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23)
“와, 왔어?”
눈을 마주친 한설아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도현은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지만, 먼저 입을 열거나 하지는 않았다. 결국 백기를 든 건 한설아였다.
“미안해! 희운이가 너랑 얘기하고 싶대서….”
“…….”
“무, 무슨 생각 중이야?”
“고민 중이야.”
“뭐를?”
“이걸 잃어버린 물건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였다고 화를 내야 할지?”
“그으렇구나….”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도현도 따라서 방긋 웃었는데, 어째선지 그녀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렸다.
“미안합니다….”
한설아는 이어질 질타를 대비하며 고개를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축 처진 그녀처럼 양쪽으로 길게 흘러내렸다. 장막처럼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치워준 건 도현이었다.
“괜찮아.”
이렇게 쉽게?
너무 선선한 용서에 한설아가 눈을 끔뻑였다. 머리카락이 치워져 훤히 드러난 시야로 도현의 얼굴이 들어왔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상냥한 눈빛.
거기에 홀려 무의식중에 긴장이 풀리자 도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제 막 꽃봉오리를 개화하기 시작하는 소년의 미소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했다. 미인계? 미인계인가? 한설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해해. 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겠지.”
“…어, 응. 너도 걔도 걱정되니까.”
무언가 이상한 뉘앙스가 느껴졌지만 기우라고 여겼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한설아가 어색하게 따라 웃을 때였다.
“응, 좋아하는 애니까 걱정되겠지.”
“…어?”
“그러니까 도와주고 싶은 마음 다 이해해. 너무 걱정하지 마, 설아야.”
“어어?”
쿡 찌르면 펑 하고 터질 것같이 한설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완전히 고장 난 모습에 도현이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아, 혹시 비밀이었으면 미안.”
홈런이었다.
…조금 심했나.
평소의 야무지던 모습은 어디 가고 시선이 닿을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심했던 거 같기도 하고.
이맘때쯤 아이들이 짝사랑에 얼마나 예민한지 알 리가 없는 도현은 퍽 무심하게 눈을 깜빡였다. 딱히 반성의 기색은 없었다.
먼저 속인 건 그녀이기도 했고, 또.
‘숨긴 거 맞기는 했나? 너무 티 나던데.’
가끔 가다 알아달라고 사인을 보내는데 내가 눈치 없이 구는 건가 싶을 때도 있을 정도였다.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그런 도현의 노력을 알아줄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도현 딴에 지킬 것은 지켰다.
그리고….
이 정도 심술은 부리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던 상대를 기어코 마주치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 정도면 많이 봐준 거 아닌가. 그리 생각하며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한설아를 보았다.
…그래도 이제 봐줄까.
손가락으로 그녀의 책상을 톡 치자, 한설아가 전류라도 통한 사람처럼 파드득 떨었다. 그녀는 꿈에서 깬 것처럼 황망한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그럼, 안 놀라게 생겼어?”
“누구한테 말할 생각 없어. 물론 정희운한테도. 그러니까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설아는 여전히 경계심을 버리지 않았다.
“넌, 너는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그냥.”
도현이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괴었다. 입술 사이에서 퍽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이던데.”
“…티 많이 났어?”
“음….”
도현이 대답을 뭉개자 한설아의 얼굴이 다시금 빨개졌다. 그대로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먹을 꽉 쥐고, 책상에 머리를 콩콩 박다가, 벌떡 고개를 치켜들었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엉켜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모습에 도현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희, 희운이도 알까!?”
“그건 나도 모르지?”
“그치? 하, 하하, 그렇겠지….”
“…그래도, 모르지 않을까?”
묘한 데서 눈치 없던데. 뒷말을 생략한 도현이 싱긋 웃자 한설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도현은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얼굴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뭐길래.
도현의 사랑은 세 종류였다.
형을 향한 사랑과 친구를 향한 사랑, 그리고 그 외의 존재를 향한 사랑. 감정을 다루는 연기자답지 않게 도현의 감정 분류는 퍽 투박해서 그 정도의 구분이 끝이었다.
사실상 형을 향한 사랑은 자기애와 맞닿은 면이 있었다. 형이 곧 나고, 내가 곧 형이었으니까. 모순적이지만 그랬다. 그래서 나를 제외한 것들을 향한 사랑의 구분은 두 종류가 전부나 다름없었다.
친구, 그리고 친구가 아닌 존재.
이 투박한 분류 안에서 다비드처럼 다른 이성을 질투하고, 한설아처럼 감정을 주체 못 해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정희운이 따돌려진 게, 그 시작점이 나였다는 걸 알면. 그러면 정희운을 좋아하는 한설아는 어떻게 반응할까? 멋대로 마음을 까발려도 당혹스러워할 뿐 원망하지는 않는 그녀가, 그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나 도현은 궁금증은 궁금증으로 묻어두었다. 그녀에게 그런 것을 물을 만큼 이성적 사고가 마비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도혀어어언!”
외적인 상황도, 딱히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성난 황소처럼 달려온 서일준이 상기된 낯으로 핸드폰을 턱 내밀었다. 도현은 강제로 그것을 건네받았다.
“봤어? 봤어?”
받은 지 1초도 안 지났는데.
“…아니, 기다려 봐.”
“빨리 봐봐, 빨리!”
“뭐길래 그렇게….”
도현의 말끝이 흐려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예쁘게 포장된 마들렌이었다. 도현은 그게 무엇인지 곧장 기억해냈다.
<전지적 참견쟁이들> 촬영 당시 직접 만들어서 스튜디오에 가져갔던 마들렌이었다. 그 밑으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 마들렌이 누구한테 받은 건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같이 찍었던 사진까지 올라와 있었다.
제가 본 도현이는 눈짓과 삿대질로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스태프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오해가 빨리 종식되길 바랍니다.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읽었다.
참 기이한 일이었다. 저 때 친분을 쌓고,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 중인 엑스텐 형들은 조용히 있는데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인 스태프가 나를 위해 글을 올렸다.
대단한 친절을 베푼 것도 아니었다. 고작 마들렌이었다.
“이거 끝 아니야.”
서일준이 화면을 넘겼다. 도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거기엔 화보 사진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발매된 게 아닌 B컷이었다.
“이거 몇 살 때야?”
어느새 주위에 둥글게 선 반 아이 중 한 명이 물었다.
“8살 때….”
“8살? 귀엽다!”
“8살이면… 그때 아니야? 베니스!”
도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글을 확인했다. 글의 주인은 도현의 첫 화보를 찍어주었던 화양연화 스튜디오의 대표, 정은주였다.
그 애를 만나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거였다. 천사가 아닐까?
시작부터 강렬했다.
천사 같던 아이는 카메라 앞에 서자 단숨에 모두를 휘어잡았다. 마치 그곳에 있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하지만 카메라가 사라진 순간,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다시금 사랑스러운 천사로 변했다.
“그랬어?”
“…평범, 했던 거 같은데.”
그 후로도 옹호인지 주접인지 모를 글은 이어졌다.
다시 렌즈 너머로 이젠 소년이 된 아이를 볼 날이 기다려진다.
저게 본심 같은데.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할 때였다.
“이도현.”
목소리의 주인은 서일준이었다.
그는 드물게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님’이라는 장난스러운 호칭도 붙이지 않았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우리가 생각해 봤거든?”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미 우리 반 모두가 동의한 사안이야. 너 빼고. 그래서 너만 동의하면 돼.”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1학년 2반 대표로 내가 해명 글 올릴 거야.”
“…….”
“3학년 선배들과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다 해명할 거야. 이미 5반 몇 명도 섭외해뒀어. 정희운 관련해서는 걔들이 증언을 더 할 거야. 그리고 정희운 본인한테도 물어볼 예정이고.”
“이거 만장일치제야?”
“네가 동의하면.”
“동의 안 하면?”
“우리나라는 원래 민주주의야. 다수결로 간다.”
“…….”
얘가 이렇게 똑똑했나.
할 말을 잃은 도현이 침묵했다.
그가 입을 연 건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럼 왜 물어봤어?”
그 질문에 서일준이 씩 웃었다.
아까의 진지함이 싹 가시고 평소의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알긴 해야지. 네 일인데!”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도현은 복잡한 낯으로 앓는 소리만 흘렸다. 딱히 대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눈만 굴리자, 아까부터 심각한 기색이었던 김병철이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근데.”
“?”
“저 마들렌 진짜 네가 만든 거야?”
조작된 글일까 봐 걱정하는 건가?
“응. 엄마 취미가 베이킹이라서 가끔 같이 만들어.”
김병철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에 도현이 덩달아 표정을 굳힐 때였다.
“근데 왜 나한테는 안 줬지?”
“…….”
“이상하다. 벌써 2학기인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난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는 거 같지. 이상하다….”
“…….”
“이상하네…. 내가 레몬 맛 좋아하는 거 알고 있을 텐데….”
“…만들어 줄게.”
“언제?”
“음….”
“이상하네. 방금 만들어 준다고 했으면서 왜 말을 못 하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김병철의 두 눈은 텅 비어 있어서 더욱 공포스러웠다. 도현은 살면서 처음으로 또래의 기백에 밀려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할 때…?”
“정말?”
“응, 정말.”
김병철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왔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어깨의 힘을 풀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말 지키는 거지?”
“물론.”
“좋아. 그러면….”
그가 의뭉스럽게 말을 늘이자 도현의 등골이 차게 식었다. 설마….
“그럼 나 오늘!”
아까의 기괴한 꼴은 내다 던지고 명랑하게 외치는 김병철에 도현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아니야, 진정하자.
“그래. 그럼 오늘 만들어서 내일 학교에서….”
“이상하다….”
흠칫.
도현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김병철을 보았다. 다시 공허한 눈빛이 된 김병철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끼기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이라고 했는데… 왜 내일 준다고 하지? 이상하네. 이상해….”
꿈이 뮤지컬 배우라고 했던가.
현직 배우로서 말하건대, 지금 당장 지킬 앤 하이드의 무대에 세워도 될 것 같았다. 도현은 떨리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한통속이구나.
“수근수근, 설마 약속해놓고 안 지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영미 엄마. 그럴 리가 있나.”
“수근수근수근….”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도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입으로 수군거리는 거 그만해….”
명백한 패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