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5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2)
“…저, 도현아.”
“응?”
“그, 점심시간인데….”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거리며 말하는 한설아에 도현은 읽고 있던 소설책을 한 장 더 넘겼다. 검은 글씨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안 가.”
손끝에 닿은 종이의 감촉이 매끄러웠다. 가장자리를 매만지던 도현은 감정의 변화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투로 말했다.
“한동안 안 가려고. 네 말대로 반 애들이랑 사이가 좋아진 것 같더라고. 그러면 더 이어갈 필요가 없으니까.”
어제, 도현은 생각 정리를 마쳤다.
정희운을 등지고 복도를 걸으면서 감정이 차차 잦아들었다. 백열등 아래에 선 도현은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간신히 정희운 위로 덧씌운 형을 걷어냈더니, 이제는 맥의 그림자를 드리우려고 하고 있었다.
다시금 발걸음을 떼자 그림자도 그 뒤를 따라붙었다.
‘어차피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야.’
정희운이 대본 리딩 날 있었던 일로 자괴감을 품었든, 자격지심을 가지게 되었든 그 자신이 감당할 일이지, 타인이 왈가왈부해서 바뀌는 부분이 아니다.
그 증거로 정희운보다 가까운 사이였던 맥도 결국엔 도현의 손을 떠나버렸다. 흰 종이 위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걱정되면 네가 한번 가보는 게 어때? 둘이 친하잖아.”
“내, 내가? 설마….”
낯빛이 살짝 붉어진 한설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 투명한 반응에 도현은 그녀가 미숙한 열네 살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그, 그럼 앞으로 애들한테 너랑 나랑 이상한 오해받을 일은 없겠네!”
눈동자가 바삐 흔들리는 데다가 입가에 띤 미소는 어색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 점을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게.”
“아, 물론 너는 좋아하는 애가 있으니까 그런 오해 더는 안 받겠지만.”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지, 표정을 느슨하게 푼 한설아가 말을 이었다.
“어젠 진짜 놀랐어. 네가 좋아하는 애가 있을 줄은 몰라서….”
“나도 있을 수 있지.”
없지만.
“뭔가 상상이 안 돼. 넌 짝사랑 같은 건 안 할 것 같아.”
도현은 묘한 눈으로 한설아를 보았다. 이거, 혹시 연애 상담으로 이어지는 흐름인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한설아가 말을 꺼냈다.
“너는 좋아한 지 얼마나 됐어?”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이었다.
도현은 다시금 전날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설마하니 정희운을 짝사랑하는 친구의 연애 상담을 해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형이 봤다면 웃다가 쓰러져서 눈물을 흘렸을 일이었다.
그러나 한없이 진지한 한설아의 앞에서 다른 기색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도현은 표정 관리에 노력하며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느릿하게 열었다.
“글쎄….”
“반한 시점이 명확하지 않은 거야?”
“그럴지도….”
“조금씩 스며든 거구나…. 그치, 보통은 그렇게 반하지?”
도현은 이렇게 한설아가 정희운한테 한눈에 반했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열넷의 소녀는 생각보다 너무, 너무 투명했다. 도현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한설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런가? 그렇지? 근데 보통, 좋아하면 계속 생각나는 게 정상일까? 너는 어땠어? 아, 이건 내 얘기는 아닌데, 내 친구 중에서도….”
이게 거짓말을 한 죄인가 보다. 도현은 다시금 세상을 바르게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
* * *
그날 저녁 7시.
SBC 측에서는 대본 리딩 현장 영상을 올렸다. 한 영상당 삼 분의 길이로 올라온 세 개의 영상은 곧장 기사로 퍼져나가며 주목을 모았는데, 그중 한 영상이 유독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대본 리딩 레전드 찍은 신주하X이도현 ㅎㄷㄷ]
메이트판에는 해당 제목과 같은 글이 올라와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며 추천 글로 등록되었다. 퇴근하고 지하철에서 메이트판을 기웃거리던 직장인 이 모 씨는 해당 게시글에 흥미를 느끼고 들어갔다가.
- 와… 레전드 갱신
- 소름 돋는다 두 사람 다 연기력이 ㄷㄷ
- 특 : 두 사람 주인공 아님ㅋㅋㅋㅋ
- 이게 어딜 봐서 대본 리딩임
긍정적인 반응이 넘치는 댓글을 보고 호기심을 느꼈다. 나도 봐볼까? 그러한 짧은 고민 끝에 유튜브를 타고 들어갔다.
[Utube]
[(메이킹) 신주하X이도현 역대급 만남! ‘왕의 길’ 대본 리딩 현장]
‘벌써 조회 수가 높네.’
새삼 이도현 파워를 느낀 이 모 씨는 영상을 재생했다. 경쾌한 배경음이 흘러나오며 가장 먼저 등장한 인물은 성진수 감독이었다. 그 뒤로 줄줄이 한 명씩 일어나 인사를 하고 박수를 받았다.
‘언제 시작하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 육 년입니다.
예고도 없이 연기 장면이 시작되었다. 이 모 씨는 반사적으로 이어폰의 볼륨을 키웠다. 강렬한 감정에도 뭉개지지 않은 또렷한 발성이 귀에 박혔다.
- 너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 오지 말아야 했다고요? 그게 전부입니까? 당신은 키운 정도 없으십니까?
대본 리딩이 원래… 이런 건가?
이 모 씨가 알기로는 대본을 쳐다보면서 읽어서 대본 리딩인데, 영상 속의 두 사람은 그런 건 내다 던지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튀기는 전류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거 같았다.
- 내게 쓸모없는 것은 필요 없다.
- 당신께선 좋으시겠습니다. 쓸모로 값어치를 매겨 제 자식까지 버리니까. 모든 것을 값어치로 판단하면 되니 참으로 편한 인생이 아닙니까?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연기는 치열했다. 이 모 씨는 어느새 제대로 된 세트장도, 편집도 없는 연기에 빠져들어 감탄했다.
체감상 몇 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영상이 끊겼다. 이 모 씨는 까맣게 물든 화면을 보며 잠깐 현실을 부정했다.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그는 빠르게 다른 영상을 찾아보았다. 나머지 두 영상도 배우들의 연기력이 돋보였지만, 처음 봤던 영상만큼의 쫄깃함은 없었다. 입맛을 다시며 처음 영상으로 돌아온 이 모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지.
그는 세 번의 반복 재생을 마친 후에 처음 그를 영상으로 이끌었던 게시글로 다시 들어갔다. 게시글에 추천을 누른 후, 수많은 댓글에 합류해 족적을 남겼다.
- 레전드 드라마 탄생 각임
그렇게 <왕의 길>은 새로운 시청자 한 명을 확보했다.
* * *
[<왕의 길> 메이킹 영상 공개… 네티즌 반응 ‘후끈’]
[신주하X이도현 레전드 캐스팅?]
[‘당신께선 좋으시겠습니다.’ 이도현, 대본 리딩서 강렬한 감정 연기 선보여….]
[SBC 드라마 <왕의 길> 크랭크인 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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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길> 촬영 들어간다!]
[믿고 보는 배우 신주하, ‘왕의 길’ 크랭크인!]
[박박 제대로 이 간 SBC, 화려한 라인업의 <왕의 길> 촬영 시작!]
* * *
<왕의 길> 촬영지는 용인에 있는 사극 테마파크였다. 이미 여러 사극 드라마의 배경으로 쓰여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했다. 도현은 지난번 <구미호뎐>을 찍을 때보단 가깝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현 씨!”
오매불망 도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성진수 감독이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도현은 그가 친밀하게 어깨를 두들기는 걸 막지 않았다.
“오는 길은 괜찮았어요?”
“네, 덕분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야 도현 씨 덕분에 두 발 뻗고 잘 잤지. 우리 메이킹 영상 대박 난 거 봤죠?”
기분이 좋아 보인다 싶더니 스타트가 순조로워서 그런 모양이었다. 도현은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후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리고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다.
“저게….”
“아, 도현 씨는 외국에서 살다 왔으니 잘 모르려나? 촬영 전에 고사 지내는 거예요. 무사히 촬영 끝나게 해주세요, 이렇게.”
성진수 감독은 도현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촬영 첫날에 와주기를 부탁했다. 첫날에 있을 고사 때문이었다. 신주하의 연기가 궁금했기 때문에 원래도 갈 생각이었던 도현은 단박에 수긍했다.
고사상은 궁궐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그 뒤에는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주변에 자리한 배우 몇몇은 한복을 입고 있어서 민속 체험을 하러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한복을 입은 배우가 아니었다. 고사상 중심에 당당히 서서 웃고 있는 돼지머리였다.
“저거… 진짜 돼지머리예요?”
“응? 하하, 당연히 진짜죠. 이런 일에 가짜를 쓰면 쓰나. 돼지머리는 처음 봐요?”
“네….”
살면서 돼지머리를 볼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그 처음이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만….
“가서 만져볼래요?”
“아니요.”
대답은 빨랐다. 거의 정색한 얼굴에 성진수 감독이 재밌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저자세인 줄로만 알았더니, 이제는 장난도 칠 정도로 편해진 모양이었다. 도현에게는 이편이 편하긴 했다.
“원래 방송물 먹는 곳은 전통이나 미신을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중요한 날에 고사 지내는 게 생각보다 꽤 오래된 전통이에요. 삼한시대부터 이어져 온 풍습이라서.”
“어, 도현이 왔네?”
성진수 감독의 설명을 들으며 걷다 보니, 도현을 발견한 신주하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화려한 복식을 걸친 채였는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과 옅은 화장 덕에 전에 보았던 것보다 어려 보였다.
아마, 1화가 끝났을 때는 지금의 상태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신주하 선배님.”
“고사 지내려고 왔어?”
“네. 그것도 있고, 사극은 처음이라서 미리 봐두려고요. 여러모로 궁금한 게 많아서요.”
신주하가 가볍게 웃었다.
“그거 좋네. 아, 봐도 모르겠으면 날 찾아와도 돼. 똘똘한 애는 환영이니까.”
기특하다는 표정이 확연했다. 도현이 그녀와 몇 마디 더 나눌 때였다. 스태프 한 명이 큰 소리를 내며 앞을 지나갔다.
“윤조한 매니저님! 차 키 가져오세요! 윤조한 매니저님!”
“저 여기 있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남자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자, 스태프가 손가락으로 고사상 쪽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시죠? 안 헷갈리게 잘 놓으세요.”
“네, 네.”
“다른 매니저분들도 차 키 얼른 가지고 오세요!”
목이 쉬지는 않을까 싶을 만큼 열심히 외쳐대는 목소리에, 도현의 옆에 서 있던 경찬호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나도 갖다 놓고 올게.”
도현은 멀어지는 경찬호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고사를 지내는 것까진 알겠는데, 차 키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 도현의 의문을 읽었는지 신주하가 입을 열었다.
“촬영 때 가장 중요한 게 배우의 안전이거든. 특히 이렇게 이동하는 게 많은 촬영에서는 더. 그러니까 차 키 가져다 놓는 거지. 무사고 안전 기원하는 거야.”
“아하….”
주변을 둘러보니 고사상 주변에 물건을 가져다 놓는 건 매니저뿐만이 아니었다. 카메라 감독이 스태프에게 카메라를 가져오라 지시하는 게 보였다. 카메라는 덩치가 있어서 병풍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대본 리딩 날 보았던 작가는 노트북을 잘 보이는 자리에 놓으면서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고 있었다. 꽉 맞잡은 두 손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각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을 차리는 거구나.’
재밌는 관습이었다.
곧 돼지머리, 시루떡, 과일, 막걸리같이 제사상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음식들과 차 키, 카메라, 노트북, 대본이 한자리에 놓인 고사상이 완성되었다. 도현은 감독의 부름에 그 주변에 가서 섰다.
제작진과 배우가 한 공간에 모두 모였고.
“고사 시작하겠습니다!”
<왕의 길>의 안전과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