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4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1)
학교에 가자 반 애들이 도현을 반겨주었다. 도현은 아이들이 쏟아내는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다가, 눈짓을 보내는 한설아에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피했다.
“왜?”
주변을 살핀 한설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전략, 효과가 있는 거 같아.”
“뭔가 바뀌었어?”
“응. 내 5반 친구한테 들었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는 거 같대. 근데 전에 친하다가 멀어진 무리는 아니고, 조금 중립적이었던 애들이 태도를 바꿨나 봐.”
“그거 다행이네.”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래? 뭔가 심란해 보여서…. 아니면 다행이고! 아무튼, 일이 잘 풀려서 안심이야. 그게 정말 먹힐 줄은 몰랐는데.”
“네가 말해줬잖아. 5반 애들이 다 정희운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눈치를 보고 있는 거라면 움직일 계기만 만들면 될 것 같았거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나쁜 애들은 아니었던 거 같네. 그렇지?”
“응. 정말 그래.”
한설아는 안심한 낯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반 애들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눈을 이상하게 뜨는 서일준에 도현이 왜 그렇게 보냐고 물었다.
“아냐~.”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뭔데 그래.”
“어유, 이런 일에 3자가 끼어드는 거 아니야. 난 말 못 해.”
“이런 일?”
설마 정희운 일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도현은 차분히 반 아이들 면면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들의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을 확인했고, 곧장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무 사이 아니야.”
“내가 뭐랬나?”
“아이고, 눈꼴 시려. 솔로인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한설아가 당혹스러운 낯을 했다. 그녀는 재빨리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오히려 도현이 묻고 싶었다. 한설아와 제 사이에서 언제 그런 기류를 본 것인지.
“진짜 아니야. 나 연애… 같은 거 할 생각 자체가 없어.”
말하면서도 왜 이런 걸 말하고 있나 싶어서 현타가 찾아왔다. 도현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선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설아가 아깝잖아.”
“뭐?”
한설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은 같은 말이라 해도 상대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대체 뭔 개소리지 싶었다.
“아까워도 네가 아깝겠지, 뭔 소리야?”
그 반응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한 건 빈말이 아니었다. 자기애나 자존감을 떠나서, 도현은 스스로 조금 비틀린 사람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한설아는 딱 열네 살 같았다.
자신의 감정이든 타인의 감정이든 일단 의심하고 보는 음침한 구석이 있는 소년이 아니라,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 줄 아는, 평범한 열네 살의 소녀.
도현이 단호히 말했다.
“네가 아까워.”
“네가 아깝다니까?”
“네가….”
“네, 커플 염장 잘 봤고요.”
“…….”
드물게 말문이 막힌 도현이 넋 나간 얼굴로 서일준을 보았다. 도현은 몇 초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런…, 왜, 왜 그렇게 되는 거야?”
도현이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너희 요즘 엄청 붙어 다녔잖아. 티 얼마나 많이 났는데. 우리가 모른 척해 주려고 정말 기를 쓰고 노력했어. 알아?”
“아니, 그건….”
“변명하지 않아도 돼. 비밀은 지켜줄게. 우리 다 그러기로 했어.”
서일준의 말에 2반 애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아이들은 훈훈한 눈빛으로 엄지를 치켜올렸다.
도현은 이제 황당함을 넘어서 반박할 기운조차 없어졌다. 혼이 나간 눈으로 한설아를 쳐다보았다가, 그녀의 얼굴에 어린 곤란함을 읽었다.
도현은 짧게 고민했고, 곧 실행했다.
“나 좋아하는 애 있어.”
“…헐.”
“그러니까 그런 오해는 하지 말아줘. 설아가 불편해하잖아.”
“헐.”
“이 이야기는 끝난 거로 알게.”
“헐….”
도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자, 멍하니 있던 서일준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는 흥분한 낯으로 물었다.
“뭐야, 진짜야?”
“응.”
“와, 돌았네. 우리 반?”
“아니.”
“그러면?”
“우리 학교 아니야.”
“뭐?”
“미국에 있어. 말해도 모를 거야.”
“헉….”
“미국이래.”
“그럼 미국인이야?”
“그러겠지, 멍청아.”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인 거 같은데.
이렇게 말하면 한설아와 사귄다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풀어줄 줄 알았는데, 반 아이들은 오히려 다른 주제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맘때쯤 애들이 연애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몰랐던 도현의 패착이었다.
“로맨틱해…!”
“그럼 장거리 연애야?”
“어떻게 생겼어? 걔도 배우야?”
“걔 톡톡해? 아니면 인별?”
2반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서로 풋풋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도현의 한국행으로 이별한 가련한 미국인 소녀가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구체화되어 허리까지 오는 긴 금발 머리에 흰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어여쁜 소녀가 되었다.
‘금발, 흰 원피스….’
이건 진인데.
도현은 혀를 살짝 깨물었다. 주변에 다비드가 있었으면 멱살을 잡혔을 게 분명했다. 그가 모르도록 해야겠다며, 굳게 다짐했다.
그때 수업 종이 쳤다. 도현은 미련 가득해 보이는 아이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드디어 해방을 맞이한 도현의 미소는 참 산뜻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
톡톡, 책상을 두드린 한설아가 무언가를 건넸다. 쪽지였다. 더 할 얘기가 남아 있었나. 의아해진 도현이 쪽지를 폈고.
[혹시 신시아 엘더야? 아니면 루카 하퍼? 아니면….]
“…….”
저와 작품을 찍은 적 있던 여자애들의 이름이 나열된 걸 보고 그냥 다시 접었다.
한설아가 궁금하다는 듯이 기웃거렸지만, 도현에게는 그녀를 상대할 기운이 없었다….
* * *
점심시간이 되자 도현은 익숙하게 5반으로 향했다. 이제 반 친구들도 도현이 어디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 몇 주 사이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5반 교실 문 앞에 선 도현은 반 안에 정희운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의외의 광경을 보았다.
“응, 맞아. 그래서….”
정희운이 친구들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를 찾아왔던 지난 시간 동안 항상 혼자였는데. 도현은 교실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한설아의 말이 맞았다. 정희운은 다시 정상적인 교우 관계를 회복한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올 필요가 없지 않나?
그 생각에 닿으니, 머뭇거리던 발의 방향이 바뀌었다. 도현은 돌아가려고 했다. 기존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그게 맞았다. 그러나 고개를 든 순간, 정희운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저를 보며 무어라 떠들었다. 정희운은 그들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도현이 있는 후문을 향해서 걸어왔다. 도현은 돌리려던 발걸음을 바로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대본 리딩 날 왜 그런 표정을 했는지 물어보려고 했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차라리 잘된 거였다.
“안녕.”
도현은 정희운을 향해 인사했다.
“응, 안녕.”
“혹시 내가 방해한 거야? 친구들이랑 대화하던데.”
“아, 아니야. 별 얘기 안 했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
뭐지?
도현이 별다른 용건 없이 그를 찾아온 적은 많았다. 그때 정희운은 단 한 번도 이렇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위화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물어보고 싶은 거? 나, 나한테?”
“응. 지금 괜찮아?”
“으응, 무슨 얘긴데?”
“대본 리딩 날.”
“아….”
“그날,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그으게 티 났어?”
정희운이 머쓱하게 웃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혼났잖아. 그래서 풀 죽었던 거야.”
납득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다. 하지만 도현은 왠지 석연찮았다.
도현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시선을 미끄러트린 희운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약간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매만지다가, 어른스럽게 말한다.
“지금은 괜찮아. 신주하 선배님도 도와주시려고 그런 거잖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럼 얘기는 끝난….”
“근데.”
도현이 담담히 말했다.
“왜 나를 또 피하려고 해?”
너무 노골적이라서 몰라주기도 힘들었다. 표정은 나름대로 관리를 하는 것 같은데, 움찔대는 어깨나 오므라드는 손가락, 자꾸만 피하는 시선, 그리고 평소와 다른 태도에서 표가 났다.
사실, 이미 본래 목적은 해결되었으니 정희운이 피하든 피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피하는 편이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에는 더욱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도현은 물어보았다.
갑자기 정이 들었다거나, 기분이 언짢았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을 겪어본 적 있기 때문이었다. 뉴질랜드에서 그를 마주한 맥이 꼭 이랬으니까.
그냥 이건, 정희운 때문이라기보다는 특정 상황에 대한 거부감에 가까웠다. 나는 너를 무시하거나 한심하게 본 적이 없는데, 내가 너를 그리 볼 거라 지레짐작하고, 그렇게 피하고, 결국에는 멀어지려고 하는 상황에.
도현은 사실, 그게 싫었다.
마지막엔 어른스럽게 받아들였으면서도, 실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친구를 잃어야 했을까. 맥과 베니스에서 만나자고 약속했고, 맥이라면 그 약속을 지킬 것을 굳게 믿지만….
그래도 그동안 함께 못 하잖아.
완전한 이별보다는 낫다는 걸 알아도, 맥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함에도,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이런 심정을 내보이면 모두가 불편할 뿐이란 걸 알아서 혼자 누르고,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친구들을 대할 때 도현은 늘 그랬으니까. 조금만 방심하면 너무 성가시게 굴거나, 집착할 거 같아서 도현은 늘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서 딱히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데… 지금 기분이 안 좋은 걸 보면, 한국에 와서 무언가 바뀌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어떠한 부분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던 거다.
“피, 피한 적 없어.”
“내가 불편해?”
당혹스러운 듯 두 눈을 크게 떨던 정희운은, 어느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결심한 낯빛을 하고서도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침묵이 길어질 때 즈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역시 피한 게 맞았구나.
“저, 그런데… 난, 그냥….”
“아니야.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내가 피해도 된다고 했었잖아.”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복도였다. 여기서 길게 대화를 나누는 건 썩 좋은 선택지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도현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궁금한 건 다 물어봤어. 이제 가 볼게. 다음에 봐.”
“뭐? 간다고?”
정희운은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도현은 제대로 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준 후, 인사를 남기고 5반 복도를 떴다. 미련 없이 깔끔한 태도였다.
희운은 복도에 남아서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저번에 교문 앞에서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정말 예측이 불가능한 행동에 희운은 숨을 내뱉었다.
…이따가 말하면 되겠지.
하교할 때 사과하면 될 것이다.
왜 피했는지도. 부끄럽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종례가 끝나고 반 애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도현은 오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말을 튼 친구들이 희운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거절했다.
“그래? 그럼 우리 먼저 간다!”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친구 두 명은, 그날. 창고에서 희운이 눈치를 준다며 떠들었던 애들이었다.
희운은 그들을 웃으며 배웅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희운은 그가 늦는 게 아니라 오지 않는 거란 걸 깨달았다.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갔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오랜만에 혼자 걷는 하굣길은 한적했다. 희운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었다. 멈추지 않고 걷다 보니 금방 집에 도착했다. 띠릭,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희운을 반기는 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이었다. 깜깜해서 불을 켜려다가 말고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막 가방을 내려두는데,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매니저 형에게서 온 문자였다.
[야, 희운아 너 이도현이랑 친하다면서.]
[어떻게 말 좀 해봐, 어? 형이 평소에 너한테 해준 게….]
희운은 핸드폰을 꺼버렸다.
집에 오늘 길목에서는 후회가 차올랐다. 왜 안 왔을까. 나한테 실망한 걸까? 그런 의문부터 시작해서 점심시간에 붙잡고 해명할걸, 왜 가만히 있었을까, 하는 자책도 했다.
그러나,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야.
잠깐 착각한 거다. 역시 도현에게 받았던 감각은, 운명처럼 느껴졌던 무언가는 망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시상식 단상에 올라 환히 웃는 또래의 아이가 너무 멋있어서, 너무 빛나고 반짝거려서, 홀로 텔레비전을 보던 꼬마가 망상을 펼친 거다.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믿는 어린애처럼 말이다.
…결국 다 착각이었지만.
결국엔 그랬다. 어디에도 내가 있을 자리는, 나는,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