흘깃거렸다. 스치듯이 본 표정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할 말 많은 얼굴을 한 성진수 감독을 무시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 도현 씨를 섭외해서 다행이지 뭡니까. 아니, 누가 대본 리딩 날 이렇게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할 줄 알았나! 여기, 팔에 닭살 돋은 거 보여요?”

“하하….”

“내가 확신하는데, 이거 영상 나가면 난리 날 겁니다. 이래서 이도현, 이도현 하는구나 싶었다니까요. 우리 첫 화 시청률은 뭐, 따다 놓은 당상이네요.”

성진수 감독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신주하와 이도현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봤는데 어깨춤이 절로 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그는 감독으로서 확신했다.

이건 분명 대박 난다.

한 가지 걱정인 건….

‘이래선 성인 배우가 밀리겠는데.’

오늘 완전히 주인공처럼 굴었지만, 도현은 어디까지나 아역이었다. 비담의 어린 시절이 끝나는 순간부터 등장하지 않는 아역. 물론 비담 역할의 성인 배우도 쟁쟁한 사람을 데려오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도현에 비해서 임팩트가 약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분량 좀 늘려보자고 할까?’

이러다간 안팎에서 항의를 받게 생겼다. 고민스럽긴 하지만, 배부른 고민이라서 성진수의 얼굴을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감독에게 한참 붙들려 있던 도현은 간신히 풀려났다. 정희운이 이미 건물 밖을 나갔을 것 같아 조금 조급하게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선배님! 저 번호!”

“아.”

다른 어른들한테 밀려 순번을 기다리고 있던 진윤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도현은 까먹고 있었단 사실에 미약한 미안함을 느끼며 번호를 저장해 주었다.

“우와!”

진윤아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 모습에 왠지 불안해진 도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친구들한테는 알려주면 안 돼.”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중학교 입학 후 학기 초반에, 대체 누가 퍼트린 건지 번호가 공개되어서 모르는 사람한테 연락이 쏟아졌다.

그래서 한 번 번호를 바꿔야 했다.

“물론이죠!”

진윤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쾌활한 낯이나 활발한 성격이 딱 말괄량이 공주 같아서, 이쪽도 캐스팅 참 잘되었구나 싶었다.

번호까지 주고 나서 도현은 진짜로 회의실을 나왔다. 도현이 걸음을 재촉하자, 경찬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서둘러?”

“친구를 찾으려고 했는데….”

도현은 텅 빈 복도를 응시했다. 길게 뻗어진 복도에 돌아다니는 사람 중에서 작은 체구의 소년은 없었다.

“…가버렸네요.”

왜 그런 표정인지 궁금했는데.

“어떻게, 찾아볼까?”

맥이 탁 풀린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 없다면 이미 건물을 떠났을 가능성이 컸다. 입술 사이로 한숨을 내뱉다가, 문득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부터 정희운을 그렇게까지 걱정했다고.

기를 써서 피할 때는 언제고, 친한 척 좀 하다 보니까 진짜 친한 줄 아는 건가 싶어서 조소가 나왔다.

“아니에요. 그냥 가요.”

“괜찮겠어?”

“네. 학교에서 보면 돼요.”

어차피 금방 다시 만나게 될 사이였다. 그래서 도현은 애써 찝찝함을 지워냈다. 발걸음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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