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18화 (419/582)

제418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24)

5시 38분. 여름의 끝자락에 걸친 가을 하늘은 여전히 청명했다. 몇분 전부터 정원에 나와 있던 도현은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했다. 멀리서 보면 시간이 멈춘 건 아닐까 의심될 만큼이나 미동 없이.

언제까지고 정지해있을 것 같았던 소년은 불현듯이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였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긴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은 정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이없었다.

‘내가 괜찮다는데.’

가만히 숨죽이고자 원하는 이가 다름 아닌 당사자인데. 정작 내 의견은 완전히 묵살했다. 쩔쩔매던 소속사 사람들과는 달리 완전히 불도저들이었다.

한 발자국 남기고 잠시 멈춰 선 도현이 속으로 수를 세었다. 삼, 이, 일.

따르르!

선명한 초인종 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도현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러나 손가락 끝이 닿은 곳은 잠금장치가 아닌 그 옆의 벽이었다.

- 여기가 아닌가?

- 뭐?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문 너머로부터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손끝으로 벽을 짚은 도현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소속사에 불려갔던 날.

도현은 모두의 기대를 부숴버렸다. 그들이 바라는 반응을 돌려주지 않았고 자기변호를 포기한 채 등을 돌렸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런 각오 없이 벌인 건 아니었다. 도현은 그때 자신이 사회가 정한 게임에서 내려왔다는 걸 충분히 인지한 상태였다.

그러면 뭐 어떤가.

어차피 세상은 타인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평생토록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으로 태어나, 사회라는 게임판 위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뿐이니.

그럼 내 역할을 수행하길 포기한 나는, 뫼르소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까? 의문에 나온 대답은 긍정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뫼르소처럼 나 또한 오직 나만이 이방인이 된 재판장에서, 타인에게 멋대로 재단되고 죄를 선고받을지도 모르겠다고. 꽤 태평하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 여기 맞는데? 자는 거 아니야?

- 일단 몇 번만 더 눌러보자. 안 나오면 전화 걸면 되지.

따르르!

- 두드려 볼까?

- 뇌는 장식이야? 벨 소리가 안 들리는데 두드린다고 들리겠어?

- 아씨, 그럼 벨이나 더 눌러.

따르르르!

기권을 선언한 게임 말은 유리 어항에 스스로를 가뒀다.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닿을 수 없는 어항은 적막했다. 하지만 그만큼 평온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잠깐 그렇게, 모든 걸 뒤로해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 이도현! 우리 왔다!

- 아, 그런다고 들리겠냐고.

- 어쩔. 도혀언! 열어줘!

적막 속에 소리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다.

- 빨리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 너 주거 침입죄임.

침입자는 계속해서 벽을 두드려댔다. 적막도 평온도 그곳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그리하여….

- 내가 전화 걸어볼게.

지이잉-

- 어, 지금 바로 앞에서 진동이….

철컥!

“…열렸다!”

눈앞에 유리 파편이 흩날리는 환상이 어른거렸다.

“야, 왜 이렇게 늦게 열어주냐!”

도현은 조금 찡그린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앳된 낯 위로 조각난 햇빛의 파편들이 반짝였다. 무어라 떠들어대던 아이들이 선을 넘어 안에 발을 들였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유리가 깨졌다.

다시, 게임판 위였다.

* * *

우와, 아이들이 저마다 감탄을 내뱉었다. 그들은 체험학습을 나온 아이처럼 도현의 뒤를 졸졸 따랐다. 또래보다 눈높이가 높은 도현의 뒤를 아이들이 따르니, 마치 어미 오리와 새끼 오리 같았다.

아이들은 기세 좋게 벨을 눌러댔던 것과 다르게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신기해하는 것 같긴 한데 함부로 무언갈 만지거나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데.’

도현은 굳이 말해 주지 않았다.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듯 날뛰던 친구들이 드물게 얌전해진 참이기도 하고….

‘얄미우니까.’

정원을 지나쳐 현관 앞에 선 도현은 도어 록을 열다 말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처음이야. 집에 친구 초대하는 거.”

“…뭐?”

“진짜?”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병철이 짠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심심하면 말해. 언제든 놀러 올 테니까.”

아니, 이 집에 친구 초대하는 게 처음이란 소린데.

뺨을 긁적이던 도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문을 열었다. 아이들은 신성한 나무에 처음 도착한 길잡이 후보들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티비에 나온 집이다!”

<전지적 참견쟁이들>에 도현이 나간 후, 그의 집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금수저 천재 배우라는 말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어서, 그의 집값과 재산을 추정하는 영상이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잠깐만.”

먼저 안에 들어간 도현은 여분의 실내화가 있는지 찾았다. 평소 집에 찾아오는 손님-주로 은혜네 가족이었다-들을 위한 실내화 네 켤레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은혜 사이즈였으니 사실상 있으나 마나였다.

도현이 미안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보았다.

“실내화가 세 개밖에 없네.”

그러나 그들은 조금 다른 부분에서 반응했다.

“집에 실내화도 있어?”

“응. 손님용으로 마련해둔 건데… 이렇게 여러 명이 온 적은 없어서 세 개밖에 없어. 하나 더 있긴 한데 작아.”

도현의 집에 오길 원하는 아이들은 많았지만, 현실적으로 모두를 데려올 수는 없었다. 루카 하퍼의 집 크기면 모를까.

그래서 최종적으로 방문하게 된 친구는 네 명이었다.

사건의 원흉인 김병철, 이번 사건의 책임자를 맡았다던 서일준, 2반의 반장인 한설아, 그리고 5반 아이들과의 교류 및 통신을 맡은 윤지혜.

한 개가 모자랐다.

여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물건을 쌓아둔 곳 가장 아랫부분에 있어서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나 작은데 그래?”

도현은 말 대신 직접 보여주었다.

가운데에 폭신한 토끼 인형이 달린 보라색 아이용 실내화에 아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왜 저런 반응이지?

의아하던 도현은 다음 물음에 깨달았다.

“너, 너 동생 있었어?”

“있긴 하지.”

“뭐!?”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아….”

아이들의 눈에 감도는 실망의 빛에 도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실망할 일인가.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윤지혜의 발 크기가 은혜의 실내화에 딱 맞음으로써 싱겁게 끝났다. 그 과정에서 은혜와 커플로 맞춘 푸른색 토끼 실내화를 본 아이들의 눈빛이 기묘해졌지만, 사소한 일이었다.

잠시 후.

집 탐방을 끝낸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도현의 방 앞에 섰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도현은 괜히 부담스러워졌다.

‘별로 볼 건 없는데.’

도현은 이 부담스러운 순간을 빨리 치워버리잔 생각에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드러난 방의 모습에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와, 대박 깨끗해.”

“이거 무슨 냄새야? 허브?”

“아, 저기 화분에 몇 개 있어.”

메리의 상담실에 갈 때마다 났던 허브향이 생각나서 몇 개 들였다. 창가에 조르륵 놓인 화분은 아침마다 생그럽게 빛나서 보기도 좋았다.

그사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김병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뭐가 또 이상해?”

“아니, 너무 깨끗하잖아.”

그게 왜?

의아하게 쳐다보자 김병철이 음흉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 너 뭐 숨겼지?”

움찔.

도현은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 그에 다른 아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너, 너 진짜야?”

특히 서일준은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방 분위기가 순식간에 이상해졌다. 도현은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변명했다.

“뭘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니야.”

“내가 뭘 생각했는데?”

“…….”

“응? 뭔데? 응?”

“허험, 서일준, 그만해. 도현이도 사람이야, 임마.”

한 대만 때려도 될까.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더니, 도현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찰싹, 하는 찰진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시원하게 서일준의 등짝을 내리친 윤지혜가 허리에 손을 짚었다.

“야, 도현이가 무슨 사람이야. 그리고, 사람이래도 쟤가 너 같은 줄 알아?”

“내가 뭐!”

서일준의 항의에 윤지혜가 도현의 팔을 잡아당겨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때로는 백 번의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효과적이니까.

바로 지금처럼.

“…더러운 세상.”

서일준이 한탄했다.

그의 원망 어린 눈빛에 어색하게 웃은 도현이 손을 뒤로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나 먹을 거 가지고 올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절대로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러그 위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쟁반에 담긴 마들렌을 비롯한 여러 과자들이 그들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뽐냈다.

“시간이 없어서 직접 만들지는 못했어. 다음에 여유가 있을 때 만들어 줄게.”

“어엉, 갱창낭.”

이미 과자를 한입 가득 문 김병철이 손을 휘저었다. 그 난리를 친 사람치고 굉장히 쿨했다.

…목적은 따로 있었단 거지?

기가 차서 웃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누구를 탓할까. 모질게 밀어내지 못하고 집까지 들인 건 결국 자신이었다.

도현은 주섬주섬 각자 가져온 노트북과 태블릿, 핸드폰을 꺼내는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 해야겠어?”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유리는 깨져 나갔고 다시금 게임판 위에 섰다.

하지만, 도현은 여전히 이들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난 그냥 마음만으로도 충분….”

“스탑. 우리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일준아.”

“그렇게 봐도 소용없거든?”

“하지만….”

도현의 처연한 표정에 서일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지만, 이내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안 돼.”

통하지 않나 보다.

도현은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너 아이돌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이러다가 나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노트북을 다닥다닥 두들기던 서일준이 미간을 좁혔다. 자못 진지한 눈동자가 도현을 향했다.

“너 나중에 학교 폭력이나 폭행, 폭언, 갑질, 음주 운전, 마약. 뭐 그런 거 할 거야?”

“…아니?”

“그럼 뭐가 문제야. 내 친구 내가 돕겠다는데.”

이상하다. 오늘따라 서일준이 너무 똑똑했다.

“이제 더는 반박 안 받음! 자, 내용부터 정리하자. 내가 보낸 거 다들 확인했어?”

“지금 보는 중임.”

둥글게 둘러앉은 아이들이 머리를 모았다. 멀뚱하게 있으려니 서일준이 도현의 팔을 잡고선 가까이 끌어당겼다. 도현은 어느 순간 그 원 안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랬다.

저 아이들은 원 안에 기꺼이 도현을 들였다. 오지 않으면 멋대로 잡아당겼다. 그래서 도현은 완벽한 이방인이 될 수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 애들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아니, 그냥.”

바보같이 굴었구나 싶어서.

혼자 심각해지고, 스스로 가두면 뭐 하나. 주변에서 망치며 굴착기며 온갖 것을 가져오면서 결국엔 선을 넘어와 버리는데.

이젠 내 마음대로 혼자가 될 수도 없구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불쾌해야 마땅한데도 도현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였다.

“이, 이거…!”

새된 목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한설아의 놀란 낯을 본 윤지혜가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제발 논란 하나 더 터졌다는 소리만 하지 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한설아가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명 글 올라왔어!”

아이들이 곧장 반응했다.

“뭐? 누가?”

“어떤 새끼가 선수 친 거야!?”

그게 화낼 일인가. 격분하는 서일준을 오묘하게 쳐다보던 도현은, 다음 순간 크게 동요하고 말았다.

“정희운.”

한설아의 목소리가 선고처럼 떨어졌다.

“정희운이 올렸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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