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12화 (413/582)

제412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9)

…괜찮은 건가.

경찬호는 운전 중에 한눈팔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옆자리로 돌아가는 시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동을 걸기 전 나눴던 대화를 마지막으로 도현은 침묵을 유지했다. 오늘따라 차 안에 내려앉은 정적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노래 틀어줄까?”

“아니요.”

“…그래.”

평소 나오지 않던 단호한 부정이 돌아왔다. 평상시와 완전히 같은 것은 또 아닌 모양이었다. 티가 나야 알든 말든 하지. 경찬호는 노래를 트는 대신에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밀려들어 오며 가을바람이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도현은 자연스레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그, 그래?”

생각을 읽힌 기분에 경찬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창밖에 고정된 도현의 눈동자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과 달리 고요했다.

“네.”

짧은 대답을 끝으로 다시금 정적이 차올랐다. 그들 사이에 맴도는 건 바람 소리와 도로에 울리는 경적이 전부였다. 경찬호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액셀을 밟았다.

도현은 빠르게 지나가는 광경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찬 바람에 볼과 코끝이 조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 * *

“아이고, 우리 아들. 왔어?”

남자의 얼굴에 과도한 친절이 올라왔다. 그 옆에 서 있던 실장이 딴죽을 걸었다.

“언제부터 배우님이 회장님 아들이었습니까?”

“언제부터야. 계약서에 지장 찍은 순간부터지. 자, 자. 서 있지 말고 좀 앉아요. 수업은 잘 들었고?”

탁, 탁. 손수 자리를 털어낸 정한결이 도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도현은 그 손길에 이끌려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마실 거. 우리 아들은 핫초코 좋아하는 거 내가 알지. 이 실장?”

“…얘기 나누고 계세요.”

“그래. 내 것도 해서 두 잔. 아!”

“무슨 일입니까?”

“마시멜로 동동 띄워서. 깜빡할 뻔했네.”

내가 왜 저런 인간 밑에서…. 벌써 백여든 번째 생각을 떠올리며 정한결을 흘겨본 실장이 자리를 떴다. 마주 앉은 테이블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꼬았던 정한결이 다리를 푼 후 시선을 낮췄다. 살짝 주름진 눈가가 접히며 곡선을 그렸다.

“학교생활은 어때요? 생각해보니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는 거 같아서.”

경찬호는 옆자리에 앉은 도현을 흘긋 쳐다보았다. 차에서 내내 침묵을 고수했던 소년은 어느새 옅은 미소를 지은 채였다. 누구나 아는 배우 이도현의 모습, 그대로였다.

“좋아요. 수업은 재밌고, 친구들은 모두 잘 해줘요.”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한 것과 달리 듣기 좋은 목소리는 긴장하거나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경찬호는 안심할 수 없었다.

-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도현이 그런 식으로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표한 건, 그가 매니저가 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걱정과 다르게 대화는 평탄하게 흘러갔다.

“뭐 힘든 일은 없고요? 저 사람 대표다,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요. 편하게. 그냥 옆집 아저씨라고 생각하면 더 좋고.”

“아까는 아들이라면서요?”

“어? 아, 아하하! 물론 아들 맞죠. 예, 또 제가 마음으로 키우지 않았겠어요. 원한다면 아빠라고 불러도….”

평탄하다 못해 조금은 가벼울 정도였다. 방송물 오래 먹은 전직 연예인과 애늙은이 같은 현직 할리우드 스타는 능숙하게 가면을 썼다.

“요즘 힘든 일은 없고요?”

“네, 다 좋아요.”

“아쉬운 거나 바라는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저는 환영이니까. 제가 어려우면 옆에 있는 경 팀장님한테 말해도 좋고.”

“그럴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언뜻 평범하게 들렸는데, 그 일상 같은 대화를 깬 건 도현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어요. 그게 정희운이라면 더요. 애초에 저랑 다른 반이라서, 최근을 제외하고는 접점도 별로 없었거든요.”

곧장 치고 들어온 말에 정한결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는 곧 몸을 바로 세웠다. 유쾌했던 방금과 달리 진중한 눈빛이 도현을 향했다.

“혹시 해서 말하는데, 내가 그걸 걱정한 건 아니에요. 내가 걱정한 건 내 배우밖에 없어요.”

“…….”

“기분 상할까 봐 미리 말하는 거예요.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알았죠?”

“…네.”

정한결이 싱긋 웃었다.

“그래요. 아무튼, 교우관계가 원만하다니까 다행이네요. 싸우면서 크는 거라지만 안 싸우면 더 좋잖아요.”

가볍게 한 말이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한결과 경찬호의 시선이 도현에게로 모였다. 도현은 조금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싸운 적은 있어요.”

“방금 친구랑 문제가 없었다고…?”

“상대가 친구가 아니라서요.”

“…그, 그럼 누구랑? 혹시 선생님?”

진심으로 당혹한 정한결이 말을 더듬었다. 그의 포커페이스가 깨져나간 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도현이 황급히 부정했다.

“네? 그럴 리가요.”

“하, 하하. 그쵸. 그럴 리는 없죠.”

천만다행이었다. 정한결이 어색한 웃음 뒤로 안도감을 감추는 사이 도현이 천천히 설명했다.

“그건 아니고, 선배들과 갈등이 생긴 적이 한 번 있어요.”

“선배들…?”

“네, 3학년 선배들이요.”

심지어 2학년도 아니야?

정한결의 눈동자가 태풍을 만난 여린 잎사귀처럼 흔들렸다. 마찬가지로 처음 듣는 이야기에 경찬호가 도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음, 그게요….”

도현은 그들에게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선배들이 반에 자주 찾아왔고, 그로 인해서 갈등이 빚어졌으며, 지금은 잘 해결되었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정한결의 낯빛에 안도가 차올랐다.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적어도 선배를 상대로 욕설을 내뱉고 주먹을 휘둘렀다는 얘기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정한결이 가슴께를 쓸어내렸고, 심각한 표정으로 도현의 이야기를 듣던 경찬호가 입을 열었다.

“…잘 해결돼서 다행인데, 그런 일이 있으면 말해줘. 나는 네 일정만 케어하라고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만한 일이면 빠르게 대응법을 찾아야 하기도 했다. 그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이 가볍게도 대답했다.

“다음부터는 그럴게요.”

이 실장이 돌아오며 대화가 잠깐 끊겼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자, 초콜릿 특유의 단내가 훅 끼쳤다. 도현의 앞에 마시멜로 두 개가 동동 뜬 핫초코 잔이 놓였다.

“감사합니다.”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아뇨, 괜찮아요. 잘 마실게요.”

단 걸 싫어하는 경찬호에게는 커피가 주어졌다.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앉은 이 실장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도현도 핫초코를 맛보았다. 달았다.

탁, 잔을 내려놓자 작은 소리가 울렸다.

“말씀드린 게 전부예요. 그 외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촬영장에서 다른 분들한테 명령하거나 반말을 한 적도, 제 기억상으로는 없고요.”

“예, 그 말이 맞습니다.”

경찬호가 거들고 나서자 정한결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는 답답한지 옷깃을 조금 잡아당기고선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익명이 문제야.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으니까 아무 소리나 막 던지는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막 지어내고. 내가 다 속이 상하네. 내가 이런데 도현 씨는 어떻겠어.”

그가 상체를 일으켜 양손으로 도현의 손을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도현 씨, 말만 해요. 고소든 뭐든 아주 크게 한 방 날려줄 테니까. 우리 쪽에 진짜 유능한 변호사가 있는데….”

“대표님.”

“이 실장.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인 거 안 보여요? 할 말은 조금 이따가….”

“아니요. 얘기 중에 죄송합니다만, 이걸 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 뭐길래 이래.”

손을 떼고 자리에 앉은 정한결이 실장이 건네주는 노트북을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잔뜩 주름이 일었던 미간이 글을 읽어갈수록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입매가 일자를 그리는 것을 본 경찬호가 초조하게 눈을 빛냈다.

무슨 일이지?

틱, 틱. 조용한 공간에 시침이 지나가는 소리만 울렸다.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정한결이 고개를 든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끝난 얘기 다시 꺼내서 미안한데.”

후우, 정한결이 답답하다는 듯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천장을 한 번 응시한 그가 도현을 바라보았다.

“정말 말한 게 전부예요?”

훈훈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차게 식었다. 세 사람의 시선 속에서 소년이 침묵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낯이었다.

정한결은 도현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사실을 밝혔다.

“글이 하나 더 올라왔어요.”

뭐? 경찬호의 낯빛이 단숨에 굳었다.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던 정한결이 한숨과 함께 노트북을 돌렸다. 도현과 경찬호의 눈에 노트북 화면이 들어왔다.

“나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물론 도현 씨를 믿지만, 만약 도현 씨가 문제 일으킨 적 있다고 해서 탓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도현 씨 도와주려고 모인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 만에 하나라도 숨기는 게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줘요.”

도현은 그 말을 들으며 화면에 뜬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나 가연예중 학생인데, 지금 유명한 논란 글 사실임 (인증 있음)]

ㅇㄷㅎ 원래도 좀 ㅈㅎㅇ 무시하는 기색 강했음… 우리 학교에 그거 모르는 애들 없다. 모르긴 몰라도 ㅈㅎㅇ 따돌리는 거에 ㅇㄷㅎ이 한몫했을걸? ㅋㅋㅋ솔직히 난 일이 터질 줄 알았어. 속 시원함. 선배한테 주먹 휘두르고 동급생 따돌리는 성격 파탄자인데 인성 빨아주는 거 보고 ㅈㄴ 역겨웠거든ㅋㅋㅋ

또 주작 ㅇㅈㄹ 할까 봐 내 학생증이랑 교정 사진 첨부함.

도현이 글을 다 읽었을 때였다.

가만히 있던 실장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삼십 분 전에 올라온 글입니다. 지금 빠르게 SNS를 통해 퍼져가고 있고요. 파악한 바로는 분위기가 우리 쪽에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거 같습니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대표님 말씀대로,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저희가 뭐든 대처할 수 있으니까….”

띠리링!

이 실장의 말이 멎기도 전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경찬호가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받으세요.”

도현의 말에 머뭇거리던 경찬호가 전화를 받았다. 소리를 작게 줄인 탓에 상대방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네, 이도현 매니저 경찬호입니다. …아니요.”

도현을 흘긋 쳐다본 경찬호가 말했다.

“아직 사건 정황 파악 중에 있습니다. 파악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예. …네, 죄송합니다.”

도현이 가만히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정한결의 핸드폰도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현에게 양해를 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한결은 대표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워낙 목소리가 큰 탓에 방 안에 있는 도현도 그 내용을 얼핏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인, 그게….”

“아니… 우리도… 예, 알아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이쪽에 와 닿는 시선을 느끼며, 도현은 잔을 들어 올렸다. 한 모금 마시자 짭짤한 단맛이 혀에 감돌았다. 너무 단 걸 먹어서일까.

도현은 조금, 어지럽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