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17화 (418/582)

제417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24)

“내, 내가?”

희운이 당혹을 숨기지 못한 채 되물었다.

쉬는 시간에 한설아가 찾아온 건 예상대로였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도현을 불러냈으니까,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할 터였다.

그러나 한설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떻게 됐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내가… 도현이 집에?’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응. 아무래도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너니까. 네가 와서 함께해 주면 큰 도움이 될 거야.”

희운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걔는 알고 있어?”

“도현이?”

“응.”

희운은 그녀의 입술에 집중했다.

그녀의 입 모양이 동그랗게 벌어지는 게 느릿하게 보였다.

“아니. 아직 말 안 했어. 너한테 먼저 물어본 거야.”

“아….”

역시.

희운이 씁쓸하게 웃었다. 따로 불러내서 돕겠다고 말했음에도 차가운 말을 쏟아냈던 도현이다. 그런 도현이 한 시간 만에 마음이 바뀌어서 자신을 집에 초대할 리는 없었다.

딱히 기대하진 않아서 그렇게 실망스럽진 않았다. 그냥 조금 허탈할 뿐.

한설아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거 같았다.

“물론 우리 반 애들만 있어서 불편할 거 이해해. 하지만 그 부분은 내가 최대한 신경 쓸게. 같이 가는 애들도 다 착한 애들이고… 그리고 너도 도현이랑 꽤 친하지 않아?”

희운은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야.”

친해졌다고 여기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희운은 주제 파악을 할 줄 알았다. 자신의 존재는 처음부터 도현에게 달갑지 않았고, 이후에는 동정이 깃들었을 뿐이다. 동정과 친밀함을 헷갈리면 안 됐다.

“그리고….”

걔는 내 도움을 거절했어.

그리 말하면 되는데 어쩐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고 있자니 한설아가 조금 빠르게 말했다.

“곧 수업 시작이라 돌아가 봐야 해. 이거는 조금 더 고민해보고 말해줘. 우리는 6시까지 도현이 집에 모이기로 했거든. 그전까지 말해 주면 돼.”

“아….”

“그럼 나 가볼게. 안녕…?”

반쯤 몸을 틀었던 한설아의 몸이 무언가에 의해 잡아당겨졌다. 의아하게 시선을 내린 그녀는 겉옷 끝자락을 붙잡은 손가락을 보았다. 깜짝 놀란 한설아가 불에 덴 사람처럼 파드득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옷자락도 희운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희운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멋쩍게 웃었다.

“왜, 왜?”

“그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5반을 직접 찾아온 한설아와 달리, 희운은 2반에 직접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 가면 그 애가 있잖아.’

그렇게 거절의 말을 들어놓고 또 찾아가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적어도 희운의 예상 중에서 긍정적인 반응은 없었다. 그것을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갈색 눈동자가 어딘가 간절한 빛을 품고 상대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번호 알려줄래?”

한설아의 동공에 지진이 찾아왔다.

* * *

“피방 갈 사람! 선착순 세 명!”

“너 혼자 가라.”

“아 씹, 왜! 같이 가, 새끼야.”

왁자지껄한 무리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시끄러워서 시선을 줄 법도 한데, 희운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언제 연락하지.

한설아가 다녀간 후, 수학과 역사 수업이 있었다. 수학은 영 젬병이더라도 역사는 꽤 좋아하는 편이라 평소에 집중해서 들었는데, 오늘만큼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현이네 집….”

다갈색 눈이 복잡하게 빛났다.

내가 가도 될까.

한설아는 도현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란 듯이 말했지만, 그건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희운은 알았다.

‘환영받지 못할 거야.’

도현이 자신을 반길 리가 없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머리카락을 더듬은 희운은 손에 집힌 것이 단풍잎이란 걸 깨달았다.

가을이구나.

처음 만났을 땐 겨울이었는데….

희운의 눈이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러 온 날. 도현은 그를 보지 못하고, 희운은 그를 발견한 날. 기어이 운명이라고 착각하고 말았던 그날.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보였지.’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멋대로 운명이라 여기고 다가갔으니. 도현의 입장에선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도깨비불, 신기루.

기묘한 것의 이름으로 도현을 칭했다. 진짜로 이상했던 사람은 희운, 그 자신이었는데도.

이제 희운은 거의 확신한 상태였다. 그때의 그 감각. 그 기묘하고도 신비로웠던 그 감각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통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고. 그 말을 증명하듯, 요즘 희운은 도현을 봐도 전처럼 강렬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사실 그건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변화였다. 그냥 마주칠수록 익숙해져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신비했던 감각은 확연히 사그라들었다.

희운은 생각했다.

아마, 초능력자를 믿는 어린아이는 졸업할 때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희운은 단풍이 물든 길을 걸었다.

한 발짝씩 내딛을수록 과거의 기억도 현재에 한 발자국씩 더 가까워졌다. 입학식 때의 기억, 그다음은 교무실에서의 마주침. 기억은 흐르고 흘러 독서토론 대회를 준비하던 때에 도달했다.

‘그때 되게 좋아했는데.’

같이 팀을 맺었을 뿐 아니라, 도현이 출연하는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 물론 도현에게 물어봤다가 호되게 혼이 났지만….

…어.

-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하려고?

머릿속에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하게?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 미움받을까 두려워서 변명을 쥐어 짜냈지. 도현은 그런 구차한 변명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고민했다. 나는 어떻게 하는 게 맞는지.

너한테 덜 미움받으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다가….

지이잉-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흠칫한 희운이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통화를 표시하는 아이콘과 함께 발신인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매니저 형…?”

작게 중얼거린 희운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희운아. 받았네! 학교는 끝났어?

“네. 지금 집 가는 중이에요.”

- 옆에 친구 없지?

“네. 혼자 있어요.”

- 그럴 줄 알았다. 희운이 너 친구 없잖아.

“형….”

- 아, 풀 죽었어? 왜 풀 죽고 그래. 그럴 필요 없어. 너 왕따였던 거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수화기 너머에서 계속 말이 흘러나왔다.

-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하는 거야. 소심하게 좀 굴지 말고. 남자애가 그렇게 소심하니까 따돌림 같은 걸 당하지.

“하하….”

희운은 어색하게 웃다가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 아? 아, 맞아. 이도현 오늘 등교했지?

“네. 형, 저 안 그래도 그걸로 할 말이….”

- 너 설마 걔 찾아간 건 아니지?

“아, 아니요.”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희운은 금방 후회했으나, 아니라고 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도현이 만난 건 두 명밖에 모르니까….

-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학교에서 마주쳐도 쳐다보지 말고, 대화하지도 말고. 너 연기자잖아. 자연스럽게 피하는 기색 좀 보여주고 그러라고.

“네? 하지만 그러면 오해가….”

- 아이고. 얘가 참 답답하게 구네. 야, 희운아. 생각해봐라. 네 이름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진 적 있었어?

희운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떠들어댔다.

- 지금 한참 네 이름으로 시끄럽잖아. 근데 네가 학교에서 꼬리 흔들어대 봐라. 사람들이 그 루머를 믿겠어?

“형,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 너 그래 가지고 어떻게 성공할래. 희운아, 정신 좀 차려라. 정신 좀. 아직도 모르겠어? 지금 할 수 있을 만큼 화제성을 끌어모아야 할 거 아니야.

“하, 하지만.”

- 너한테 또 이런 기회가 있을 거 같아? 아, 혹시 친구 걱정돼서 그래?

“네….”

들으라는 듯한 짙은 한숨 소리에 희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 네가 원래 착하긴 하지. 형도 사실 마음이 좋진 않아.

예상외로 다정한 말에 희운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러나 그건 오래 가지 못했다.

- …라고 할 줄 알았어? 참 나.

어이없는 코웃음, 그리고.

- 걔 이도현이야. 할리우드 스타. 베니스 최연소 수상자! 네가 걱정할 군번이 아니세요. 예? 정희운 배우님.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사시죠. 꼭 형이 이렇게 일일이 설명해줘야 알겠어?

핸드폰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매니저의 말 위로, 점심시간에 들었던 도현의 말이,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다며 보내던 눈빛이 생각나자 속이 울렁거렸다.

희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모양이었다. 상대가 헛기침하며 다정한 말씨를 꾸며내었다.

- …우는 건 아니지? 형이 방금 좀 흥분했다. 네가 좋은 기회를 놓치려는 것 같아서 내 울분이 다 터져서 그랬어. 희운아, 형 마음 알지?

“…네.”

- 그래. 아무튼, 형 말은….

“형.”

- 야, 너 지금 형 말을 막 끊고… 아니, 아니다. 그래. 뭔데?

“저….”

희운은 한 번 망설였지만, 이내 굳은 눈빛을 했다.

“해명 글 올리고 싶어요.”

- …뭐?

“도현이가 저 괴롭힌 적 없어요. 형도 알잖아요. 그거 사실 아니라고 해명 글 올리고 싶어요.”

- 하, 아니. 무슨….

한참 헛웃음을 내뱉던 매니저가 깊게 심호흡했다.

- 지금까지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건지 모르겠는데, 후우… 희운아. 형이 다시 설명해줄게.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희운은 그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잘라냈다.

“형, 저 용춘 배역 도현이 덕분에 캐스팅된 거 알아요.”

- 그게 지금 왜 나와?

“배역도 도현이 덕분에 따고. 유명세도 도현이 논란 때문에 얻으면….”

저는 대체 뭐예요?

- 또, 또. 또 순진한 소리 하지. 그 기회도 없어서 간절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전 바란 적 없어요.”

- 아, 나. 미치겠네, 진짜….

희운은 스스로가 기생충처럼 징그럽게 느껴졌다. 상대에게 달라붙어서 쪽쪽 빨아먹는 기생충.

반 애들이 희운을 비난할 때, 희운은 그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적 없다고, 이도현을 이용하려고 한 적도, 그로 인해 버스를 타려고 한 적도 없다고 부정했다.

하지만, 이젠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부정해봤자 결과는 그들이 말한 것과 다름이 없는데. 그러면 결국 그들 말이 진실이 되는 게 아닌가?

“형. 저 해명 글 올릴 거예요.”

그건 싫다.

아니라고, 오해 때문이라고 간신히 버텨온 게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마지막 하나 남아 있던 발판마저 사라져서 아득한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 그게 무슨… 하, 씨발. 야, 너 어디야. 거기 가만히 있어. 너 쓸데없는 짓 하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야, 정희운. 대답 안 해? 정희우…!

뚝.

통화를 끊자마자 다시 진동이 울렸다.

희운은 덜컥 겁이 났다. 당장이라도 매니저 형이 달려와서 그를 흉흉한 눈으로 노려볼 것만 같았다.

희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전화를 거절하고, 차단 버튼을 눌렀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모르겠다.

겁쟁이인 주제에 이토록 무모한 짓을 한 적은 처음이라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희운의 삶에서 커다란 변화는, 오롯한 선택은 늘 도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처음은 뉴스에 나온 도현을 보고 배우가 되고자 결심한 것.

그러나 배우 생활은 희운의 생각과는 달랐다. 희운은 원하는 연기보다는 소속사에서 시키는 연기를 해야 했다. 싫어도 좋다고 해야 했고, 좋아도 포기해야 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희운은 원래 고집부리는 법이 없는 아이였다. 체념도 수긍도 빨랐다. 안 된다고 하면 안 하고, 된다고 하면 그때 하고. 그게 당연했는데….

-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하게?

답을 알 수 없어 어떻게 하면 미움받지 않을지 고민했다. 알 수 없었다. 너는 변명을 들어주지도 답을 내어주지도 않았으니까.

아, 내가 물어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구나. 나는 그렇게 나를 돌아보았고, 너는 처음으로 온기가 떠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게 나한테 얼마나 큰일이었는지도 모르면서.

…나도 그렇지만.

희운은 얕은 숨을 내뱉었다. 눈을 문지르자 건조한 눈가가 불긋하게 물들었다. 그 상태로 손에 쥔 단풍잎을 내려다보던 희운은, 손에 힘을 뺐다.

이젠 정말 인정할 때도 됐나 보다. 희운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의 운명이 아닌 소년을, 도현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희운은 도현에게 갚아야 할 게 많았다. 멋대로 운명이라 착각하고 귀찮게 군 것부터 시작해서, 홀로 기대하고 실망한 것, 일방적인 도움만 받은 것….

그러니까.

- 네 앞가림이나 잘해.

네가 싫다고 해도 안 들을래.

팔랑, 걸음을 내딛는 소년의 뒤로 단풍잎이 산들거리며 하강했다.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은 곧 불어온 바람에 어디론가 날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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