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19화 (420/582)

제419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1)

새솔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랑과 웃음이 넘치지는 않더라도, 나름 화기애애하던 회사는 며칠 전부터 완전히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며칠 만에 눈 밑이 퀭해진 직원들은 사람이 아닌 좀비 꼴로 돌아다녔다.

“로하이 정수기 쪽에서 계속 성화예요. 어떡하죠?”

“기다리라고 해. 그것 말고, 예정된 잡지 인터뷰는 어떻게 됐어?”

“그거 취소된 게 언젠데요.”

윤 팀장이 놀라 되물었다.

“뭐? 누가? 그쪽에서? 미래컴퍼니 거기 말하는 거 맞아?”

“네….”

“허, 인터뷰 한 번만 해달라고 사정사정할 때는 언제고! 아, 뒷골이야….”

“티, 팀장님,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버럭 성을 내자 직원이 움츠러들었다. 팀장은 심호흡한 후 손을 휘적였다.

“이 대리, 일단 거기. 거기 블랙 처리해 놔. 내가 절대 안 까먹으려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새로이 추가된 블랙리스트에 직원이 한숨을 내쉴 무렵이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직원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경찬호 팀장은 누가 봐도 잘생긴 미남은 아니었지만, 깔끔한 복장과 지적인 인상으로 여직원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랬던 남자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건지 넥타이가 비뚤게 매듭지어져 있었고, 희게 질린 입술은 거스러미가 올라와 있었다.

“…상황은 좀 어떤, 아니, 아닙니다.”

말을 꺼내려던 경찬호는 팀장의 표정을 보고 도로 삼켰다. 그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그가 기다리던 연락은 오지 않은 채였다.

“경 팀장님. 도현이한테는 뭐 들은 말 없어요?”

“예….”

“미치겠네.”

경찬호는 그 말에 짙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날 이후, 도현은 연락을 거부했다. 아니지. 딱 한 번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말한 게 전부예요’라는 환장할 대답을 하고 끊은 것도 연락으로 친다면 말이다.

“이렇게 속을 썩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윤 팀장의 한탄에 경찬호는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확실히 도현의 행동은 회사 입장에서 많이 곤란했다.

하지만, 배우와 에이전시를 떠나서 어른과 아이의 입장으로 보면….

“그, 정희운 쪽은 아직도 답이 없어요?”

윤 팀장의 질문이 경찬호의 의식을 일깨웠다. 경찬호는 곧장 낯빛을 찡그렸다. 그 표정에서 답을 찾았는지 윤 팀장의 얼굴도 덩달아 우중충해졌다.

“회사 측에선 애가 섬세하니, 기다려 달라고만….”

“허어.”

윤 팀장이 기가 차다는 듯 숨을 토해냈다.

“저번에는 파악 중이라더니 이번엔 애가 섬세? 참나, 다음번에는 애가 밥 먹고 있어서 안 된다고 하겠어요? 왜, 아주 똥 싸느라 안 된다고 하지?”

윤 팀장이 격분에서 말을 쏟아냈다. 흥분이 섞이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희운의 소속사는 너무 티가 날 정도로 답변을 미루고 있었다.

“정희운, 그 얌체는 뭐 하는 애래요? 도현이 친구라면서요. 근데 이 상황에 가만히 있어?”

“윤 팀장님.”

“…답답해서 그랬어요. 답답해서.”

넥타이를 살짝 푼 윤 팀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경 팀장. 정말 학교로 찾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건….”

물론 학교에 찾아가서 관계자를 싹 불러 모아 얘기를 하면 편할 것이다. 이렇게 하염없이 도현의 연락만 기다릴 필요도 없고.

가만히 생각하던 경찬호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세요.”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생생했다.

조수석에 앉아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던 아이의 검은 눈. 무표정한 얼굴에 차마 숨겨지지 않던 지친 기색. 수조에 떠오른 물고기처럼 하얗던 두 뺨.

도현은 평소에도 남달랐다. 가끔은 깜짝 놀랄 정도로 속이 깊었고, 어떤 때는 어른처럼 처세술이 좋았다. 경찬호는 소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꼈다.

하지만, 그 짙은 피로감은.

격렬한 슬픔도, 분노도 아닌, 그저 지쳤을 뿐인 그 얼굴은. 마치 모든 감정이 타오른 후 재가 된 것 같은 위화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경찬호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기를 택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정한결 대표의 결단 덕분이었다.

도현이 떠난 후, 흥분을 가라앉힌 대표는 경찬호와 비슷한 생각의 수순을 밟은 것 같았다. 그는 대신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 경 팀장님은 그 애를 믿어요?

경찬호는 침묵 끝에 긍정했다.

- 그래요. 여기서 제일 잘 아는 게 팀장님이겠죠.

주름진 이마를 문지른 정한결 대표는 그의 판단을 믿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도현에 관한 일의 전권 위임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 그의 눈이 착잡한 빛을 띨 때였다.

“어, 어어….”

컴퓨터를 보던 윤 팀장이 갑자기 멍청한 소리를 냈다. 저 사람이 요즘 힘들어하더니 정신이라도 놨나. 그 생각에 살짝 안쓰러워질 때였다.

“…제가 아까 뭐라고 했죠? 아니, 뭐든 간에 다 취소할게요.”

“예?”

“정희운? 내가 본 적은 없지만, 애가 참 착하고 바르고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참한 친구네요, 그래!”

“예?”

드디어 미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경찬호는 곧 윤 팀장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해명 글?

“끝났다. 끝났어! 역시 도현이가 그럴 리가 없다니까! 이제야 발 뻗고 잠 좀 자겠네!”

잔뜩 기뻐하는 윤 팀장의 앞에서 경찬호는 함께 안도하면서도,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경찬호는 정희운의 매니저와 가장 많이 통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 정희운의 소속사에서 이런 일을 허락할 리 없다는 것도 알았다.

‘…단독 행동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이어 밀려드는 전화로 인해서 생각이 뚝 끊겼다. 그다음에 1학년 2반 부반장이라는 글이 올라오자 그는 더욱 바빠져서, 그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더 있다가 가지.”

“아니야. 갑작스럽게 온 거잖아. 오래 있을 생각 없었어.”

한설아의 말에 내심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던 아이들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먹기는 얼마나 잘 먹었는지, 바닥에 치킨과 피자의 잔해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내가 치울게.”

아이들이 작은 손으로 어지럽힌 것을 정리하려고 하자, 도현이 말렸다. 어차피 친구들이 가고 나면 싹 치우고 러그도 세탁소에 맡겨야 했다. 몇몇 조심성 부족한 아이들이 과자나 치킨 부스러기를 흘려서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도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컵과 접시를 치운 후 정리를 도와주었다. 도현의 눈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청소였지만, 청소를 마친 아이들이 뿌듯해해서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우리 간다!”

“배웅해줄게.”

“그냥 안에 있어. 우리가 뭐, 애인가.”

애 맞지 않나.

도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웃음만 흘렸다. 마지막까지도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한참 뒤에 멀어졌다. 모두가 떠난 정원에 서 있던 도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 2건]

한 시간 전, 그리고 몇 분 전에 온 전화였다. 발신인은 동일했다.

매니저.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으니, 새로 도착한 메시지가 상단에 떴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를 남긴 모양이었다.

[경찬호 매니저님 : 문자 확인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의 성격을 닮은 문자였다. 간결하고 본론만 담긴. …그런데 왜 존댓말이야. 도현은 눈썹을 까딱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 도현아.

이건 또 반말이네.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 인터넷에… 아니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동안이라고 해봤자 삼 일인데요.”

- 조금 특별한 삼 일이었지.

“조금 특별한… 그렇네요. 여러 의미로 무난하진 않았죠.”

- 걱정 많이 했어. 너 그렇게 보내고 나서 후회도 많이 했고….

“형이 왜요?”

그가 후회할 만한 일이 있던가.

찬찬히 생각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그럼 뭐지?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 그날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를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네 기분을 이해하는 거였어. 이제 와 말하기엔 늦었지만, 미안하다.

“…여전히 그게 사과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형은 매니저로서 해야 할 일을 했잖아요.”

- 너를 보호하는 게 내 일이야. 내가 보호해야 하는 거에는 네 이미지뿐만 아니라 도현이 너 자체도 들어가고. 아니, 그게 가장 중요하지. 네가 내게 실망했더라도… 충분히 이해해.

오랫동안 되뇐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도현은 잠시 침묵했다.

- …도현아? 들려?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 아, 그래.

이어진 정적에 도현은 물었다.

“무슨 생각인지 안 물어보세요?”

- …무슨 생각 중이었는데?

완전히 쩔쩔매는 태도였다. 마치 그와 <전지적 참견쟁이들>을 찍었던 시점으로 되돌아간 기분이기도 했다.

도현은 순순히 말했다.

“제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요.”

한쪽은 됐다는 데도 어거지로 찾아와 기어이 도와주고 떠나질 않나. 한쪽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죄책감에 끙끙거리다가 사과하질 않나….

“이런 게 누구한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누구보다 잘 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줄 사람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기꺼이 제 선 안에 들여 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반 친구들을 보내면서 생각했다.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이제 조금 지친 것 같아서 손을 놔버릴 때면 항상 누군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형이, 두 번째에는 진과 니콜라스가, 지금은 새로운 인연들이.

세상이 나를 조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면 어디까지 버티는지 실험을 해보는 게 아닐까. 적당히 실험하다가 위험하다 싶을 때 수습을 하는 것이다. 그런 우스운 상상까지 했다.

하지만 가장 우스운 건 언제 그랬냐는 듯 두통이 멀끔하게 가신 나였다. 며칠 동안 찌를 듯이 조여오던 통증이 사라졌다.

이래서야, 더 땅을 파고 있어봤자 꾀병밖에 더 될까.

도현이 한숨을 흘렸다.

“형, 그거 아세요? 저는 마음대로 쉬지도 못해요. 제가 가만히 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애들이 있거든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수화기 너머에서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할 말을 고르는 상대를 개의치 않고 도현이 말을 이었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저울이 존재하고, 이게 수평을 맞추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더라고요.”

말을 끝낸 도현이 싱겁게 웃었다.

“아무튼, 그래서 용건이 있을 거 아니에요? 하려던 얘기가 뭐예요? 아, 사과 말고요.”

자유로운 바람이 도현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도현은 제가 완전히 세상으로 나왔음을, 자신은 결국엔 그 무엇도 먼저 놓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 * *

한편.

띠링!

- ㅋㅋㅋㅋ 그럴 줄 알았다

- ㅇㄷㅎ 욕하던 놈들 어디 갔냐

- ㅅㅂㅋㅋㅋㅋ 인퀴벌레들 드리프트 오지네 ㅈㅎㅇ 욕했다가 ㅇㄷㅎ 욕했다가 이번엔 그런 적 없는 척?

└ 응 인류애 바사삭~

- 야 원글아 너 좃됐어ㅋㅋㅋㅋㅋㅋ

띠링, 띠링.

- 아 고소미 달달하다~

- 이 새끼 벌벌 떨고 있는 거 아님?ㅋㅋㅋㅋㅋ ㅅㅂ 속시원

- 이참에 인생 쓴맛 좀 보고 정신 차리고 그래라

“시발….”

불을 끈 방 안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 소년이 강박적으로 다리를 떨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직 고소한다는 기사도 없잖아.”

몇 초에 한 번씩 기사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면서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가 올렸던 게시글은 진즉 삭제한 상태였다. 그러나 해당 게시글의 캡처본이 커뮤니티 이곳저곳은 물론 기사글에 자꾸 등장해서 그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설마, 삭제했는데 고소하겠어? 그리고 처음 일을 벌인 것도 내가 아니라 스태프 사칭한 병신 새끼….

그때였다.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소년이 다급히 핸드폰을 껐다.

- 창석아, 정말 저녁밥 안 먹니?

순간 느꼈던 공포와 불안은 모두 분노의 기폭제가 되었다.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윤창석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 안 먹는다고 했잖아! 안 먹는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데!”

- 엄마가 너 좋아하는….

“시발, 뭐든 됐으니까 제발 나 좀 놔둬!”

제발, 세상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싶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소년은 뜬눈으로 공포스러운 밤을 지새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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