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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411화 (412/582)

제411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8)

미간을 잔뜩 구긴 남자에게 시선이 한데 모였다. 따가운 눈길 속에서 글을 읽어 내려가던 경찬호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닙니다.”

딱 잘라 말하는 단호한 태도에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상체를 기울이던 남자가 의자 위로 허물어졌다.

“하아….”

“그럴 줄 알았지. 제가 말했잖아요. 딱 봐도 거짓말이라고.”

가슴까지 들썩이며 탄식하는 새솔의 대표, 정한결을 향해 실장이 타박했다. 정한결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물론 나도 알지. 내 배우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겠어.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잖아. 뭐가 됐든 확실하게 알아야 대응을 하지.”

“그런 사람이 다리를 그렇게 떨어요?”

덜덜덜, 책상 아래서 진동하던 다리가 뚝 멈췄다. 크흠, 정한결이 크게 헛기침했다.

“이건 놀라서 그런 거고.”

출근하자마자 ‘어젯밤에 이도현 인성 폭로 글이 올라왔다던데요?’라는 말을 들은 그의 심정이 어땠겠는가.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정한결이 의자에 몸을 더욱 깊숙이 파묻었다.

“놀라서 그래. 놀라서. 경 팀장. 도현이한테는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리고… 혹시 도현이가 이 일을 알고 있나?”

“연락해 볼까요?”

“아니, 아니. 기다려 봐. 일단 아닌 건 확실하고? 어디서 오해가 생겼을지도 모르잖아. 조금이라도 걸리는 부분 없어?”

경찬호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없습니다.”

“정말? 하나도?”

“제가 항상 같이 다녀서 압니다. 한 번도 누군가와 갈등을 일으키거나 문제 될 만한 언행을 한 적, 없습니다.”

갑자기 대표님이 호출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다. 경찬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얼토당토않은 모함 글이었다. 도현과 모든 일정을 같이했던 그에게는 황당하기만 한, 거짓으로 점철된 모함 글.

경찬호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말이에요.”

“이런 개새끼들.”

“네?”

정한결의 입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욕설에 경찬호가 놀라 되물었다. 정한결이 주먹 쥔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왜 이렇게 내 배우를 가만 못 둬서 이 난리야! 내가 아주 열불이 나 죽겠다, 죽겠어.”

“…대표님.”

경찬호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도현이를 걱정할 줄은….

“이러다가, 어? 우리 소속사가 무능하다고 생각해서 도현이가 다른 데 가면 어떻게 해. 나만 쪽박 차는 거잖아!”

“…….”

“아이고, 이 소식을 또 어떻게 전한담. 저번에 난리 난 것도 아직 정리 안 됐는데….”

“그러니까 그때 소송 진행해야 했다니까요.”

“이 실장은 좀 가만히 있어.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했나? 도현이가 싫대서 못 했지.”

실제로 가 영화관에서 내려간 순간 유튜버를 비롯한 루머 유포자들에게 시원하게 고소를 날리려고 했다. 그의 항변에 실장이 쯧쯧 혀를 찼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결과만 봐야죠. 결과적으로 그때 안 해서 이렇게 송사리들이 날뛰는 거 아닙니까. 이젠 배우님이 떠나도 대표님은 할 말이 없어요.”

“아니, 이 실장은 아까부터 대체 누구 편이야?”

정한결이 발끈해서 외쳤다.

경찬호는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익숙하게 무시했다. 정한결 대표가 예능인으로 활동하던 당시 알던 동생이라 그런가, 두 사람은 허물없이 티격태격하는 편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게 나았다.

경찬호의 눈이 다시금 화면에 닿았다. 하도 어이없어서 세 번이나 연달아 읽고서야 이해되었던 게시글이 눈에 들어왔다.

[유명 배우 이모씨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글을 올리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상대가 너무 어린 나이라는 게 걸려서요.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거짓된 이미지로 세상을 속이는 걸 계속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두 팔을 걷었습니다.

누가 보면 열사 나신 줄 알겠다.

겨우 14살 된 소년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게 목적이면서, 마치 정의감을 위해 움직이는 척 주절거리는 게 무척 괴이쩍었다.

저는 모 방송국 관계자입니다. 최근에는 새로운 드라마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를 만나기 전부터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이미 전해 들은 이야기가 많아서요. 그리고 그는 들은 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습니다. 높은 자리까지 빠르게 올라갔지만, 그 무게를 감당할 성숙이 이뤄지지 않은 아이. 그게 그 배우의 실체였습니다.

그는 촬영장의 폭군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눈짓과 손짓만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물론, 최소 열 살은 많은 이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반말을 내뱉고… 심기를 어지럽힌 존재에게는 용서 따위는 없었습니다. 한 스태프가 실수로 어깨를 치자 야차처럼 일그러졌던 악마의 얼굴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봐도 놀라운 이야기에 경찬호는 그저 할 말을 잃었다. 성숙이 이뤄지지 않은 아이, 폭군? 악마의 얼굴? …누가? 그 이도현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얼핏 그럴듯하게 써 놓기는 했지만… 도현과 한 번이라도 한 공간에 있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쓰지 않을 법한 내용이었다. 모함도 사실과 거짓을 섞어야 진실처럼 느껴지는 거지, 이건 뭐….

외부인이 관계자인 척 썼다면 이해가 갈 텐데,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경찬호의 눈이 한 문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패악은 또래의 배우도 피하지 못했습니다. 친하다고 알려진 건 모두 거짓입니다. 그는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상대 배우를 낮잡아 보며 모욕적으로 굴었습니다.

방송일을 하면서 그토록 충격적인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얼굴이 희게 질린 채 말을 걸던 상대 배우를, 이 모 씨는 ‘말 걸지 마’라며 면전에 대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쫓아내어, 결국 상대 배우는 촬영 내내 아무도 다니지 않는 구석에 서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말리거나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참혹함을 느낍니다.

실명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정황상 정희운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정희운과 도현이 대화를 하고, 정희운이 구석에 간 날이라고 하면 경찬호도 알고 있었다. 고사를 지낸 날이니까.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는 건데.

도대체 누가?

대가를 바라는 것도, 그 아이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른으로서, 그 아이가 더는 엇나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금은 제가 용기 냈지만,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이야기했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그의 세계적인 유명세가 사람들의 입을 막았던 것뿐이니….

마지막으로 관계자 증명하고 가겠습니다.

그가 관계가 증명으로 첨부한 것은 방송국 사원증과 <왕의 길> 촬영 현장 사진이었다. 그래. 이게 바로 다른 고발 글과 달리 정확한 사건 설명 없는, 장황한 척 늘어놓았지만 결국 알맹이 하나 없는 게시글이 이만큼 화제가 된 이유였다.

사원증은 얼굴과 이름이 모두 가려진 채였지만, 남자의 손가락이 등장한 채였다. 그 손가락은 두 번째 촬영 현장 사진에도 똑같이 등장했다.

합성, 아니면….

“그럼, 사진은 합성인가?”

마침 같은 생각을 떠올린 정한결이 중얼거렸다. 경찬호가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정말 관계자일 수도 있겠죠.”

“관계자가 왜? 할 짓이 그렇게 없나?”

그건 경찬호도 공감하는 바였다.

관계자가 왜 이렇게 되지도 않는 망상 글을 써서 이목을 모을까. 그때 정한결의 핸드폰이 크게 울렸다. 화면에 적힌 이름에 정한결이 코끝을 찡그렸다.

“예에, 새솔 대표 정한결입니다.”

조금 못마땅하게 전화를 받은 정한결이 인상을 팍 썼다.

“아니, 우리 배우님 출연해 달라 사정, 사정하실 때는 언제고.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예?”

아마 드라마나 방송국 책임자인 것 같았다. 이미 경찬호에게 증언을 들어 거칠 게 없던 정한결이 큰 소리를 냈다.

“그럼 우리 배우님이 잘못했다는 거예요? 네? 그런 거예요? 예?”

- 아, 아니요. 그렇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뭡니까?”

실랑이하는 대표를 뒤로한 실장이 경찬호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직 배우님한테 연락은 없습니까?”

“예, 안 왔습니다.”

“그러면 일단, 배우님 학교 끝나면 여기로 모셔 오세요. 저는 물론 배우님을 믿지만, 배우님도 알긴 알아야 하니까요. 정확하게 사건 파악한 후에 대응 방향도 정해야 하고요.”

“…네.”

대답은 조금 느리게 나왔다. 경찬호는 그의 발목을 붙잡는 껄쩍지근한 감정을 외면했다. 실장님의 말이 맞았다. 그냥 지나갈 해프닝이든 뭐든, 당사자에게 알리고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모르면 좋겠는데. 문득 든 생각에 경찬호가 한숨을 삼켰다. 처음에는 그냥 애늙은이 같은 외국 배우였는데, 지금은 어느새 도현을 돌봐 줘야 할 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도현이라면 알아도 크게 타격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경찬호가 아는 도현이었으니까.

* * *

막 교문을 통과하던 도현은 익숙한 차량과 그 앞에 서 있는 남자에 멈칫했다. 도현이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매니저 형.”

“어, 학교 끝났어?”

“네. 그런데….”

일정이라도 생긴 건지 물으려던 도현이 말끝을 흐렸다. 경찬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네.

“일단, 차에 타야겠네요.”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도현의 말에 경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석에 앉은 도현이 옆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뭔데요? 말해주세요.”

“큰일은 아니야.”

“안 좋은 일인가 보네요.”

“…점쟁이도 아니고.”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곧장 말 안 하고 안심부터 시키는데 모를 리가.

“뭐길래 그래요?”

“소속사 도착해서 말하려고 했는데… 알았어. 가면서 말할게. 그것부터 읽어 봐.”

경찬호가 건네준 핸드폰을 본 도현은 별생각 없이 글을 읽었다. 경찬호가 초조한 기색으로 그런 도현을 지켜보았다. 도현의 낯빛은 변함없이 고요했다.

그게 도현의 차분함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이런 때만큼은 겉으로 감정을 드러냈으면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더욱 불안했다.

“…이해했어요. 그래서, 이게 진짜인지 궁금한 건가요?”

경찬호가 곧바로 정색했다.

“그럴 리가 있어? 네 옆에 붙어 있었던 게 나인데. 소속사 사람들도 그게 거짓말인 거 다 알고 있어.”

“그럼, 그 외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단 소리네요?”

날카롭게 찔러오는 지적에 경찬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말했다.

“…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선동당한 사람들이 조금 있는 거지.”

인증 사진. 그놈의 인증 사진이 문제였다.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헛소리인데 그 사진 때문에 긴가민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다 평소 어린 나이에 성공한 도현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합세하니, 일이 점점 커진다.

“그래도 안 믿는 사람이 더 많네요.”

“맞아. 안 믿는 사람이 더 많… 잠깐. 너 뭘 보는 거야?”

순간적으로 경찬호의 등골이 싸하게 식었다. 마치 반려견이 준 적 없는 무언가를 질겅거리는 걸 봤을 때와 같은 소름 돋는 순간이었다. 핸드폰을 뺏어 든 경찬호의 눈이 빠르게 화면을 훑었다.

[이거 이도현 아님?]

(첨부)

이 저격 글 이도현 말하는 거 같은데 ㄷㄷㄷ 진짜인가? ;;

- 또 주작이겠지

└ 인증도 있음

- 이모씨라는데 왜 이도현이야? 다른 배우도 많잖아

└ 본문 읽어 보셈 빼박임ㅋ

└ ‘어린 나이의’, ‘너무 빠르게 올라간 높은 자리’, ‘세계적인 유명세’ = 이도현 말고 누가 있냐

└ 이 정도면 실명 언급한 수준인데? ㅋㅋㅋㅋㅋ

- 일단 중립 기어 박는다

└ 인증까지 했는데 뭔 중립

└ 윗댓 본문 제대로 읽은 거 맞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음;

└ ㅇㅈ 나도 중립 박음

└ 22222

- 또 이도현 머리채는 왜 잡는 거야 진짜 ㅠㅠ 얘 업계에서 성격 좋기로 진짜 유명한데…

└ 이도현도 진짜 피곤하겠다 얘 못살게 구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음

└ 너무 잘나서 그럼

- 관종 기어 나왔네

- 나는 안 믿음 할리우드에서 노는 애가 굳이 한국까지 와서 갑질할 이유가 어디 있냐 ㅋㅋㅋ ㄹㅇ 무뇌들인가

└ 모르지. 갑질할 곳 찾아서 한국에 온 걸 수도

…그래도 워딩이 심한 글이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핸드폰 마음대로 써서 죄송해요.”

“아니, 그걸 죄송해할 게 아니라….”

경찬호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 포기했다.

“일단, 소속사부터 가자….”

아까보다 힘이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벨트를 맸다. 도현을 태운 차가 출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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