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10화 (411/582)

제410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7)

“안녕하세요! 민은우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평소라면 ‘열심히는 당연한 거고, 잘해야지’라며 일갈했을 신주하가 까만 머리통을 보며 침묵했다. 동글동글한 낯의 은우가 히 하고 웃자, 볼우물이 푹 패었다.

“…그래.”

“크흡.”

그 장면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이 웃음을 참아냈다. 신주하 배우님, 임자 만났네. 카메라 감독의 중얼거림을 들은 도현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촬영 시작 안 해요?”

이상야릇한 분위기에 신주하가 눈매를 뾰족하게 세웠다. 그녀의 재촉에 멈춰 있던 촬영이 빠르게 재개되었다.

“너도 준비….”

시선을 내린 신주하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생기 넘치는 눈빛이 이곳저곳을 향했다. 애가 단 듯이 몸통이 앞뒤로 미약하게 흔들렸다.

얘 좀 봐라?

연기를 좋아하는 것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홀로 즐기는 것과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게 같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경직된 곳이 없었다. 눈이 마주쳐도 환하게 웃는 게 전부였다.

‘…보면 알겠지.’

즐길 줄 아는 것과 겁낼 줄 모르는 것도 다른 문제이니. 그런 생각을 하며 은우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마마마!”

은우의 첫 연기가 시작하자마자 카메라 감독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조금은 쓸쓸한, 조용한 낯으로 방에 앉아 있던 은우의 얼굴이 봄을 맞이한 꽃처럼 환히 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깜짝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다.

“어마마마, 그, 그러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장난이시지요? 네? 어마마마!”

신주하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동요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카메라 감독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애드리브.

지금 저 조그만 애가 애드리브를 하고 있었다. 감독은 컷을 외쳐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가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신주하의 대응이 더욱 빨랐다.

“놓거라.”

소맷자락을 붙잡은 은우를 비정하게 쳐다보자,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신주하의 시선이 잠깐 텅 빈 손을 응시한 것도 같았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소년을 등졌다.

타악.

신주하가 나간 방문이 닫혔다. 은우의 세계가 단절되는 소리였다.

“컷!”

곧장 컷 소리가 울렸다. 촬영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은우에게 집중된 채였다. 촬영장에 내려앉은 정적에 은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 내가 왜 그랬지?

조용해지고 나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났다. 은우는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다가 본능적으로 도현을 찾았다. 울망울망한 시선이 도현에게 닿아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애처로운 눈빛이 쏘아졌지만, 도현은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무슨 걱정 중인지는 알겠다마는… 글쎄. 도현이 보기에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오케이!”

잘했으니까.

첫 촬영 만에 오케이를 받아낸 소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곧이어 소년은 환하게 웃더니, 도현에게로 달려왔다. 뛰지 말라니까 또 뛰지. 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은우를 받아주었다.

“형! 형! 저 잘했어요?”

“잘했어.”

“우와.”

순수한 감탄사에 도현이 피식 웃을 때였다. 신주하가 그들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

“그냥….”

“형이 연기 알려줬어요!”

얼버무리려던 도현의 시도는 은우로 인해서 불발되었다. 신주하의 눈에 흥미로움이 차올랐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은우에서 도현에게로 옮겨갔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네가 잘한 거야, 은우야.”

“아닌데. 저 그냥 형이랑 할 때처럼 했어요!”

따갑다. 닿아오는 시선들이 따갑다. 도현은 저 ‘오오’ 하는 듯한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은우가 기본기가 없었으면 통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기에, 잠깐의 환기만으로 연기가 한층 좋아진 거였다. …그러니 내가 요술이라도 부린 듯한 눈빛들 좀 거둬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정말 잘했어.”

은우가 대견하기는 해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꼭 오래전 형이 제 머리를 헝클어트린 것처럼. 엉망이 된 머리를 한 소년이 해맑게 웃자, 도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흐트러졌다.

“언제 알려준 거야? 알려준지도 몰랐네.”

“…아, 은우 촬영 전에요.”

다시금 호선을 그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도현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찰나의 이상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

단 한 명, 도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은우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뭔가….

“세상에! 머리를 건들면 어떡해요!”

그러나 은우의 생각은 그들 사이에 끼어든 스타일리스트로 인해서 끊기고 말았다. 쏟아지는 잔소리에 도현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이자 촬영장에 한바탕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은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도 웃음소리를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갔다.

* * *

차가 석양이 진 도로 위를 내달렸다. 핸들을 쥔 채로 전방을 주시하던 경찬호가 옆자리를 흘긋 쳐다보았다. 불그스름한 노을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소년 위로 색채를 덧입혔다. 새까만 머리카락 끝이 언뜻 붉게 반짝였다.

“창문 열어줄까?”

“아니, 괜찮아요.”

창가에서 눈을 뗀 도현이 옆을 돌아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제가 너무 조용히 있었나요?”

“…내가 심심한 건 아니고. 그냥….”

경찬호는 말을 잇는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뭐? 도현이 차 안에서 가만히 있었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갑자기 말을 걸고 싶어졌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

결국 아무 말로 얼버무렸다. 도현은 그 대답을 듣고 픽 웃었다.

“싱겁네요.”

“그러게. 노래라도 틀까?”

“좋아요. 아, 트로트는 말고요.”

“너 트로트 무시해?”

“그건 아닌데, 형은 너무 많이 듣잖아요. 형 때문에 안 들어본 트로트가 없는 거 같아요.”

“…큼, 흠.”

조금 찔린 경찬호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곧이어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도현은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경찬호가 운을 뗐다.

“은우랑 잘 맞더라.”

“그래 보였어요?”

“누가 보면 오늘 처음 보는 게 아니라 형제 사이인 줄 알겠던데. 은우도 너를 잘 따르고.”

까딱거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가만 보면 도현이 너는 외동 같지 않아.”

“외동이 아니면요?”

“아래로 동생 두엇 있을 것 같달까….”

“아쉽게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신기한 거지.”

그것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끊겼다. 편안한 침묵이었다.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도현이 입을 연 건 세 곡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제 며칠 뒤에 보겠네요.”

“그 전에도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네, 그럴게요.”

그 후로도 띄엄띄엄 이어지던 대화는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문득 옆자리가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경찬호가 옆을 돌아보았다. 창밖을 구경하던 도현이 어느새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피곤할 만도 하지.”

촬영이 없다곤 하나, 하루 내내 서서 남의 촬영 구경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가만히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텐데, 일손이 필요한 것 같을 때면 귀신같이 달려가서 도왔다.

스태프들이 황송해하며 말려도 소용없었다. 도리어 눈을 지그시 맞추며 ‘이것만 할게요’ 같은 공수표를 날렸다. 가관인 건 거기에 넘어간 스태프들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다시 생각하니까 어이없네.

“영악해, 영악해.”

자기가 남들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 게 분명하지. 경찬호는 헛웃음을 짓다가 라디오 소리를 낮췄다. 작은 노랫소리, 고른 숨소리 위로 남자의 허밍이 얹어졌다.

노을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 * *

서울로 돌아온 후 시간은 평탄하게 흘렀다.

도현의 일과는 단순했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연기 연습을 하고. 휴식이 필요할 때면 방에 가서 바이올린 곡을 연달아 연주했다. 촬영 전에는 늘 그랬듯이 발레를 비롯한 학원 수업을 멈춘 상태라서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했다.

아,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은혜야, 계속 나랑 대화 안 해줄 거야?”

“흥.”

은혜네 가족이 놀러 온 저녁이었다. 도현은 촬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코 은우의 얘기를 꺼냈고, 은혜는 충격받은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순간 제가 앉은 땅이 무너지기라도 한 줄 알았다.

은혜가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고개를 팩 돌렸다.

“배신자.”

“아니, 은혜야….”

도현의 애달픈 부름에도 은혜는 철옹성이었다. 양쪽 부모님들이 그 광경에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았다. 지금 소리 내서 웃었다가는 은혜한테 무슨 구박을 받을지 몰랐다.

애타는 눈으로 조그마한 등을 응시하던 도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촬영 끝나면 은혜랑 스케이트장에 가려고 했는데.”

“…….”

“은혜는 화났으니까 혼자 가야겠네. 어쩔 수 없지.”

작은 등은 여전히 꿋꿋했다.

“스케이트장 갔다가 뿌띠르에서 망고 빙수도 먹을 예정이었는데 은혜는 싫다니까… 나 혼자 먹어야겠다.”

“흥!”

그래, 이젠 먹을 거엔 안 넘어온다 이거지. 예상외로 은혜의 방어가 튼튼했지만, 도현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혜 학교에서 직업 탐방 숙제해야 한다며? 보고서도 쓰고. 아쉽네. 소속사 견학 허락받았는데. 은혜 친구들도 데려올 수 있게 특별히 부탁해서 받은 거긴 한데….”

아, 걸렸다.

도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렸다.

“…그래도 어쩌겠어. 은혜가 싫다는데. 매니저 형한테 죄송하지만 취소해야겠다고….”

“나, 나 화 안 났어!”

도현의 말이 멎었다. 도현은 제 팔을 덥석 쥔 손을 보다가, 수심 어린 한숨을 내쉰 후 팔을 슬쩍 빼냈다.

“아니야. 은혜 나랑 대화 안 한다며. 그냥 취소를….”

“아, 아냐. 대화할 거야.”

스르륵 빠져나가는 팔을 다급히 붙잡는 손길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신자랑?”

…아주 애를 가지고 노네, 놀아.

제 딸이 도현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것을 본 은혜네 부모님이 허허로이 웃었다.

“배신자 아니야!”

“그럼 뭔데?”

“어… 착한 오빠?”

이젠 토끼 왕자님이라고 안 하네.

어렸을 땐 틈만 나면 토끼 왕자님이라고 부르더니, 고학년이 된 뒤로는 더는 그 호칭을 꺼내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도현은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취소하지 말까?”

“응!”

꾸덕꾸덕. 혹시라도 말을 무를까 부산스레 움직이는 고개에 도현이 웃음을 터트리자, 은혜의 볼이 조금 발개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은혜의 엄마, 윤경희는 애매하게 웃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녀의 시선이 싱글거리며 웃는 소년에게 닿았다.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포부가 큰 건 좋은데… 그래도 이건 너무 가능성 없지 않니, 내 딸아.

서은혜. 열두 살.

벌써 짝사랑 일 년 차에 접어든 어느 가을날이었다.

한없이 평온해 보이는 가을날.

톡, 토독.

긴 줄글이 떠오른 화면을 바라보던 남자가 만족스레 웃었다. 그는 곧 [등록] 항목을 클릭했다. 그렇게, 한 사이트에 새로운 게시글이 올라갔다.

[유명 배우 이모씨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잔잔할 것 같았던 가을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조금은 거칠고, 어쩌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바람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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