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07화 (408/582)

제407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4)

“화장실 아직 안 비었어요?”

남자, 이재준의 질문에 중년의 남성 한 명이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준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바닥에 대충 펼친 이불이 그의 침대였다.

‘완전 돼지우리네.’

사람들이 더러운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인원을 작은 방 안에 들여놓으니 자리가 없었다. 잘 공간을 간신히 확보하는 게 전부였다. 사람은 많은데 화장실은 한 개뿐이라서 순번을 걸어놓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재준은 욕설을 삼켰다.

‘이럴 거면 오지 말걸.’

아는 형이 드라마 보조 출연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봐서 덥석 문 게 잘못이었다. 마침 돈이 필요하기도 했고,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게 멋있게 느껴져서였다. 이러다가 감독의 눈에 띄어서 배우로 데뷔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달랐다. 사람을 무슨 새벽에 용인까지 데리고 오더니, 한참을 서서 대기하게 했다. 촬영하는 시간보다 땡볕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몇 배는 더 길었다.

게다가 주연급 배우들은 한 사람한테 스타일리스트가 두셋 붙어서 아주 지극정성으로 굴면서, 이재준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는 커다란 상자를 대충 던져 주고선 알아서 입으라는 말이 전부였다.

개같았다. 보조 출연자는 사람도 아닌가.

그뿐이면 차라리 나았지. 이재준 그는 이곳에 아르바이트하러 온 것이지, 전문 보조 출연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보조 출연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무언갈 물어볼 때마다 귀찮아하며 성의 없이 답했다. 이재준의 눈에는 그게 텃세로 보였다.

‘시발, 겨우 엑스트라 주제에.’

주연도 아니고, 엑스트라 역할이나 전전하는 인생 주제에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상했다. 이재준은 속으로 욕설을 한바탕 쏟아내고 난 후, 구석에 처박혀 핸드폰을 켰다.

“잠이나 자. 나중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자니까.”

“네, 네.”

남자의 말을 흘려 넘긴 이재준이 핸드폰 화면에 얼굴을 박았다. 액정에 끝이 비죽 올라간 입매가 희미하게 비쳤다. 좆같은 일투성이긴 한데, 재밌는 일이 아예 없진 않았다.

‘이도현 실체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여기서 그 이도현의 비밀을 알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이재준의 입가가 씰룩였다.

‘형 말이 진짜였네.’

그에게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준 형은 연예계 쪽에 종사하다 보니 이런저런 소문들을 알려 주었다. 어떤 남돌이랑 여돌이 사귀는지부터 시작해서, 비관계자는 알 수 없는 온갖 이야기들을.

- 야, 연예인 그거 믿지 마. 다 이미지 관리야. 연예계가 얼마나 더러운데. 정아윤? 걔가 무슨 청순이야. 얼마나 발랑 까졌는데.

형이 해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흥미로운 것뿐이었다. 그러나 재밌는 건 재밌는 거고, 신뢰는 다른 문제였다. 믿을 건 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나니, 그게 다 진짜였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이도현도 그러는데 다른 연예인이라고 다르겠어.’

이재준은 어느새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인터넷 검색에 몰두했다. 그리고 검색 끝에 이도현한테 무시당하던 아역 배우의 이름을 발견했다.

[이도현X정희운 같은 학교 친구, 이제는 연적?]

[제2의 이도현, 정희운! 같은 작품 들어간다!]

[이도현X진윤아X배한영X정희운, 기대되는 아역배우들의 케미!]

“같은 학교라고?”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소리 낸 이재준이 기사를 클릭했다. 이재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같은 중학교 출신에 친구… 허어.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게 이미지 메이킹이구나….”

또래 애들이랑 잘 지내는 것처럼 위장하는 게 분명했다. 실상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저걸 덥석 믿고 말 것이다.

‘나는 아니지만.’

그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들에게 다가온 스태프는 대기하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쉴 자리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대우 한번 거지같네. 속으로 중얼거린 이재준은 한동안 핸드폰을 가지고 놀다가, 그것도 질려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난히 시선이 많이 쏠리는 곳을 보니 이도현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이재준과 달리 이도현은 그늘막 아래 서 있었다. 그림자가 진 얼굴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것과 조금 달라서 낯설었다.

그때 한 스태프가 다가와서 무어라 말하며 물을 건넸다. 그리고선 의자가 있는 쪽을 가리키기도 했다.

차별 대우, 시발.

이쪽은 쉴 자리가 없어서 바닥에 쪼그려 있는데, 저쪽은 물도 직접 가져다주고 아주 난리였다. 그 이도현이니까 저렇게 신경 쓰는 게 당연하겠지만….

‘나도 저 얼굴로 태어났으면 저 정도는 했을걸.’

부모, 외모, 집안 다 타고나서 꿀 빠는 운 좋은 놈.

아마 태어나자마자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누렸겠지.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고, 노력으로 얻은 것도 없이 누리고 살 것이다. 쯧, 이재준이 혀를 찼다.

한번 못마땅한 감정이 들자 생각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솔직히 이도현이 상향 평가된 건 팩트 아닌가. 대단한 건 인정하는데,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너무 무지성으로 이도현을 빨고 있었다.

하여튼 외모지상주의 국가다웠다.

속으로 세태를 비판하며 이재준은 은근슬쩍 그늘막 쪽으로 걸어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까이서 한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사이 스태프가 사라지고 그 대신 처음 보는 웬 급식이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아, 가려지잖아. 눈가를 찡그리며 몇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자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오, 오 뭐? 오렌지? 띄엄띄엄 들리는 소리는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 …말 걸 필요 없어.

이게 뭔 대화지?

이재준이 조금 더 소리에 집중할 때였다.

- 조명! 조명 옆으로 옮겨!

한 스태프가 크게 소리치며 뒷말이 뭉개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앞부분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 불편하게….

말투와 표정,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도현과 대화하고 있는 애의 질린 낯을 종합한 이재준은 빠르게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냈다.

미친, 지금 꼽 준 거야?

지금 보니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급식은 딱 봐도 희게 질려 있었고, 반대로 이도현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재준의 눈에는 그게 상대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쳤다.

‘싸우는 건가? 아니면….’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이도현과 대화 중이던 소년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도현은 눈매를 좁힌 후, 축객령을 내렸다.

- 저기, 감독님이 쉬라고 만들어둔 자리야. 힘들면 저쪽 가서 쉬어.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재준은 이도현이 짜증을 내는 거라고 판단했다.

이름 모를 급식은 반박 한번 하지 못하고 축 처져서 돌아갔다. 그 와중에 이도현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 애가 간 곳은 시야에도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다.

점점 확신에 확신을 더한 이재준은 감탄 섞인 문장을 내뱉었다.

“…와씨, 이도현 인성 실환가.”

“인성 좋기는 무슨…. 개싸가지인데.”

좁고 텁텁한 숙소에 쭈그려 앉은 이재준이 혀를 차자, 핀잔이 날아들었다.

“아까부터 뭘 자꾸 구시렁거려. 잠이나 자. 내일 힘들다고 하지 말고!”

“아. 예에.”

저 새낀 또 지랄이야. 성의 없이 이불을 끌어당기던 이재준은 머리가 땅바닥에 닿자마자 도로 일어났다. 배가 살살 아팠다. …맞다. 화장실 가려고 했지.

화장실 문은 열려 있었다. 어느새 사용자가 나왔음을 깨달은 이재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여전히 핸드폰이 들린 채였다.

변기에 앉은 이재준은 자연스레 핸드폰을 들었다. 습관적으로 다리를 덜덜 떨며 평소 자주 가던 사이트에 접속했다.

- 야붕아 잠이나 자라 ㅋㅋㅋㅋ

눈에 띄는 게시글에 들어가서 댓글을 달던 이재준은 재밌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따끈따끈한 새 글이 올라왔다.

뿌듯한 마음으로 물을 내린 이재준은 댓글을 확인했다. 오, 뭐야. 댓글 개 빨리 달리네. 그의 눈동자가 댓글을 훑어 내려갔다.

[ㅇㄷㅎ 인성 좆창남ㅋ]

나붕이 특정될까 봐 말은 못 하지만, ㅇㄷㅎ이랑 같이 일하거든. 근데 ㄹㅇ 싸가지 없음 ㅋㅋㅋ 사람 좆나 무시하던데?

- 인증이 없으면 뭐다?

- 애미 없나 봄ㅋ

- 주작잼

- 눈이 ㅈㄴ 싸하긴 함

- 야붕아 부러우면 부럽다고 울지 말고 얘기해봐

- 내일 할 거 없는 개백수라 이 시간까지 어린애 돌려까는 야붕이면 개추 ㅋㅋ

그 후로도 주작이라는 말과 동조하는 말이 번갈아 올라왔다. 생각 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마이너 갤러리에 인증 없이 올라온 글이니까 당연하겠지만.

“병신들, 진짜인데.”

사실을 말해줘도 못 받아먹는 새끼들이었다. 이도현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도현이 정희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꼽을 준 것도 같았다. 그래, 그랬었다.

“생각할수록 가관이네.”

같은 학교 애한테 그렇게 갑질할 정도면, 평소에 어떨지 안 봐도 훤했다. 이재준의 눈이 다시금 댓글로 향했다.

…그런데, 이대로 두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지직, 한쪽 전구가 나간 화장실 전등이 깜빡거렸다. 아, 뭐야. 왜 이래. 그가 짜증스레 핸드폰의 손전등을 켰다. 번쩍 빛나는 불빛과 함께 거울에 한 남자가 비쳤다.

한껏 찌푸린 얼굴 위로, 열등감과 기이한 욕망이 섞인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지만, 곧장 뒤를 돌아 문고리를 잡은 남자는 보지 못했다.

끼릭, 탁. 화장실 문이 닫혔다.

* * *

첫 촬영 날 저녁, 왕의 승하 장면까지 촬영하는 걸 모두 지켜본 도현은 결국 하루 더 남기로 했다. 경찬호는 묘한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다가 학교에 연락해 두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튿날, 도현은 하루만 더 있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다음 날 도착할 자신의 아역배우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아역배우의 연기가 말이다.

“…그냥 학교 가기 싫은 건 아니지?”

“설마요.”

저번엔 그랬지만, 이번에는 아니었기에 당당한 도현이 태연하게 답했다. 경찬호는 할 말 많은 얼굴을 하다가 다시금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촬영장에 또다시 출근한 도현은.

“안녕하세요!”

보고 싶었던 이를 만났다.

꾸벅, 배꼽 인사를 한 아이가 허리를 쫙 폈다. 희고 말랑한 낯이 눈에 들어오자, 도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비담 아역 배우, 민은우입니다!”

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렸다. 민은우는 도현의 어릴 적처럼-지금도 어리지만- 요정같이 하얀 낯빛을 가진 귀여운 꼬마였다.

“안녕, 난 이도현이야. 나도 비담 아역 배우.”

“네! 저 알고 있어요!”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웃으면서 가방에서 무언갈 꺼냈다.

패스파인더 소설이었다.

“혹시 싸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애가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

“당연히 해드려야죠.”

도현이 사인을 해서 돌려주자 아이의 낯이 확 꽃피었다. 말랑말랑해 보이는 볼을 보자니 은혜가 생각나서 절로 입매가 느슨해졌다.

“은우는 몇 살이야?”

“여덟 살이요! 초등학교 입학했어요!”

심지어 은혜보다 네 살이나 어리네.

도현이 너머의 세계에 익숙해지면서 새로 알게 된 게 있었는데, 어릴수록 영혼의 빛깔이 유독 깨끗하고 고왔다. 사람보다는 들풀이나, 물길에 머무는 기운처럼.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볼 때면 도현의 심장은 부드러워졌다.

“저 혹시….”

조심스러운 부름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민은우의 보호자가 불안과 기대가 섞인 낯으로 말했다.

“우리 은우 연기 한 번만 봐주실 수 있어요? 그냥, 같은 배역이니까 혹시나 해서요. 물론 불편하시다면 거절하셔도 괜찮고요!”

그녀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은우 나이대의 아이에게 연기를 시키는 이들의 생각은 다 비슷비슷했다. 우리 애도 이도현처럼 되어야 할 텐데.

연기 학원에 온 엄마들을 보면 이도현을 보고 아이한테 연기를 시켰다는 사람이 반절이었다. 그녀도 거기에 속했다.

이번 기회는 놓칠 수 없이 귀했다. 큰 걸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누군갈 가르치기엔 너무 어렸다. 게다가 잘하는 것과 잘 알려주는 건 다른 문제고.

‘그래도 이도현이랑 잠깐 안면이라도 터놓는 건 여러모로 이득이니까.’

성정이 예민해 보이면 부탁하지 않으려 했는데, 직접 본 도현은 퍽 온유하고 친절했다. 그녀는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흰 낯 위로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늘이 드리워졌다. 뭔 남자애가 저렇게 예쁘담. 그녀가 순간적으로 넋을 놓았을 때였다.

“은우야, 형한테 연기 보여줄 수 있어?”

“할 수 있어요!”

아이에게 다정히 물은 소년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여성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오므렸다. 기다란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은우가 좋다네요. 그럼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장소가 마땅치 않으니까… 잠깐 저쪽으로 갈까요? 저기는 조용할 것 같은데. 은우야, 괜찮아?”

“네!”

여성은 은우와 손을 잡고 걷는 소년의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짐승의 꼬리털처럼 살랑거렸다. …무슨, 여우한테 홀린 것 같네.

그녀는 얼른 고개를 휘저은 후 그 뒤를 따라갔다. 머릿속으로 역시 톱스타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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