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9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6)
아니, 그럴 리가.
도현의 눈에 주변 풍경이 들어왔다. 촬영용 차량과 각종 장비, 조명, 스태프와 배우들. 그를 제외하고는 허한 공간이었다. 여기에 기자가 왜 와.
검은 눈이 남자의 옷을 스쳤다.
…그것도 화랑 옷을 입은 기자가.
미국에 있을 때도 분장까지 해서 취재하려는 기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 정도 정성이면 어디 사이비 교단에 잠입해서 비밀 취재를 하지, 여기에서 14살 난 소년을 붙잡고 있겠는가. 그것도 이렇게 허술한 방식으로.
“좋은 친구예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 별개로 찝찝함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도현이 에둘러 대답하자, 남자의 낯에 초조함이 스쳐 지나갔다. 도현의 입꼬리가 조금 하강했다. 왜. 원하는 대답이 아닌가?
가라앉은 검은 눈이 상대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어색한 미소가 떠오른 입술, 부산스레 움직이는 손, 짝다리를 짚은 발.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흘리는 어리숙함.
‘아무리 봐도 기자는 아닌데.’
도현이 지금껏 만나온 기자들은 상대의 반응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에 능숙한 이들이었다. 이렇게 제 감정을 남한테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도현의 고개가 살짝 기울자, 결 좋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살짝 흐트러졌다. 그 사이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깊은 고심에 빠져 있었다.
그럼 뭘까.
“그, 그래? 좋겠네. 친한 친구랑 같이 촬영하니까…. 아니, 불편한 부분도 있으려나?”
“글쎄요. 아직 제 촬영은 시작하지 않아서요.”
“아, 하하… 맞다. 그랬지.”
멋쩍은 웃음 위로 살짝 붉어진 귓가가 보였다.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검은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기를 반복했다.
‘과민 반응이었나?’
최근에 유독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 탓에 과하게 넘겨짚은 건지도 모른단 생각에 미간이 조금 펴졌다. 아직 확신한 건 아니라서, 이래저래 고민하던 도현은 말문을 뗐다.
“그런데.”
“어?”
“그게 왜 궁금하세요?”
우회 없이 던진 돌직구에 남자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내가 그 친구랑 저번에 같이 영화를 찍은 적이 있어서…. 괜히 반가워서 한번 물어봤어. 그 친구가 나를 기억할지는 모르겠네.”
겸연쩍은 투로 말한 남자에 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영화요?”
“응, 많이 유명하지는 않지만 악령이라고….”
“…악령?”
도현은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본 적 없는 얼굴인데…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학교 친구? 맞아요?”
“…어?”
남자의 눈이 커졌다.
“어어? 그걸 어떻게?”
작중 정희운의 형이 대학교에 갔을 때, 동기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다. 스쳐 지나가듯 넘어간 장면이라서 금방 떠오르지 않았는데, 한번 떠오르고 나니 선명하게 기억났다.
웃을 때 아래로 처지는 눈매와 살짝 위로 올라오는 광대, 긴 입매.
그 배우가 틀림없었다.
“체크무늬 셔츠 입고 있었죠?”
“어, 회색 체크면 나 맞아….”
얼떨떨한 대답에 도현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눈꼬리를 살짝 늘어트린 도현이 찡그리듯 웃었다.
“늦게 알아봐서 죄송해요. 이제 기억나네요.”
못 알아본 것도 그런데, 심지어 상대를 기자로 오해까지 했다. 귓가가 조금 화끈거렸다. 완전히 헛다리 짚었잖아.
“아, 아니. 나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놀라운데…?”
그 오해를 까맣게 모를 남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가 꾸밈없이 놀라워할수록 도현의 미소는 흐릿해졌다. …반성하자.
“아니, 어떻게 알았어?”
“영화를 봤거든요.”
“그래도 나는 단역이었는데….”
“여러 번 봐서, 장면 대부분을 기억해요. 그리고 충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연기였어요. 이렇게 만나서 기쁘네요.”
“…와, 나 이도현한테 인정받은 거야?”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는지 그가 입을 가리고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민망한 건 도현이었다. 도현은 깊은 한숨을 삼켜냈다.
“진짜 죄송해요.”
“뭐? 뭔 소리야. 알아본 게 신기한 거지!”
그게 그게 아니라서…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한 도현이 방긋 웃었다. 도현의 속내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남자가 들뜬 기색으로 주절댔다.
“와, 나 주변 사람들한테 자랑해야겠다. 이도현이 알아봤다고. 아,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어줄 수 있어? 자랑하려는데, 안 믿어줄 것 같아서.”
“물론이죠.”
오히려 해줄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반색한 도현이 적극적으로 굴자, 남자는 또다시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그것을 알고도 그저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그래, 모르는 게 약이었다.
두 사람은 친밀하게 사진 한 장을 찍다가, 호기심을 보이는 은우도 가운데 끼워서 한 장 더 찍었다. 남자는 연신 고맙다며 인사했고, 그 인사를 불편해하던 도현은 주제를 돌렸다.
“혹시 희운이한테 안부 전해 드릴까요?”
“아, 아냐.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냥 그때 촬영장에서 그 친구가 나한테 핫 팩 가져다줬거든. 혼자 반가워서 얘기해본 거야. 괜찮아.”
“그래도….”
“진짜 괜찮아. 아무튼, 그 친구 그때도 되게 착하고 성실했거든. 나 같은 단역도 많이 챙겨주고, 스태프들 도와준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까 좋네. 지금도 열심히 하지?”
도현이 짧게 긍정했다.
“네. 지금도 그래요.”
“그럴 것 같았어. 여하간 내가 그 친구 덕분에 너랑 얘기도 해보고…. 아, 내가 너무 잡아뒀지. 미안해. 말하다 보니까 길어졌네.”
“아니에요. 대화 즐거웠어요.”
재빨리 부정하자 남자가 하하 웃었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그래도 이제 놓아 줘야지. 저 친구 촬영해야 하는 거 맞지?”
“네. 은우야, 감사하다고 인사드렸어?”
“아니영. 감사합니다!”
어디서 배운 건지, 배꼽 인사를 하는 은우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던 도현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 나는 김민혁.”
“민혁 형.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김민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눈치였다. 그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어… 다, 당연히!”
“그럼 민혁 형, 다음에 보면 인사해도 돼요?”
“그, 지, 진짜?”
“네, 인사할게요. 제가 발견 못 하면 먼저 말 걸어주세요.”
입을 뻐끔거리던 김민혁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약간의 당혹과 조급함까지 느껴지는 태도였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도현은 은우의 손을 잡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 * *
“아까 얘기 길게 하던데, 뭐였어?”
보조 출연자들이 모인 자리로 가자, 몇몇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김민혁은 조금 상기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이도현이 저를 알더라고요.”
“너를? 어떻게?”
“그러니까요. 자기 말로는 영화를 여러 번 봐서 기억한대요.”
“무슨 영화였는데?”
“악령이요. 저 거기에 16초 정도 등장했었거든요. 와, 제 역할이랑 입은 옷까지 알던데요?”
“진짜야?”
“이야 김민혁이, 출세했네?”
정겹게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김민혁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민망히 웃었다. 그는 이도현이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에 여전히 감동하는 중이었다.
“그 얘기 나눈 거야?”
“아뇨, 그것도 있고… 다음에 보면 인사하겠대요.”
“에이, 립서비스겠지. 립서비스. 할리우드 배우가 어디 한가한가?”
한 중년 배우가 한 말에는 어느 정도 자조가 묻어 있었다. 그는 보조 출연자로 생활하면서 온갖 일을 다 겪어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금 잘나간다 싶은 배우들이 친절하게 굴더라도, 딱 그뿐인 걸 알고 있기도 했다.
“진짜예요. 저한테 형이라고 불렀다니까요?”
“형?”
“남자애가 곱게 생겨서 깍쟁이인 줄 알았더니만.”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되게 착하더라고요. 막 ‘민혁 형, 다음에 보면 인사해요’ 이렇게….”
흥분한 채로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김민혁에 하나둘씩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다들 아닌 척해도 이도현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탓이었다. 이 촬영장에서, 아니 현재 한국에서 가장 화제성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모두가 호기심과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건 아니었다. 김민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입매를 삐죽거리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랄하네….”
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홀로 꿍얼거린 이재준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열변을 토하는 김민혁을 보았다가, 곧 비웃음을 띠었다.
말 좀 나눴다고 흥분하는 꼴 좀 보라지. 물건 주워줘서 대화 나눈 게 뭐 대수라고 영웅담처럼 늘어놓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재준의 눈에 한심함이 깃들었다.
‘저게 다 연기인 줄도 모르고.’
저렇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니까, 이도현이 인성이 좋다는 둥, 착하다는 둥 그런 얘기가 나도는 게 아닌가. 멍청해도 너무 멍청했다.
“에이,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에요?”
이재준이 툭 끼어들자, 신이 나 말하던 김민혁이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거짓말했다고?”
김민혁은 본래 이재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들거리는 태도나, 툭 하면 어딘가로 사라져서 골치 아프게 하는 행동도 문제였고, 항상 뭐가 불만인지 입으로 불만을 중얼거려서 가까이하기에 꺼림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빛이 거슬렸다. 사람을 낮잡아 보는 것 같은 표정. 지금도 그랬다. 이재준의 말투와 눈빛에서 묻어나는 빈정거림에 김민혁이 언짢은 눈을 했다.
“네? 제가 언제 거짓말이라고 했어요. 그냥 너무 과장한 거 아니냐는 거죠. 아직 뭐, 인사를 한 것도 아닌데.”
“아이고, 그렇게 초를 칠 필요가 있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면 되지. 어?”
“네?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제가 언제 초를 쳤어요.”
이재준이 무의식적으로 손에 난 거스러미를 뜯었다. 탁, 탁. 손톱과 살이 마찰하면서 나는 작은 소리가 신경을 갉작였다. 아씨, 왜 안 뜯겨.
“그게 그 소리… 후. 아니, 됐다.”
뭐라 한 소리 하려던 김민혁은 마음을 바꿔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이재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손을 두어 번 휘적였다.
“알아서 생각해. 나는 있었던 일 그대로 말한 거니까.”
찌익, 아까까지 뜯어내던 거스러미가 뜯어져 나갔다. 손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이재준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 엑스트라 병신이.
지 생각해서 말해준 것도 모르고 감히. 순식간에 치솟아 오른 분기에 혈관이 자글자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재준은 김민혁을 노려보다가, 들으라는 듯이 욕설을 지껄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시선을 흘긋 준 후, 고개를 몇 번 저을 뿐이었다. 김민혁은 아는 척조차 안 했다. 이재준의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모멸감이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이게 다 이도현 때문이다.
나만 그 실체를 아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사람을 좆밥 취급하는 것 아닌가. 그래, 그거였다. 나만 아니까. 원래 비정상만 모인 세계에서는 정상이 비정상이 되는 법이잖아. 씨발, 그런데 내가 왜 비정상이어야 해?
이건 불합리하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재준은 며칠간 질질 끌었던 고민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확고한 결심이 들어찬 상태였다. 이재준의 시선이 손에 들린 핸드폰으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기묘하게 반짝였다.
…세상에는 정의 구현이 필요한 법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