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421화 (422/582)

제421화. 소슬하니 부는 바람에 (3)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곤 묘한 눈을 했다. 얼마 전에 정희운과 대화를 나눴던 바로 그 장소였다. 나만 여기가 이렇게 핫 플레이스인 걸 모르고 있었던 걸까.

인적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구석진 곳에 왔건만, 윤창석은 여전히 불안한 눈치였다. 그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윤창석이 어깨를 움찔 떨며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보란 듯이 부러 고개를 까딱했다. 그제야 윤창석은 이곳에 그들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 듯 부산스럽게 구는 걸 멈추었다.

이어서 침묵이 내려앉았다.

또 이 상황인가. 도현은 데자뷔를 느끼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러나 정희운 때처럼 먼저 입을 열어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도현은 속으로 일 분을 세었다. 딱 일 분만 기다려주고 갈 생각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남아돌아도 이렇게 낭비할 시간까진 없었으니까.

마음속에서 60개의 수가 지나갔다.

“어, 어디 가?”

“언제까지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요. 벌서는 것도 아니고.”

“잠깐…! 잠깐, 기다려!”

도현의 심드렁한 표정은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것처럼 보였다. 조급해진 윤창석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

“…음.”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응? 내가 정말…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이상하네요. 제가 선배한테 사과받아야 할 일은 없는 거 같은데요.”

“그, 그게….”

윤창석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지금 당장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무릎을 꿇든 머리를 박든 간에 해결을 봐야 한다는 걸 알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거부감이 치솟아 올랐다.

쟤는 1학년인데.

남들한테 들킬까 봐도 있지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마음도 컸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음에도 정작 상황이 닥치니 뭉그적거리게 됐다.

그러나 윤창석의 얄팍한 자존심은 도현이 다시금 흥미 잃은 눈을 하는 순간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충동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내가, 내가 그 메이트판 게시글 올렸어. 진짜로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아니야, 미쳤어. 내가 미쳐가지고 그랬어.”

“…….”

“지, 진짜 내가 잘못했어. 정말 많이 반성했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근데 이거 우리 부모님 알면 안 돼. 나 진짜 큰일 나. 내년에 고등학교도 가야 하는데….”

“…하아.”

도현이 손으로 눈을 비볐다. 상대가 무릎을 꿇고 있다 보니 자연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도현의 입에서 다시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단 일어나세요. 흙바닥에 왜 앉아 있어요.”

“…너, 넘어가 주는 거야?”

“전 일어나라고 했지, 다른 소리는 한 적 없는데.”

“안 일어날 거야.”

“네?”

황당하게 쳐다보자 윤창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도현이 볼 수 있는 건 그의 정수리뿐이었다.

“네가 용서해줄 때까지 안 일어날 거야.”

고집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이게 뭐 하자는 걸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골이 당겼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도현이 생각했다.

실은 윤창석이 팔을 잡은 순간부터 용건은 대충 눈치챘다. 그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등장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애초에 이전부터 심증은 가지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멋대로 나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도현은 새삼 여기가 중학교고, 저기서 무릎 꿇고 있는 선배가 16살이란 걸 느꼈다. 그러니까, 애새끼 같단 소리였다.

“…그럼 계속 그러고 계시든가요.”

더 상대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도현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윤창석은 속으로 설마, 하는 의심을 품었다. 무릎까지 꿇었는데 설마 진짜로 가 버릴까.

도현이 멀어지고, 발소리조차 희미해졌음에도 계속해서 생각했다. 돌아오겠지. 화가 나서 잠깐 떠나는 척한 걸 거야. 돌아오겠지….

…안 돌아오잖아, 시발!

벌떡 일어난 윤창석이 뜀박질을 했다. 미친 듯이 달리니 도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가 팔을 잡아채기 직전,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선 도현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계속 안 있고요?”

순간 자신을 조롱하는 건가 싶어 울컥했지만, 도현이 워낙 표정이 없어서 그런지 헷갈렸다. 윤창석은 다시금 무릎을 꿇고 빌려다가 아까와 달리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단 걸 깨닫고 굳어버렸다.

그런 윤창석을 보고 도현은 픽 웃었다.

익명 속에 숨어 남을 공격할 용기는 있지만, 정작 자신이 저지른 일을 책임질 용기는 없는 사람. 그게 윤창석에 대한 도현의 평가였다.

“선배. 우리 이렇게 할까요?”

“뭐, 뭐를?”

“만약 선배가 잘못한 일이 이번 일뿐이라면 선처, 그거 해줄게요.”

“……!”

“없던 일로는 못 해줘요. 선배 부모님께서 선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고등학교는 갈 수 있겠죠.”

“고, 고맙…!”

“하지만.”

도현은 윤창석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를 바라보는 검은 눈엔 한 줌의 온기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잘못한 일이 ‘이번일 뿐’일 때 이야기예요.”

선처라는 말에 꽂혀버린 윤창석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도현이 물었다.

“그럼 선배도 동의하시는 거죠?”

“어! 진짜 내가 정말 잘못….”

“사과는 됐고요.”

도현은 안도하는 상대를 향해 입꼬리를 당겨 보였다. 대리석처럼 흰 뺨이 햇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났다. 살아 있는 사람 같은 부분이라고는 생기가 도는 입술뿐이었다.

“좋네요. 말이 통해서 다행이에요.”

그게 악마의 미소일지, 천사의 미소일지. 지금의 윤창석은 미처 알지 못했다.

* * *

윤창석은 하루 사이에 지옥과 천국을 오간 기분이었다. 고소 사실을 알았을 땐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래도 희망이 생겼다.

‘이도현을 찾아가길 잘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대단했다. 이런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해결 방법을 모색한 자신이 말이다. 결국 어떻게든 모면은 하지 않았던가.

‘그래, 엄마한테 다 말하자.’

처음에는 혼내겠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엄마니까.

그리고 선처해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윤창석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간 윤창석은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처음 윤창석의 말을 들은 엄마는 경악했고, 다음에는 분노했으며, 마지막으로는 가슴을 마구 쳐댔다.

“내가 애를 잘못 키웠지. 잘못 키웠어!”

“어, 엄마. 그래도 최악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연예인 한다는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고!”

“진짜 아니라니까? 이도현이 선처해 준다고 했어!”

그 말에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 이도현이? 그게 진짜야?”

“응. 오늘 점심시간에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그러니까 선처해 주겠다고 말했어. 진짜야.”

“…하아아.”

엄마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몇 분 사이에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그녀가 속이 터진다는 눈으로 윤창석을 보다가, 그의 등을 내리쳤다.

“이놈아. 어?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어. 너 중학교 3학년이야. 해도 될 짓 안 될 짓 구분해야 할 나이라고.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어!”

“어, 엄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 때문에 진짜 미친다, 미쳐.”

그녀는 한참 동안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래도 정말 선처를 약속했다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일단 너 쥐 죽은 듯이 있어. 네 아빠가 알게 되면 집안 뒤집어지니까. 알겠어?”

“아, 알겠어….”

“앞으로 멍청하게 좀 굴지 말고! 학생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인터넷에서 루머를 퍼트려! 내가 널 잘못 키워도 한참 잘못 키웠지!”

처음에는 잔뜩 기죽어 작게 대답하던 윤창석도 점점 억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래도 내 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걔가 처음에….”

“시끄러워! 꼴 보기도 싫으니까 방에 들어가 있어!”

엄마한테 쫓겨나듯이 방에 들어온 윤창석은 욕설을 내뱉었다. 잘못했다고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한테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기분이 팍 상했지만, 이내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윤창석도 그간 아무것도 안 알아본 건 아니었다. 명예훼손 같은 죄목은 친고죄라서 고소인 측이 고소를 취하한다면 종결처리가 될 수 있었다. 합의금을 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범죄 사실이 남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엄마한테도 사실대로 밝혔고. 이제 일만 조용하게 지나가면, 그러면 되는 거였다.

그러나 며칠 뒤.

기다렸지만, 결코 반길 수 없는 전화가 엄마한테 걸려왔을 때 윤창석은 심장이 크게 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통화가 진행될수록 윤창석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기 때문도, 기어이 고소를 당했다는 소식 때문도 아니었다.

“악플…?”

윤창석이 당황한 건, 그의 소환 이유가 메이트판에 올린 게시글이 아닌, 인별에 달았던 댓글이기 때문이었다.

“윤창석. 너 아니지? 너 악플 쓴 거 아니지? 어?”

엄마의 초조한 물음에 윤청석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잘못 전화한 거 아닐까? 내가 언제 악플을 썼지? 나는 그런 적이….

…아.

- 사진 좀 제발 그만 올려라 느그 엄마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이라는데 자식새끼는 딴따라 짓이나 처하고 있네 ㅋㅋㅋㅋ

1학년 2반 교실에서 그런 소란이 있고 나서 오갈 길 없는 분노를 풀 곳이 필요했다. 윤창석이 선택한 것은 도현의 인별이었다. 가계정을 만든 그는 게시글 하나하나 들어가서 댓글을 적었다.

- 똥양인을 데려다 쓰니까 저 모양이지ㅋㅋㅋ 얼굴만 봐도 쏠리니까 제발 자진 하차 좀

- 눈치 좀 챙겨라 너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혼자 관종짓 오지게 하네 제발 정신 차리고 영화 하차해

- 오디션 비리 해명 좀

머릿속에 생각나는 게 너무 많았다. 차마 이 중에서 무슨 댓글이 고소당한 거냐고 묻기 힘들 정도로. 그리고 그제야, 당시에는 흘려 넘겼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었다.

- 어디까지나 잘못한 일이 ‘이번일 뿐’일 때 이야기예요.

“말 좀 해봐. 어? 엄마 피 말려 죽이려고 이래, 너?”

낯빛이 퍼렇게 질린 엄마가 팔을 잡고 흔들었다. 윤창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흔들리기만 했다.

* * *

“계속 연락이 와요?”

“응, 아무래도….”

새솔에서 고소를 진행한 후, 소속사로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대부분 고소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소속사에 전화해서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호소하며 선처를 부탁했다.

“괜찮아?”

경찬호의 질문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끄러워질 걸 예상하고 한 일이니까요….”

때부터 모은 자료라서인지 사건 수가 많았다. 그만큼 새솔도 바빠졌고 도현 또한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도현은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이제 논란도 해결되었으니 <왕의 길> 촬영도 진행될 텐데, 신경이 분산되는 게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룰 수는 없으니까.’

미루는 순간 사람들은 새솔이 단순히 겁만 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대한 경각심도 더욱 낮아지겠지. 도현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 3학년도 선처 없이 진행할 거야?”

저 빗발치는 전화에는 윤창석도 한몫하고 있었다. 경찬호의 질문에 도현이 무슨 문제 있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니, 같은 학교니까. 혹시라도 네가 신경 쓰일까 봐서.”

“저는 기회를 줬어요.”

그때, 윤창석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잘못한 게 이번뿐만이면 선처해 주겠다는 말. 선처뿐일까, 학교에 큰 소문이 나지 않게 조용히 묻어줄 의향까지 있었다.

그다지 좋은 인연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번 얼굴을 맞대고 대화했던 사이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배니까. 도현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정이자 아량이었다.

“그걸 걷어찬 건 선배예요.”

정확히는 윤창석이 그간 해온 선택의 결과였다.

본인은 어린 치기에 한 실수라고 하지만… 그렇게 치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이 날 죄가 어디 있을까. 술에 취해서, 욱해서, 그날따라 기분이 좋지 않아서. 윤창석의 변명은 도현에게 딱 그 정도의 감흥만 줄 뿐이었다.

“저번에 얘기한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지난번, 패스파인더 관련 이슈 이후 새솔에서 처음 올렸던 입장문은 악플러를 향한 경고였다. 한 번은 봐주겠지만, 또다시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늦었으리라고.

그 메시지를 알아듣고 멈춘 사람에게까지 매정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겐 이미 모두 합의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두 예외 없이 절차대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윤창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 학교 측에 전달해 놓을게. 같은 학교다 보니, 학교에서 너한테 접근하거나 해코지하려고 할 수 있으니까.”

“네, 부탁드려요.”

경찬호를 향해 웃어 보인 도현은 생각했다.

알아보니까 윤창석은 만 14세를 넘겨서 형사 처벌의 대상이었다. 운이 나빴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3개월만 더 어렸어도 형사미성년자였을 테니까.

…뭐, 그래도 미성년자인데다 초범이니까 벌금형이나 기소유예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기소유예가 되더라도 그전까지는 지옥에 있는 기분일 테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죗값은 치르겠지만.

도현도 이 상황이 긍정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선처가 없었다는 게 알려지면 지금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자신이 피해자인데도 사람들은 저를 비난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조금 매정하고 무서운 편이, 만만하고 건들기 쉬운 것보단 낫지 않나. 도현은 가볍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니 3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첫 루머 유포자를 만날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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