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3)
제일 먼저 향을 피우고 절을 한 건 성진수 감독이었다. 그는 절을 마친 후 스태프가 건네준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즐겁게,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촬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왕의 길, 대박 납시다!”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리고, 그다음부터는 여러 사람이 나와서 같은 절차를 반복했다. 배우들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주인공인 덕만 역 배우가 제일 선두에 섰다.
도현을 비롯한 아역들은 성인 배우의 뒤편에 자리했다. 덕만 역할의 배우, 안여진이 향 위에서 술잔을 돌리고 뒤로 물러서자, 사람들은 진행자의 말에 맞추어 동시에 절을 했다. 기독교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두 눈을 감은 상태였다.
도현은 딱히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을 따라서 함께 절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한 번, 죽은 사람한테는 두 번, 신에게는 세 번 절하는 것처럼, 풍요와 행운의 신에게 기원하는 고사에서 절은 세 번이었다.
…아니다, 나도 종교는 있나?
단순히 신적 존재를 믿는 게 종교라면, 도현은 종교인이었다. 도현은 덩어리 님을 믿고, 심지어 그에게 의지까지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역시, 그걸 종교라고 칭하기엔 조금 이상했다. 보통 종교라고 함은, 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한 가지 기억이 뇌리를 퍼뜩 스친 건 그때였다.
- 제가 연기를 시작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요?
- 덩어리 님이 제 곁에 없을 리가 없잖아요.
멈칫한 도현이 속으로 종교의 정의를 천천히 읊었다. 그러니까,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 그런 날이 올까요?
…….
도현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나 사실 꽤 신실한 종교인이었던 걸까?
막 세 번째 절에 접어들었다. 도현은 풍요와 행운의 신에게 비던 것을 바꾸어 덩어리 님을 향해 절했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광활한 우주에서 도현이 아는 것은 몹시 미약할 것이다. 어쩌면 덩어리 님 말고도 초자연적인, 신적 존재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현의 삶에 내려와 준 절대자는 그 존재뿐이었다.
그러므로 도현이 풍요와 행운을 빌 존재를 원한다면, 그 대상 또한 그뿐이었다.
‘물론 덩어리 님은 내 생각을 읽지 못하시지만.’
닿을 수 없는 기도였지만, 원래 기도란 게 그런 거 아닌가. 닿지 못할 것을 앎에도 그저 행위로부터 안식과 행복을 얻는 것. 절을 끝내고 일어난 도현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올라왔다.
“자, 준비하신 분은 올려놓으시고, 준비 안 하신 분은 마음만 올려놓으시면 됩니다.”
제일 먼저 움직인 건 안여진이었다. 그녀는 품에서 흰 봉투를 꺼내어 돼지의 입에 물렸다. 이미 이전에 절을 한 사람들이 올린 현금으로 한가득했던 돼지의 입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도현은 경찬호가 준비해 준 오만 원을 들고 돼지의 입에 꽂았다. 죽은 돼지의 입에 현금을 꽂는 일은 참… 묘한 일이었다. 동그란 눈으로 돼지머리를 경계하는 도현에 주변 이들이 입술을 오므렸다.
‘애네, 애.’
고양이가 처음 보는 물체를 툭 건들고 도망가는 것처럼, 도현은 손끝으로 현금만 끼운 후에 슬그머니 물러났다. 워낙 이도현이라는 배우에게 성숙하다는 인상이 붙어 있었던 터라, 사람들은 의외로움과 흐뭇함이 담긴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성인 배우들은 종종 안여진처럼 흰 봉투에 큰 액수를 넣었지만, 아역배우는 도현처럼 오만 원이나 만 원을 들고 와서 올렸다. 덕만 아역의 배우, 진윤아는 돼지머리가 꺼려지지도 않는지 돈을 꽂는 척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터치하고선 시침을 뗐다.
도현은 갈색 머리의 소년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가 돈을 올리는 걸 무심한 눈으로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배우들의 절이 끝나자, 한 감독이 술잔을 들고 가 바닥에 뿌려댔다.
모든 차례가 끝난 후 마지막 순서는 축원문이었다. 축원문이 낭독되는 동안 제작진과 배우들은 진지한 낯으로 바닥이나 고사상을 응시했다. 그 사이에서 하품하다가 도현과 눈이 마주친 진윤아는 어색하게 미소를 흘렸다.
도현은 본 적 없는 척 시선을 돌렸다. 축원문 낭독이 모두 끝나자 40분간 진행되었던 고사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이후에도 일정을 소화해야 하다 보니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고사상을 정리했다.
도현은 자신의 존재가 방해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스태프들의 동선에 방해되지 않도록 뒤로 물러났다.
도현의 예정된 촬영 일자는 며칠 뒤였다. 오늘은 고사에 참여 겸, 신주하의 연기를 직접 보기 위해서 왔지만, 내일 정도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구미호뎐>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때도 미리 내려가 있었지만, 학기가 시작하기 전이었다. 아무리 연예계 활동으로 인한 결석은 결석 처리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걸 마음대로 이용하면서 수업을 빠질 수는 없었다.
‘사실 이미 한 번 그랬지만….’
일부러 스케줄을 잔뜩 잡아서 학교에 빠진 적 있던 도현은 양심이 안부를 묻는 것을 무시했다. 앞으로 안 그러면 되는 일 아닌가. 아무튼, 용인은 서울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으니 돌아가는 게 맞았다.
적당히 구석진 자리에 들어가 있자니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졌다. 지나가는 스태프들이기도 했고, 처음 보는 배우들이기도 했다. 도현은 시선을 의식하는 대신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라마의 첫 장면은 진흥왕의 서거 장면이지만, 아직 낮 시간대였고, 해당 장면은 늦은 시간에 촬영해야 했다.
그리하여 첫 촬영 장소는 왕의 침전이 아니라 미실이 있는 후궁전이 되었다. 드라마를 위해 제작한 세트장 내부에 카메라가 들어찼다. 미실 역할의 배우, 신주하는 눈가와 입술 색을 죽여 파리하게 보였다. 누가 보아도 슬픔에 잠긴 여인이었다.
그리고.
“촬영 시작합니다!”
드디어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스태프의 사인과 함께 처소의 문이 열렸다. 탁자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미실이 고개를 들었다가, 들어온 이가 금륜 왕자라는 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금륜 왕자가 손을 내저었다.
“일어날 필요 없습니다. 그대가 또 식사를 걸렀다기에 걱정이 되어 온 것이니.”
“…송구하옵니다.”
“그리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탁자를 가운데에 둔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미실은 찻잔을 가져와 왕자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그것을 한 모금 마시던 금륜이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드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괜찮다니요. 얼굴이 이토록 야위었는데.”
금륜 왕자가 불쑥 손을 내밀어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대자 미실이 흠칫하며 놀랐다. 전하, 놀라 내뱉은 말에도 왕자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몸을 더욱 바투 붙였다.
“그대가 이리도 슬퍼하니 제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왜, 왕자님께서….”
금륜 왕자 역할을 맡은 배우는 무게감 있는 인상의 잘생긴 중년 배우였다. 그가 열렬한 눈으로 미실을 바라보았다. 미실은 홀린 듯 그 눈을 마주했다.
“글쎄요.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궁주, 당신께서는 짐작이 가십니까?”
금륜 왕자는 금방 모른 체하며 떨어졌다. 뺨에 닿은 손등이 떨어지는 순간, 미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명백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도현은 자연히 깨달았다.
저 순간, 미실이 모든 것을 바꿀 덫에 발을 디뎠음을.
‘강렬한 연기가 아니어도 잘하는구나.’
신주하의 감정 연기는 도현의 뇌리에 강렬히 남았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의 격류뿐만 아니라 섬세한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연기해냈다.
…하루만 더 있을까.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한편, 간이로 쳐 놓은 천막 아래 한 소년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앞쪽에서 촬영을 구경하는 도현, 그리고 진윤아를 보던 희운은 한숨을 삼켰다.
‘오지 말 걸 그랬나.’
사실 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촬영 날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조심스레 말을 꺼내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매정했다.
- 야, 희운아. 아역배우가 고사에 빠지는 게 말이 되냐? 이도현 정도 되면 바빠서 그렇구나, 이해하지. 너는 무슨 배짱으로 거길 빠져? 못해도 본전이라고, 가서 눈도장이라도 찍고 예쁘게 보일 생각을 해야지.
…틀린 말은 아니지. 희운은 체념한 눈빛을 했다. 자신 말고도 촬영일이 아닌데도 용인까지 온 배우들이 몇몇 보였다. 다들 배역이 간절해서, 감독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
쿡, 옆구리를 찌르는 감각에 희운이 고개를 들자, 눈짓을 보내는 매니저가 있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더니 희운에게 작게 속삭였다.
“가서 이도현한테 말 걸고 좀 그래. 친한 사이면서 왜 이렇게 따로 있어.”
“형, 저 친하다고 한 적 없는데….”
소심하게 반항해 보았지만, 매니저의 철벽은 단단했다.
“같이 독서토론 대회까지 나갔으면 친한 거지. 친구 사이란 게, 어? 네 생각처럼 엄청 어려운 게 아니야. 그리고 안 친하면 이참에 친해질 생각을 해야지. 희운아, 너 자꾸 이럴래? 형 요즘 실망스럽다?”
“…죄송해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잖아. 형 말 믿어서 언제 틀린 적 있어?”
희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언제나 희운에게 버거운 것을 요구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희운의 커리어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희운은 매니저의 말에 반항할 수 없었다.
희운은 쭈뼛대며 앞으로 향했다.
마침 다음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쉬는 시간이었으니, 말을 걸기도 괜찮은 타이밍이었다. 무슨 말을 하지. 희운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아까, 인사 제대로 못 했지?
그 생각이 떠오르자 희운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인사 정도야, 평범한 동료끼리도 많이 하는 거니까.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다가가자 기척을 느꼈는지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새카맸는데, 희운은 그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서 눈을 내리깔았다.
“저, 안녕.”
“…….”
학교에서 그렇게 멀어진 이후로 첫 접점이었다. 갑자기 다가와 인사하는 희운이 이상해 보였는지 도현은 침묵한 채로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희운은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 오랜만인 것 같아서….”
“그러네.”
“하하…, 그렇지?”
또다시 대화가 끊겼다. 머리가 하얘진 희운이 머릿속으로 열심히 문장을 찾아내고 있는데, 조용히 있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 걸 필요 없어.”
“뭐?”
“불편하게 이럴 필요 없다고.”
그 말은 매우 모호하게 들렸다.
희운이 어색해하니 배려해주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본인이 불편하니 말을 걸지 말라는 것 같기도 했다. 희운은 그 둘 사이에서 정답을 찾지 못하고 눈동자를 떨었다.
“저기, 감독님이 쉬라고 만들어둔 자리야. 힘들면 저쪽 가서 쉬어.”
쫓아내는 건가?
“으응, 고마워.”
희운은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뻣뻣하게 도현이 가르쳐 주었던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희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편하네.
도현이 말한 자리는 차의 대각선 뒤쪽에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묘하게 피해 갔다. 희운이 이곳에서 쉬고 있어도 눈길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야말로 쉬기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설마….’
희운의 눈이 촬영장을 응시하고 있는 도현에게로 닿았다. 얼굴에는 혼란이 떠오른 채였다.
도현과 친하게 지냈던 몇 주의 시간은 백일몽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백일몽이라기엔 너무 짧지만, 이유도 없이 찾아와서 이유도 없이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그러나 이 순간, 희운의 생각이 흔들렸다.
착각이라 여기고 싶은데 떠오르는 기억이 너무 많았다. 백일몽 같았던 시간 동안, 도현은 희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올 때마다 혼자 있는 게 이상해 보일 법한데도 그랬다.
그러나 희운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도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반 애들 몇몇이 희운과 도현의 대화에 끼어들려고 할 때 부드러이 거절한 거였다. 희운이 불편해하고 있으니까.
도현의 배려는 그런 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색도 내지 않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었다. 사실, 희운은 도현이 갑자기 다가온 것 자체가 자신의 상황을 안 도현의 배려였을 거란 짐작까지 마친 상태였다.
동정에서 베푼 호의에 매달리는 건 좋지 않다. 동정과 연민은 의무가 아니니까. 그래서 희운은 생각보다 빨리 체념했고, 그 시간을 백일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 희운은 혼란스러워졌다.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어?
그리고.
보조 출연자들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서 있던 젊은 남성이 작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와씨, 이도현 인성 실환가.”
그들 말고도 이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