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20)
그건 작은 어항이었다. 소년 한 명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투명한 어항. 물에 먹힌 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도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까?”
“…….”
“배우님?”
도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유일하게 통화를 하고 있지 않던 실장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주변을 감싼 유리가 깨져나갔다. 순식간에 온갖 소음이 귓가에 쏟아져 내렸다.
“어디 아프십니까?”
실장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아까부터 머리를 누르시길래….”
“…아.”
도현은 그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제 손을 쳐다보았다.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물끄러미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을 응시하다가 손을 말아 쥐었다.
“아니,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희가 도와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도현은 의식적으로 두 눈매를 휘고 입꼬리를 올렸다. 분명 평소와 같은 웃음일 텐데 실장의 눈빛이 묘한 빛을 머금었다. 도현은 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정한결이 안으로 들어왔다. 비슷한 시기에 경찬호의 통화 또한 끝이 나서, 대표실에서 나는 소리는 정한결의 발소리가 전부였다. 그조차도 정한결이 소파에 앉고 나자 뚝 끊겼다.
“끝났어요?”
“큼, 크흠. 일단은….”
정한결이 헛기침을 하며 괜히 자세를 잡는 척 몸을 몇 번 들썩거렸다. 그의 들썩거림이 멎자 이번에야말로 숨 막히는 정적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도현은 허공에 어정쩡하게 띄운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알고 있다. 지금 가장 먼저 입을 열고 상황을 해명해야 하는 사람은 나라는 걸. 그런데 딱 달라붙은 입술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나 왜 이러지.
검은 눈동자에 혼란이 번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도현은 그래야만 하는 사람처럼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강박처럼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느릿하게 심호흡하자 혼란이 차차 잦아들었다.
생각해보면, 교문에서 매니저 형을 발견한 순간부터 어떠한 예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가 보여준 게시글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냥 간결한 의문이 일었다. 왜?
의문이 무색하게도 떠오르는 답은 많았다.
이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많은 존재가 모두 나를 좋아할 수 없어서. 사람은 원래 악의에 쉽게 물드니까. 그러니 안다. 잘 알고 있다. 거기서 의미를 찾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그 부질없는 짓을 멈추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떠올렸다. 늘 그랬듯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추락하는 감정을 잘라낸 채 괜찮은 감정만 손 위에 올렸다. 그러니 정말 괜찮아지는 것도 같았다.
아니, 괜찮았다.
“…그, 아까 내가 놀라서 말을 조금 이상하게 했죠.”
정한결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지친 얼굴이었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깔끔한 행색으로 젊은 기운을 풍기던 그가 이 순간은 본래의 나이처럼 보였다.
“내가 도현 씨를 의심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많이 놀랐고, 또 걱정되다 보니까… 네, 그래서 꺼낸 말이에요.”
“네.”
“…그,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거든요. 우리 쪽에서 입장문 올리면 여론도 금방 돌아설 거예요. 도현 씨도 알잖아요. 원래 여론이라는 게 손바닥 뒤집듯이 왔다 갔다 하는 거.”
“네.”
정한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하기는 했는데… 거기에 신경 쓰느라 이 방에서 소리를 듣고 있었을 도현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도현은 거의 매 순간 웃는 낯이었지만, 가끔 미소가 사라질 때도 있었다.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였다. 그런 장면을 목격한 적 있던 정한결은 내심 소년이 잘 웃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웃지 않는 도현은 여러모로 낯선 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사람 같기라도 했지. 정한결이 맞은편에 앉은 소년을 보며 깍지 낀 손을 꽉 쥐었다.
표정이 사라진 소년은 사람보단 섬세하게 조형된 정물 같았다. 눈꺼풀이 일정하게 깜빡이지 않았더라면 숨은 쉬는지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에이, 모르겠다. 죄책감에 눌린 정한결은 떠넘기기를 택했다. 툭, 정강이에 와 닿는 감각에 실장이 고개를 돌렸다. 정한결이 손가락으로 사인을 보냈다.
그것을 본 실장이 잠깐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진실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이미 보셔서 알겠지만, 해당 문제에 대응하려면 저희가 정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그래, 이 말이었어요.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어? 편하게 말해 봐요.”
몇 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그리고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소년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형광등에 반사되어 흰빛을 품었다.
“몇 가지 덜 말한 거 맞아요. 선배와 멱살 잡는 일이 있긴 했거든요. 제 멱살이 잡힌 거지만.”
“……!”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끝난 일이고, 그걸로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어요.”
“멱살이 잡혔, 아니… 큰일이었잖아요!”
정한결이 놀라 소리쳤다.
이전에 설명할 때는 분명 더 가벼운 뉘앙스였다. 말다툼이 있었지만 그리 심각하지 않았고, 건전하고 건실한 대화 끝에 서로를 이해하고 잘 끝났다는 투라서 그도 안심했던 거였다.
그런데 멱살이 잡혔었다니?
“어, 어디 맞은 건 아니죠?”
“그런 물리적 폭행은 당하지 않았어요. 다치지도 않았고요. 멱살을 풀기 위해서 팔을 비틀긴 했지만….”
“네?”
“선배도 다치지는 않았어요. 멱살을 잡고 위협하길래, 그냥 힘을 풀게 할 의도였거든요.”
“그, 그 정도면 정당방위 같은데…?”
정한결의 시선을 받은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 학생이 다치지 않은 건 확실합니까?”
“네.”
“그럼 이건 오히려 우리 쪽이 피해자겠네요.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 문제는 넘어가고, 정희운 관련해서는요?”
“학교 폭력을 주동한 적은 없어요.”
덤덤한 목소리에 긴장한 눈으로 집중하던 정한결은 이어서 나온 대답에 어깨를 크게 늘어트렸다.
“하아… 그렇죠. 역시 그럴 줄 알았,”
“하지만 정희운에 관련된 건 일정 부분 사실이에요.”
“…예?”
경악을 담아 희게 질린 얼굴이 시야에 비췄다. 사무적인 얼굴을 하고 있던 실장도 눈을 크게 뜬 채였다. 굳이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경찬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도현은 제대로 들었다는 듯이, 다시금 말했다.
“무시한 거 맞다고요.”
* * *
“저 가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 도현아.”
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 도현을 경찬호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도현은 문을 열려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진짜야? 무시했다는 거….”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그렇지만…. 하아. 그래. 솔직히 말할게. 내가 보기에 넌 그럴 애가 아니거든. 다시 한번 생각을….”
“그럼 잘못 보셨네요.”
흘러나온 목소리가 너무 여상해서, 경찬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차가웠다.
“…그러면 그거, 그건 아니지? 인지도가 낮아서 무시했다는 거.”
첫 번째 게시글 내용을 묻는 것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유가 중요한가요?”
“…너,”
“따돌린 적은 없고, 무시한 거는 맞고…. 여기서 더 해명이 필요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게 무슨…!”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뜨거움에 경찬호가 발끈했다. 그러나 뒤이어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도현아…?”
“형, 저 피곤해요.”
“…나는,”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 말을 꺼내려던 경찬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대표실에서 도현을 어르고 달래고 설득하다가, 끝내는 약간의 겁을 주던 목소리와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싸아. 순식간에 달아올랐던 피가 식었다. 경찬호는 그제야 도현의 표정이, 눈빛이, 꾹 다물린 입매가 눈에 들어왔다.
-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처음부터 멀쩡한 게 아니었는데.
밀어붙이고 진실을 요구할 게 아니라 그 심정부터 헤아렸어야 했다. 그동안 너무 멀쩡해서. 인종 논란이 일었을 때도 괜찮았으니까 지금도 그럴 줄 알아서. 온갖 이유가 반사적으로 떠올랐지만 경찬호는 알았다. 결국엔 모두 변명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많은 일이 지나간 후였다. 경찬호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얘기 끝난 거면 가 봐도 될까요?”
“…그래.”
경찬호는 도현이 차에서 내려 문을 닫을 때까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차 안에서 멀어져가는 소년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이 울타리 안으로 사라졌을 때.
쾅! 그가 주먹 쥔 손으로 차체를 내리쳤다. 이내 핸들에 머리를 박은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매니저 실격이다.”
후회해봤자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 * *
도현은 집으로 돌아가며 많은 생각을 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한 채 걸으며.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소중한 것은 소중한 채로 있고, 삶과 연기를 향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도현은 이 정원을 지나쳐 갈 것이고, 잠을 자고 일어나 또 다른 아침을 시작할 것이다.
새삼스레 세계가 뒤집히거나 중력이 무거워진 것도 아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 중에서 도현을 두렵게 만든 일은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두려움은 도현을 주저앉힐 수 없었다. 비난도, 조롱도, 그 무엇도.
그래서 도현은 정말 괜찮았다.
그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얌전한 아이가 되면 사랑받을 줄 알았다. 상처받아도 아닌 척하는 게 익숙해졌다. 그러다가 형을 만났다. 완전한 영혼이 되었다.
다시 없을 애정이 그를 온전하게 만들었다. 그 애정에 보답하고자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에서 보낸 유년기. 그 평범하지 않은 간극을 채워나가기 위해 쉼 없이 노력했다.
인종으로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그저 더 잘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 것으로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면 될 거라고.
될 줄 알았지.
대표실에서 두 번째 글을 본 순간 자연히 깨달았다. 아, 이건 내 노력으로 불가능하구나. 언제까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이 지나가더라도 언젠가 다른 이가 나타날 것이다. 생채기를 입히고, 어떻게든 아등바등 끌어내리려 애쓸 것이다.
현관문 앞에 도착한 도현이 멈춰 섰다. 띠리릭,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도어 록이 열렸다. 집 안은 아무도 없이 텅 빈 채였다. 내부를 훑어본 도현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식을 접했다면 벌써 돌아왔을 테니까. 어차피 알게 될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걱정을 덜기보다는 쉬고 싶었다. 도현은 집 안에 발을 들였다.
도현은 타고나길 합리적인 것을 선호했다.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행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건 무의미하지 않을까.
탕, 두꺼운 철문이 닫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