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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415화 (416/582)

제415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22)

가연 예술 중학교의 창고는 본관과 떨어진 곳에 있어서 인적이 드물었다. 가끔 비품을 가지러 오는 아이들이 들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창고 뒤편에서 십 분 전부터 한 소년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초조한지 핸드폰을 켰다가 끄길 반복하던 소년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터벅. 들리는 발소리에 소년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터벅, 터벅.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기다리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소년을 발견했는지 멈추어 섰다.

“…아.”

짧게 탄식한 도현은 창고와 그 옆에 서 있는 희운을 번갈아 보았다. 도현이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희운은 도현을 살폈다.

반듯이 선 소년은 겉보기엔 정말 멀쩡했다. 선선해진 날씨 탓에 걸친 가디건도, 그 안의 넥타이도,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바지도. 무엇 하나 흐트러진 것 없이 단정했다.

도현은 정말 괜찮아 보였다. 희운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황에 맞지 않게도 불쑥 부러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별것 아닌 일에도 휘청거리는 희운과 달리 아주 단단한 나무 같았다.

…나 혹시 쓸데없는 짓 하는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야. 알고 있잖아. 거짓이 진실로 여겨지고, 그로 인해서 바뀌는 주변 환경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희운을 도와줬던 게 도현이었다. 그게 연민이든 동정이든 상관없었다. 그 덕에 희운은 잠깐이나마 학교가 끔찍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도움받지 않았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가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희운이 결연히 의지를 다질 때였다. 도현이 한숨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아가 놓고 간 물건이 너야?”

“그, 그렇게 말했어?”

상황 파악을 끝낸 도현의 물음에 희운은 말을 더듬었다. 설아한테 나인 걸 숨기고 도현을 불러줄 수 있냐고 부탁하긴 했다. 그런데 물건을 흘렸다고 말했을 줄이야….

잠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도현이 하늘을 응시하더니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다 했지….”

조금 기막혀 하는 것 같았으나, 화난 것 같진 않았다. 얼굴에 작은 성가심만 떠올랐을 뿐이었다.

대뜸 창고 뒤편에 놓고 간 물건을 찾아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들어주고, 심지어 속기까지 했으면서.

아, 그렇구나. 희운은 다시금 느꼈다. 도현은 원래 이런 애였다. 원래 이렇게 다정해서, 희운 같은 애도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준 거였다.

손을 마주 잡은 희운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속인 건 미안해.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그랬어.”

“솔직히 말하면 됐잖아.”

“그러면 네가 안 나올 것 같아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희운은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괜찮아. 예상했던 거잖아. 애써 명랑하게 생각한 희운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해명할게.”

서론을 생략하고 던진 본론에 도현이 눈썹을 까딱했다. 희운은 그런 도현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았다.

일단 저지르긴 했는데, 무슨 반응이 돌아올지 예상이 되질 않았다. 도현은 언제나 희운의 예상을 뛰어넘곤 했으니까.

“네가 왜?”

희운은 이 정도에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나기엔 희운이 그간 겪은 일이 많았다. 두어 번 심호흡한 후 최대한 침착한 어조를 꾸며냈다.

“나는 네가 무시했다고 생각한 적 없어. 촬영장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날 알려준 자리도 나 쉬라고 배려해준 거잖아.”

“내가?”

“…만약 아니었다고 해도 나는 네 덕분에 편하게 있었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비난하는 건 옳지 않아. 내가 엮인 일이기도 하니까 내가 아니라고 말할게.”

준비해온 말은 모두 했다. 몇 문장 빼먹은 것 같았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새하얘서 생각이 나질 않았다. 희운은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러니까 네가 왜.”

“왜냐니….”

예상과 다른 반응에 평정이 깨져나갔다.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얼굴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한 치의 변화 없이 잔잔했다. 왜라는 말과 달리 조금의 의문도 없는 듯 일견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희운이 말을 더듬었다.

“거, 거짓말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나쁜 일이잖아…?”

대답이 없다.

분명 일반적인 윤리에 기초한 말이었는데, 희운은 자기가 아주 이상한 말을 꺼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네 말이 맞아.”

“하아.”

반사적으로 참았던 숨을 내뱉은 희운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지금 희운에게는 무엇보다 반가운 대답이었다.

“그렇지? 그럼 내가….”

“그래. 나서지 마. 그냥 가만히 있어.”

“나서… 아니, 뭐?”

잘못 들은 건가? 희운은 입가에 억지로 매단 미소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황당하게 도현을 쳐다보았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거짓말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나쁜 일이라고.”

“응, 그랬는데….”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희운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그게 왜 그렇게 돼? 결론이 완전히 거꾸로잖아!”

“이상하네. 내가 보기엔 제대로 된 결론인데.”

희운은 도현이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나는 더 할 말 없어. 네 도움도 필요 없고. 솔직히 말하자면… 누가 누굴 돕는다는 건지 모르겠네.”

희운은 크게 뜬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의 뺨이 당혹과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그건 꼭…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돌림을 당하는 위치였으면서 주제넘게 군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네 앞가림이나 잘해.”

희운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 차가운 시선에 희운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마치 주제 파악을 못 하고 함부로 나서는 애가 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도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몰랐다.

얼굴 전체에서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희운은 도현이 저를 무감정하게 쳐다보다가 등을 돌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저 벌겋게 달아오른 낯으로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도현이 기어코 한 걸음을 뗐을 때였다. 희운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빠르게 식는 몸을 느꼈다. 이대로 놓치면 안 돼. 그건 본능이 울린 경종이었다.

“네, 네 팬 분들은!”

그저 발을 붙잡을 요량으로 다급히 뱉은 건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잠깐 당황하던 희운은 이내 진정하고선 말을 이었다.

“네 팬이랑, 친구들, 부모님… 다 널 걱정하고 있을 거 아니야. 혹시 이번 일로 너를 오해할지도 모르고!”

도현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희운을 돌아봤기 때문에, 희운은 약간의 희망을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깊다.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희운은 반사적으로 그리 생각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어서 한없이 깊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글쎄.”

평소보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희운은 지금 도현이 더없이 솔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돌아설 마음이라면 없는 것과 차이가 있나.”

* * *

몇 가지의 일의 경우 짐작을 했음에도 어떠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는 한다.

이유는 가지각색이겠지만.

창고에서 교실로 돌아가는 길은 뜨거웠다. 여름은 이미 지났을 텐데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 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 무, 물건을 흘려서!

갑자기 창고 뒤편에 물건을 흘린 것 같다며 도와 달라길래 의아하긴 했다. 하지만 선생님 심부름 때문에 직접 가기 어렵다는 한설아의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아니, 정말 없었나.

도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런 일이 생기고 난 후, 어떤 방식으로든 정희운이 그를 만나러 오리라 생각했다. 그게 학교에서든, 아니면 소속사에서든. 어쩌면 이쪽에서 그쪽 소속사로 찾아갈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지금 상황의 절대적인 약자는 자신이니까.

썩 유쾌하진 않더라도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의외였다. 이렇게 비밀리에, 남들 눈에 안 띄는 창고 주변으로 도현을 불러낸 정희운이.

그것도 이렇게 속여가면서.

…뭐. 그 부분은 의외지만 그 외에는 진부할 정도로 예상 그대로였다. 대사까지도 완벽하게 똑같았다. 도현은 거기서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했다.

- 그러면 네가 안 나올 것 같아서….

아. 이걸 맞힌 건 의외였지.

의외로 눈치가 빠른 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정희운은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 성격에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눈치가 자연스럽게 늘어난 거 아닐까.

사실 마지막에 한 말도 인상 깊었다. 뭘 알고 한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면 정희운은 꽤 날카로운 편 같았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서, 그렇게 주위를 잘 살피면서.

“근데 왜 그건 모르지….”

진심 가득한 의문이 흘러나왔다.

전날, 두 번째 게시글을 보았을 때. 도현은 손끝에서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다른 이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로 인해 처하게 될 상황이 두려워서도, 그 원색적인 비난이 버거워서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외면하던 것을 맞닥뜨린 거부반응에 가까웠다.

교실 앞에 선 도현이 숨을 골랐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정희운을 돕는답시고 그 반에 출석 도장을 찍기 시작했을 때가 아닐까. 도현은 막연히 그렇게 추측했다.

그때부터 어떠한 직감이 도현의 신경을 간질였다. 고개만 돌리면 선명하게 보일 듯, 확연한 직감이.

그러나 도현은 그것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르는 척을 했다. 상자에 물건을 넣어놓고 물건이 사라졌다 믿는 어린애도 아니면서,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다.

그 죗값일까.

- 모르긴 몰라도 ㅈㅎㅇ 따돌리는 거에 ㅇㄷㅎ이 한몫했을걸?

타인에 의해 까발려진 진실에 속이 울렁거렸다.

사실은… 그래. 언젠가부터 알았다. 알게 되었다. 같이 이동 수업을 듣던 5반 아이들. 내가 정희운을 무시할 때마다 그들이 짓던 표정, 눈빛. 갈수록 변하던 대우.

그리하여 도현이 5반에 등장했을 때 그들이 느끼던 당혹감, 우스운 배신감.

-학교 폭력을 주동한 적은 없어요.

포장지를 한 겹 둘러싼 비겁한 진실이었다. 도현은 분명 학교 폭력을 주동한 적 없었다. 5반 아이들에게. 이동 수업 때 옆자리에 앉았던 선민우에게. 정희운을 따돌리고 배척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었다.

몇 가지의 일의 경우 짐작을 했음에도 어떠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는 한다. 이유는 가지각색이겠지만, 도현의 경우는 그랬다.

그래, 도현은 그저….

- 무시한 거 맞다고요.

알면서도, 무시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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